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만 빠른’ (한양대 92학번) 찬호 ML대박 그땐 몰랐지
▲ 선동열 | ||
가장 화려한 뉴스들을 장식한 부문은 바로 한국 스포츠. 92바르셀로나올림픽을 통해 탄생한 스포츠 스타들과 프로야구, 프로축구에서 각종 기록들을 갈아치우며 ‘영웅’이 된 스타들로 인해 대한민국이 함께 웃고 울었기 때문이다.
<일요신문> 15년 역사와 함께 스포츠 인생을 살아온 스포츠 스타들의 어제와 오늘을 살펴본다.
15년 전 프로야구는 부산을 흥분의 도가니로 만들었다. 당시 한국시리즈에서 예상과는 달리 강병철 감독이 이끄는 롯데가 김영덕 감독의 빙그레를 4승1패로 꺾었다. 김영덕 감독은 대전 팬들의 비난을 피하기 위해 동남아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시계를 돌려 15년 전의 프로야구로 돌아가 보자. 92년 프로야구에서 화제가 됐던 인물은 누구일까.
선동열
92년은 ‘선동열 공백기’였다. 선동열은 92년 4월 11일 비바람이 몰아치는 가운데 진행된 잠실 OB전에서 삼진 16개를 기록하며 개인 통산 29번째 완봉승을 따냈다. 하지만 좋지 않은 날씨에 138개의 공을 던지는 와중에 오른쪽 어깨 건초염 부상을 당했다. 어깨 부상은 투수에겐 치명적이다. 게다가 건초염은 잘 낫지도 않는 부상이었기 때문에 선동열은 그 해 겨우 11경기에 출전, 2승8세이브에 그쳤다.
당시 일화가 있다. 선동열의 아버지 고 선판규 옹이 “근육을 다친 데에는 말고기가 좋다”면서 어디선가 말고기를 구해온 것이다. 먹으라는 게 아니었다. 생고기를 쓰윽 잘라서 어깨에 붙여놓은 뒤 붕대로 칭칭 감아놓게 했다.
선 감독은 “처음 하루이틀은 그나마 나았다. 하지만 차츰 말고기가 썩으면서 냄새가 얼굴로 올라오는데 환장할 뻔했다”고 당시를 회상한다. 그밖에도 근육에 좋다는 온갖 보양식을 다 먹어봤다고 했다.
▲ 박찬호 | ||
박찬호
야구계에선 92학번을 ‘황금 학번’으로 부른다. 한양대에 입학한 박찬호를 비롯해 고려대 조성민, 연세대 임선동 등 훗날 이름을 날린 선수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박찬호는 본래 임선동 조성민에 비해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공만 빠르지 전혀 제구가 되지 않는 투수로 국내 구단들에 알려졌다. 그랬던 박찬호가 대학 시절 국제대회에서 잇달아 탈삼진 쇼를 선보이자 LA 다저스가 눈독을 들였고, 박찬호는 결국 94년 초 당시 한국을 깜짝 놀라게 할 정도의 금액인 계약금 120만 달러에 다저스 유니폼을 입었다.
공주고 출신인 박찬호는 연고팀 빙그레 이글스(현 한화)에 입단하는 게 꿈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빙그레가 알뜰하게도 2000만 원의 계약금을 제시하는 데 그쳤다. 한양대 진학과 빙그레 입단을 놓고 고민했던 박찬호는 기대에 못 미치는 계약금에 실망해 한양대로 방향을 틀었던 것이다.
당시 빙그레가 계약금을 1000만 원만 더 올려줬어도 프로야구와 한국인 메이저리거 역사가 바뀔 뻔했다. 어찌됐든 92년 박찬호의 한양대 진학은 2년 뒤 한국인 최초의 메이저리거 탄생을 알리는 계기가 된 셈. 92년은 박찬호와 한국 야구에 있어 모두 의미가 큰 해였다.
▲ 장종훈(왼쪽), 오봉옥 | ||
92년은 프로야구 홈런 역사에 새 장이 열린 해였다. 빙그레 장종훈이 정규시즌 125경기에 출전해 2할9푼9리의 타율과 함께 전인미답의 41홈런을 기록했다. 프로야구 최초의 40홈런 돌파였다. 98년 타이론 우즈(42홈런)에게 기록이 깨지기 전까지 41홈런은 언감생심 쳐다보지도 못할 기록으로 인식되곤 했다.
장종훈은 87년 연봉 750만 원의 연습생으로 출발했다. 92년의 맹활약에 힘입어 93년에는 해태 김성한을 제치고 국내 최고 연봉인 9550만 원을 받았다. 장종훈은 95년 신인으로 삼성에 입단한 이승엽과 훗날 세대를 초월한 홈런 타자로 자주 비교됐다. 특히 장종훈의 유니폼 넘버가 35번, 이승엽의 등번호가 국내 시절 36번이었는데 이와 관련해 ‘장종훈 선배를 뛰어넘겠다는 의미로 이승엽이 입단 때 고른 번호’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하지만 이승엽은 국내 시절 36번은 장종훈과는 아무 연관이 없다고 훗날 설명했다.
오봉옥
제주도 출신인 오봉옥은 92년 삼성에서 데뷔 첫 시즌에 13연승 무패를 기록해 승률왕 타이틀을 따냈다. 그것도 선발 투수가 아닌 중간계투로 출전해 100% 승률을 일궈낸 것이다.
당시 오봉옥이 전반기에서 승리를 따낸 6경기의 투구이닝 합계가 겨우 13⅔이닝밖에 되지 않았다. 평균 2이닝 남짓만 던지고도 승리를 따냈으니 그 행운을 누구도 따라가지 못했다.
시즌 막판에는 승률왕의 조건인 ‘10승’과 ‘규정이닝’ 조건을 채우기 위해 9월 4일 쌍방울전과 9월 10일 OB전에 선발로 등판하기도 했다. 두 경기에서 각각 12 대 6 완투승, 5 대 0 완봉승을 따냄으로써 행운만으로는 타이틀을 거머쥘 수 없다는 걸 증명하기도 했다.
김남형 스포츠조선 야구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