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지 55% 육지로 변신했지만…투자 부진, 조성률 35% 불과 ‘넘어야 할 파도 많다’
하늘에서 바라본 새만금 배수갑문.
[일요신문] ‘벽해상전(碧海桑田)’이 따로 없다.’ 10년 전 새만금과 지금의 모습을 두고 한 말이다. 지난 4월 21일로 세계 최장 대역사로 손꼽혔던 새만금 방조제 물막이 공사가 완료된 지 꼭 10년이 됐다. 방조제 준공은 새만금 사업의 외곽이 마무리되면서 내부 개발공간이 확보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후 새만금 사업은 내부개발 사업이 본격 추진됐다. 하지만 끝물막이 10년이 지난 지금도 장밋빛 청사진에 머물고 있다. ‘땅을 얻고 생명을 잃었다’는 비판도 컸다. ‘바다 위 만리장성’으로 불리는 새만금 방조제사업의 역사와 현주소를 조명해 본다.
새만금방조제는 변산반도와 군장산업단지 사이 33㎞의 바다를 흙으로 메우는 ‘단군 이래 최대 역사’다. 1991년 공사를 시작해 2006년 4월 물막이 공사를 끝냈다. 착공한 지 19년 만이다. 총 공사비는 3조 원. 바다를 막기 위해 쏟아 부은 흙만 15t짜리 덤프트럭 1000만 대 분량인 1억㎥에 달한다.
물막이가 마무리된 2006년 당시 방조제 안 409㎢의 대부분은 물에 잠겨 있었다. 여의도의 140배에 달하는 면적이다. 10년이 지난 지금은 바다에 잠겨있던 새만금 개발지 내부 전체 용지 409㎢ 가운데 매립지 291㎢의 55%인 159.6㎢가 육지로 노출됐다. 예전까지만 해도 짙푸른 물결(碧海)이 넘실대던 바다가 육지(桑田)로 변한 것이다. 나머지 118㎢는 담수호다.
2006년 4월 21일 새만금방조제 끝물막이 공사 현장 모습. 사진제공=새만금추진지원단
단군 이래 최대의 역사인 ‘바다의 댐’이 가져다준 혜택은 적지 않다. 지금은 정치인으로 변신한 당시 한명규 전북도 부지사는 “새만금에는 3무(無)가 있다”고 말했다. ‘3무’는 땅 주인과 규제 그리고 민원이 없다는 뜻으로 개발 효과에 대한 기대 표시다. 전북도의 한 새만금정책 담당자는 “새만금은 말 그대로 흰색 도화지”라면서 “완벽한 계획도시를 건설할 수 있다”고 말했다.
사실 33㎞에 이르는 세계 최장의 방파제와 1억 3000만 평의 간척지. 이 면적은 서울의 3 분의 2, 제주도의 4 분의 1이나 된다. 이처럼 거대한 ‘백지의 땅’은 그야말로 ‘동북아의 진주’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높이고 있다.
새만금이 간척지 사업 후보지로 검토된 것은 1971년부터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식량난 해결이 국가적으로 가장 큰 숙제였다. 그러나 새만금 지구는 경제성이 낮다는 이유로 보류됐다.
사장될 위기에 처했던 새만금 사업은 제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재부상했다. 전북지사를 역임한 황인성 농림수산부 장관은 1987년 새만금 사업을 차기 정부의 대통령 선거공약사업으로 건의했고, 당시 민정당 노태우 후보 선거대책본부가 이를 전북지역 선거공약으로 채택했다. 노 후보는 그해 12월 군산에서 열린 선거유세에서 새만금 사업을 대통령 공약사업으로 발표했다.
노태우 후보가 당선되면서 새만금 사업은 ‘대통령 공약 코드 넘버 20-07-29’로 관리됐다. 하지만 노태우 대통령은 새만금 추진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던 차에 방조제 공사 착공에 ‘사건’이 생겼다. 1991년 걸프전 파병을 추진하던 정부가 야당의 반대로 곤혹스러워하고 있을 때다. 노 대통령과 당시 김대중 신민당 총재 간에 ‘거래’가 있었다.
같은 해 7월의 일이었다. 김 총재는 파병에 동의하는 대신 전북지역 숙원사업인 새만금 간척사업 착공을 촉구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여 그해 추경에 새만금 예산 200억 원을 포함시켰다. 두 사람이 걸프전 파병과 새만금 사업을 맞바꾼 셈이다.
이후 새만금 방조제는 넉 달 후인 지난 1991년 11월 첫 삽을 뜬 후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6년 4월 21일 물막이 공사가 완료됐다. 이후 보강 성토작업 등을 거쳐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10년 4월, 19년이 걸린 대역사를 끝내고 일반에게 공개됐다.
새만금 방조제는 시설과 규모 등에서 몇 가지 기록을 갖고 있다. 33.9km에 달하는 새만금 방조제는 종전까지 세계 최장 방조제였던 네덜란드의 주다치 방조제(32.5km)보다 1.4km 더 길어 2010년 8월 기네스북에 등재되기도 했다.
방조제 높이와 단면은 1000년 빈도의 파도에도 견딜 수 있도록 설계됐다. 조수간만의 차가 심하고 조류가 거센 서해안의 특성을 고려해 방조제 밑 부분의 넓이는 평균 290m, 최대 535m로 만들어졌다. 높이는 평균 36m(최대 54m)로, 외부에서 보이는 부분은 11m에 불과하다.
새만금 방조제 전경
방조제에는 총 1억 2000만㎥의 돌과 바닷모래가 투입됐다. 이는 경부고속도로(418km) 4차선을 13m 높이로 쌓을 수 있는 양이다. 인원은 매일 6700명씩 연인원 247만 명이 참여했으며 덤프트럭과 예인선, 포클레인 등의 장비는 하루에 2500여 대씩 91만여 대가 투입됐다.
또 빠른 유속에 견딜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간척사상 처음으로 3톤 규모의 돌망태 2개를 엮어 바다에 투입하는 ‘사석 돌망태’공법이 시도됐다. 돌망태공법은 세계 최고의 방조제 축조 기술을 보유한 네덜란드에서 벤치마킹할 정도였다.
이와 함께 새만금의 담수화에 대비해 수위조절을 위해 설치된 배수갑문(가력·신시) 규모 또한 엄청나다. 총 20개가 설치된 배수갑문은 문짝 한 개 당 폭 30m, 높이 15m, 무게 484톤이다. 배수갑문 하나의 무게는 쌀(80kg기준) 6050가마에 해당된다. 방조제 상단부는 총 4차선으로 되어 있고, 지진과 강풍·해일 등에 대비해 내측 하단부에 비상도로 2차선이 설치됐다.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방조제 공사가 마무리된 새만금은 내부개발사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농생명용지 1단계 사업 94.3㎢는 5개 공구가 추진 중이고 2개 공구는 설계 중이다. 신시도와 가력도 부근 용지는 방문객 편의를 위한 휴게시설로 탈바꿈했다. 산업단지 18.5㎢ 1공구는 완공됐고 2공구는 추진 중이다.
또한 새만금이 글로벌 중심도시로 비상하기 위한 뼈대라 할 수 있는 SOC사업도 새만금 곳곳에서 공사가 한창이다. 새만금 신항만과 새만금~전주 간 고속도로를 연결하는 동서 2축 도로는 지난해 11월 착공돼 매일 20m씩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이 도로는 새만금 내부 핵심 간선도로망이다. 남북 2축 도로 27.8㎞는 1단계가 완공됐다. 새만금 신항은 방파제 공사가 완공 단계다.
국내외 투자도 속속 이뤄지고 있다. 산업단지엔 1조 원을 투자한 OCISE의 열병합발전소가 이달 완공된다. 또 3000억 원을 들인 일본 도레이사의 PPS수지, PPS수지용원료 공장과 1210억 원을 투입한 벨기에 솔베이사의 고분산실리카 공장이 각각 7월과 12월에 모두 지어진다.
그러나 새만금지구가 제대로 개발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우선 기대와는 달리 공정이 더딘 것도 사실이다. 기본계획에는 내년까지 전체 면적의 45% 조성을 목표로 하고 있지만 실제 용지 조성 공사는 농업용지와 산업용지를 중심으로 35% 수준이다. 새만금은 전체 용지의 53.6%가 민간자본으로 개발돼야 하지만 대규모 해상매립공사는 위험부담이 커 투자를 꺼리고 있다. 선도사업을 담당해야 할 공공기관에 의한 개발도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정부가 발표한 한·중 경협단지와 산업협력단지 조성, 규제프리존화 역시 구체적인 계획이 수립되거나 추진되지 않는 상태다. 특히 당초 투자를 약속했던 삼성이 투자 의지를 보이지 않고 있고, ‘새만금 국제공항’이 아직 확정되지 않은 것에 전북도민들이 아쉬워하고 있다. 담수호 수질 개선을 위한 해수유통 논란도 풀어야 할 난제다.
군산쪽 산업용지와 달리 김제쪽 농생명용지와 부안쪽 관광용지 개발사업은 마땅한 민간투자자를 못구해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공공자금을 들여 만든 땅에 유리온실을 짓고 씨앗을 뿌리거나, 호텔을 짓고 골프장을 조성할 민간 투자자가 여지껏 없다는 얘기다.
최재용 전북도 새만금추진지원단장은 “앞으로 정부·새만금개발청 등과 적극적으로 협력해 현안을 해결해 나가겠다”며 “세계에 우뚝 설 수 있는 경제특구를 조성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정성환 기자 ilyo66@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