‘확 깎인 자존심’…이젠 돈보다 명예다
▲ 캐리커처=장영석 기자 zzang@ilyo.co.kr | ||
# 보라스와의 결별 이유
보라스와의 결별은 충격이기도 했지만 어느 정도 예상된 수순이었다. 박찬호에게는 가장 절박한 이번 겨울이 슈퍼 에이전트인 보라스에게 다른 의미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보라스는 올 겨울 마쓰자카 다이스케와 배리 지토 등 1억 달러가 넘는 계약만 세 개를 성사시키는 등 그 어느 해보다 바쁜 스토브리그를 보냈다. 거물급의 협상이 줄을 이으니 당연히 이젠 평범한 투수가 된 박찬호의 계약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만약 박찬호가 보라스와 일찍 정리하고 새로운 에이전트를 찾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그건 결과론에 불과하다. 시장 경제의 원칙에 따라 인기가 시들해진 상품이 뒤로 밀리는 현실은 당연지사. 하지만 박찬호에게 우선권을 두는 에이전트가 업무를 맡았더라면 조금 더 좋은 조건으로 원하는 팀과 계약을 맺을 수 있었을 것이다.
# 원하는 팀은 많았다
원하는 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본인이나 전 소속팀 샌디에이고 파드레스가 서로 관심이 있었다. 그리고 작년 파드레스를 맡았던 브루스 보치 감독이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로 옮겨가면서 역시 박찬호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그 외에 시애틀 마리너스나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휴스턴 애스트로스 등 선발 투수가 필요한 팀들에서도 관심을 보였고 스토브리그가 진행되면 각 팀마다 로테이션의 윤곽이 잡혀가자 투수난에 다급해진 워싱턴 내셔널스와 뉴욕 메츠, 토론토 블루제이스 등에서도 호기심을 나타냈다.
그러나 협상을 늦게 시작했고 이것이 핸디캡으로 작용했다. 4선발이 필요한 팀과 5선발이 필요한 팀의 절박함은 확실히 차이가 난다. 5선발이야 정 안되면 마이너리그의 유망 신인으로 메워갈 수도 있지만 적어도 4선발까지는 제대로 갖춰놓아야 팀당 162게임의 대장정을 치러낼 수 있다.
많은 팀들이 3, 4선발급이 필요했을 때 박찬호를 적극적으로 시장에 내놓았다면 아마 메츠에서 제시한 조건보다 훨씬 더 좋은 조건으로 팀을 고를 수 있었을 것이다. 1월 하순까지도 본격적으로 협상에 임하지 않았던 것은 분명히 악재로 작용했다.
# ‘199이닝’의 의미
보장된 연봉이 60만 달러라는 것은 박찬호의 현주소다. 만약 스토브 리그 초반부터 적극적으로 세일즈를 했더라면 150만 달러 정도는 보장을 받고 인센티브를 추가한 계약을 맺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난 몇 년간 부상과 부진이 이어진 데다 작년에도 장출혈이라는 악재가 끼면서 전반기의 좋은 모습을 이어가지 못한 것이 협상 테이블에 앉았을 때 선수 측에 불리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메츠 구단에서는 밑져야 본전이라는 입장에서 최소한인 60만 달러를 보장해주고 박찬호가 199이닝 이상을 던져준다면 300만 달러까지 기꺼이 내놓겠다는, 절대 밑지지 않는 계약서를 내밀어 사인을 받아냈다.
선발 투수가 제 역할을 충분히 해냈다는 지표인 퀄리티 스타트는 ‘6이닝 이상 3자책점 이하’가 기준이다. 그렇다면 한 시즌에 정확히 30번의 퀄리티 스타트를 한 투수는 180이닝을 던지는 셈이다. 199이닝 이상을 던지려면 34번의 퀄리티 스타트가 필요하다.
작년에 빅리그에서 199이닝 이상을 던진 투수는 총 46명이었다. 메츠 투수 중에는 톰글래빈이 가장 많이 던졌는데 198이닝이었다. 한 팀에서 평균 1.5명 정도가 겨우 도달하는 수치가 199이닝.
박찬호는 통산 세 번 200이닝을 돌파한 적이 있다. 모두 다저스 시절로 2001년의 234이닝이 최고였다. 그러나 2002년 텍사스 이적 후부터는 한 번도 200이닝에 근접한 적이 없다. 가장 많이 던진 것이 2005년으로 텍사스와 샌디에이고에서 총 155.1 이닝을 던졌을 뿐이다.
결국 올 시즌 박찬호가 199이닝을 던질 확률은 가능성보다는 불가능 쪽이 더 높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박찬호는 겨울 훈련을 충실히 소화했고 부상에서 완전히 회복돼 지난 수년간 최고의 컨디션을 자신하고 있다. 만약 199이닝을 넘어선다면 큰 이변이 없는 한 승수도 10승을 훌쩍 넘기게 된다. 그렇게 되면 메츠도 좋고 박찬호도 좋은 최상의 사니리오가 될 수 있다.
결국 박찬호는 올 시즌 돈보다는 명예 회복과 능력을 다시 입증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 첫 단추가 바로 이번 주에 시작된 스프링 캠프다. 어느덧 34세 노장 투수가 됐지만 박찬호에게 또 한 번의 치열한 생존 경쟁이 기다리고 있다.
민훈기 메이저리그 전문 기자minkiza@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