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아닌 ‘밀퇴’가 날 힘들게 했어요
▲ 신진식은 은퇴경기도 치르지 못하고 팬들에게 감사 인사도 드리지 못한 채 선수생활을 마감하게 되어 서글프다고 하면서도 앞으로 지도자로 성장하는 과정도 지켜봐달라고 부탁했다. | ||
삼성화재의 ‘갈색 폭격기’로 지난 10년 동안 배구 코트를 휘저었던 신진식(32)이 은퇴를 선언했다. 그동안 선수 생활 연장과 다른 팀으로의 이적, 그리고 구단의 은퇴 후 지도자 연수 보장 등의 진로 문제로 오랫동안 고심했던 그는 지난 7일 삼성화재의 윤형모 단장을 만나 은퇴하는 걸로 최종 결정을 내렸다. 7일 이후부터 휴대폰을 꺼놨던 신진식과 8일 오후 어렵게 전화 인터뷰를 나눴다. 신진식의 목소리는 의외로 밝고 경쾌했다.
지난 97년 삼성화재 유니폼을 입고 10년째 삼성맨으로 뛰었던 신진식. 소속팀뿐 아니라 대표팀에서도 최고의 왼쪽 공격수로 한 시대를 풍미한 그였지만 세대교체의 당위성 앞에선 결국 무릎을 꿇고 말았다. 신치용 감독이 직접 불러 재계약 불가 통보를 하기 전까지만 해도 다음 시즌을 준비하기 위해 재활훈련에 몰두했다는 그는 그 후 한동안 아내와 낚시를 다니며 마음을 추스르고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고 한다.
―은퇴한다, 안 한다를 두고 많은 말들이 나돌았다. 지금 소감은.
▲전혀 실감이 안 난다. 여전히 아침에 눈을 뜨면 체육관에 가야할 것 같고 감독님의 잔소리와 함께 훈련을 시작해야 할 것만 같다. 미국으로 가서 공부를 하게 되면 조금 실감이 날 지도 모르겠다.
―신치용 감독은 다른 팀으로 이적하면 보내주겠다고 하고 구단에서는 이적을 허락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이런 상반된 입장에서 은퇴를 결정한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인가.
▲나이가 젊을 때 조금이라도 빨리 공부를 시작해야 할 것 같았다. 연수를 받았다고 해서 바로 현장으로 복귀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나이 마흔 살 정도에 코치로 뛰려면 지금부터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년 더 뛰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지금은 은퇴할 시기가 아니라고 믿었다. 정말 더 뛰고 싶었고 날 필요로 하는 팀이 있다면 어디든 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쉬면서 생각해보니까 이게 아니다 싶었다. 1년이란 숫자에 미련을 두는 게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더욱이 구단에서 제시하는 여러 가지 조건을 애써 외면하기가 어려웠다. 욕심보다는 현실과 미래를 선택한 것이다.
―10년 동안 삼성화재 유니폼만 입은 사람이 다른 유니폼을 입는 데 대해 부담이 컸을 것 같다.
▲왜 아니겠나. 그래서 (이적을) 망설인 부분도 있었다. 만약 내가 독하게 마음 먹고 삼성과 등 돌릴 생각을 했다면 (다른 팀으로) 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건 너무 부담스러웠다.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서 (구단과) 안 싸우고 다른 팀으로 갈 방법이 없나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없더라(웃음). 쉬는 게 쉬는 게 아니었다. 너무 머리를 많이 써서 운동할 때보다 더 힘들었다(웃음).
―이젠 말 할 수 있을 것 같다. 만약 이적할 상황이었다면 어느 팀으로 가고 싶었나.
▲LIG다. LIG는 내가 들어가서 보탬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른 팀도 생각해봤지만 내가 합류했을 때 기존의 틀을 깨지 않고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 있는 팀을 고려하다보니 LIG가 가장 나았다. 현대와 대한항공은 게임의 패턴이 짜여 있는 팀이라 자칫 내가 방해가 되거나 질서를 어지럽힐 수 있을 것 같더라.
―레프트가 절실히 필요한 현대캐피탈에서 신진식 선수를 탐낸다는 소문도 있었다.
▲김호철 감독님이 이탈리아에 휴가 중이신데 나 때문에 1주일 빨리 귀국하실 거란 얘기를 들었다. 나랑 직접 만나서 얘길 나누고 싶어한다고 귀띔을 받았다. 그런데 감독님이 일찍 귀국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 벌어졌다.
▲나랑 세진이 형과는 상황이 다르다. 세진이 형은 운동이 힘들다고 제 발로 걸어 나간 것이고 난 더 하고 싶어도 세대교체의 논리에 밀려난 것이다.
(신진식은 어느날 신치용 감독의 호출을 받고 감독 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신 감독의 재계약 불가 통보를 받았다. 신진식은 “진짜 1년은 더 해줄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세대교체 해야 한다고 안 된다고 하시더라구요”라며 섭섭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은퇴가 아닌 밀퇴란 느낌이 그를 더욱 힘들게 했는지도 모른다.)
―많은 팬들이 신진식의 은퇴에 대해 ‘남 주긴 아깝고 쓰자니 마땅치 않은’ 구단의 이기주의라고 비난한다. 어떻게 생각하나.
▲(곰곰히 생각하다가) 그 말이 맞긴 맞는 것 같다. 회사 차원에선 내 존재가 남 주기 아까운 떡이나 마찬가지 아니겠나. 난 진짜 삼성맨으로 남고 싶었다. 솔직히 10년을 삼성에서 뛰었는데 다른 팀 유니폼을 입고 싶겠나. 하지만 아프던 무릎도 멀쩡하고 몸에 아무 이상이 없다고 하는데도 물러나라고 하니 어쩔 수 없었다.
―흔히 스포츠계에선 노장 선수들을 향해 ‘박수칠 때 떠나라’라고 충고한다. 은퇴하는 선수의 입장에서 이 말에 항변한다면.
▲말은 참 멋지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선수가 은퇴하고 싶어도 구단의 이해 관계에 얽매여 은퇴를 못하는 사람도 있고 은퇴하고 싶지 않아도 구단의 이런저런 회유에 어쩔 수 없이 은퇴하는 선수도 있다. 정상에 있을 때, 화려한 생활을 영위할 때, 단물 쪽쪽 빨고 있을 때,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온다는 건 정상적인 사고론 너무 힘든 행동이다.
―배구생활 25년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을 받으니까 (은퇴가) 조금 실감이 난다(웃음).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지금 이 순간 아니겠나. 은퇴를 해야 하는 이 상황 말이다. 은퇴 경기도 제대로 못해보고, 팬들에게 ‘그동안 많은 사랑 보여줘서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란 인사도 못하고 소리 소문 없이 자취를 감춰야 하는 지금 이 순간이 서글프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다.
―삼성화재 생활 중 언제가 전성기였다고 생각하나.
▲다른 팀에선 욕하는 일이지만 우리가 77연승을 기록할 때다. 그때 제일 재미있게 배구를 했던 것 같다. 정말 그 시절이 그립고 종종 그 시간으로 되돌아가고 싶기도 하다. 물론 희망사항이지만 말이다.
▲아내와 낚시터에서 살다시피 했다. 아이들은 어머님에게 맡기고 아내와 서산, 장호원 등을 돌며 낚시터에서 맥주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눴다. 휴대폰도 꺼놓고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하면서 철저히 가족들하고만 지내려고 했다.
―한때 ‘아버지와 아들’로 소문났었던 신치용 감독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감독님과 내가 ‘아버지와 아들’이었나? (웃으며) 앞으로 감독님 잔소리 안 듣게 돼서 시원섭섭하다. 신 감독님과는 대표팀과 소속팀에서 정말 질긴 인연을 맺었다. 워낙 훈련을 혹독하게 시키시는 분이라 감독님 쫓아다니다 힘들어 죽는 줄 알았다. 무릎 고장이 난 약간의(?) 이유에 감독님도 한몫하셨다(웃음). 지금은 이해를 못하는 부분도 내가 지도자가 돼 감독님 정도의 위치에 오르면 감독님의 심경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갈색 폭격기’를 사랑했던 많은 팬들에게 지면으로 대신 인사를 해야겠다.
▲정말 죄송하고 미안하다. 더 이상 배구 코트에서 날 볼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배구장을 완전히 떠나는 게 아니니까 신진식이 지도자로 성장하는 과정도 응원하는 마음으로 지켜봐 주길 바란다.
―신진식의 배구 인생을 한 마디로 정리한다면.
▲정말 화려하게 보냈다. 그리고 항상 시끄러웠다. 고등학교에서 대학교로, 또 대학에서 실업팀으로 갈 때, 그리고 은퇴하는 것까지 조용한 적이 없었다. 그만큼 날 필요로 하고 좋아해줬던 분이 많았다는 뜻 아니겠나. 배구 선수 신진식으로 살 만했던 것 같다.
마지막으로 신진식에게 ‘당신의 배구 인생을 ‘성공’이란 키워드로 정의내릴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신진식은 ‘그렇다. 난 배구로 성공했고 그 부분엔 후회가 없다’라고 대답했다. 비록 마무리가 아쉽긴 하지만 25년의 배구 인생을 ‘성공’으로 마무리한 신진식이 부러웠다. 운동을 업으로 하는 많은 선수들이 그의 이런 마침표를 진심으로 부러워할 것 같았다.
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