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너… 그거 갈 게 못 됩미더
▲ 사진=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롯데에 섭섭?
지난 1월, 해외파 2년 유예조항이 한시적으로 풀린 이후 롯데는 부산을 연고로 하고 있는 마이너리거 송승준과 이승학을 놓고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송승준을 선택했다.
“에이, 섭섭한 건 없슴미더. 롯데로 가길 바랐던 적은 있었지만 초등학교·중학교 1년 후배인 송승준이 가서 잘하고 있으니까 좋슴미더. 지금은 오히려 잘된 거 같은데예. 부산에 있었으몬 게임 안 풀릴 때마다 친구들 불러내가 술도 한잔 하고 그랬을 긴데, 서울에서는 딱히 불러낼 술친구도 엄꼬, 연습 마이 하고 좋슴미더.”
다 지나간 일인데예
단국대 4학년이었던 2001년. 이승학은 계약금 115만 달러를 받고 필라델피아 루키리그로 갔다. ‘말 안 돼, 음식 안 맞아, 동료들 낯설어’ 이승학의 미국생활은 투쟁이었다. 메이저리그, 마이너리그 합쳐서 한 팀에 거의 100명이 넘는 투수들 틈에서 살아남기란 외롭고도 긴 싸움이었다.
“가자마자 허리부상에 수술하고, 나는 계속 아픈데 병원에서 수술 잘댔다고 했다면서 무조건 던지라고 하니까 투수코치들하고도 싸웠지예. 성질 죽였어야 되는데, 꾀병이라고 하니까 열받아가…. 다 지나간 일인데예, 뭐.”
하지만 다음해 페이스를 끌어올린 이승학은 더블A 올스타를 거쳐 3년 만에 트리플A로 올라갔다. 하지만 메이저리그로 가는 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메이저리그다 치고, 10을 기준으로 만약에 내가 8이고, 미국투수가 6이다 그러면 6짜리 미국선수를 씀미더. 내가 8이고 도미니카 출신 선수가 7이고, 미국선수가 6이다 그러면 미국 도미니카 다음이 접미더. 없다 해도 인종차별 다 조금씩 있을 걸요. 2002 리그에서 다승 3위 탈삼진 5위까지 했는데도 선발 안 시켜주고 계투해라고 해서 와그라노 했더만, 우리팀에는 유망주 선발은 많은데 중간이 약하다면서 선발보다 계투쪽이 더 빨리 메이저리그에 가는 길이다, 그라는데 열받더라고요. 그래서 6년 채우고 FA되면 딴 팀에 가면 갔지, 필라델피아하고는 재계약 안할 생각이었슴더.”
형 얘기 좀 들어봐라
문득 궁금해진 한 가지. 그렇다면 최근 고등학교 졸업하고 미국으로 가는 신일고 이대은과 인천고 국해성(시카고 컵스), 군상상고 최현욱·최형록(미네소타) 같은 선수들의 미국진출에 대해 이승학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솔직히 말리고 싶어요. 저는 모르고 갔지만 지금 아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아마 다시 생각했을 걸요. 마이너리그 생활이 안 쉽거든예. 말 안 되죠, 먹는 거 안 맞죠, 우리나라 이동시간은 이동시간도 아임미더. 저는 16시간까지 버스 타고 이동해봤는데 의자 뒤로 당겨봤자 5㎝도 안 넘어가는 버스 타고 바닥에서 잘 때도 많슴미더. 돈도 그래요. 10만 달러면 1억인데, 세금 30% 떼고 에이전트 10% 주고, 반 정도밖에 안 남을 걸요. 과연 그걸 알고 가느냐…. 모르고 갈 걸요. 갔다 온 선배들도 있는데 좀 물어보지. 일본선수들이 왜 성공하느냐. 일본은 리그에서 FA하고 가거든예. 그만큼 경험을 하고 가기 때문에 시작도 트리플부터 인정받고 대우받으면서 운동하잖아요. 우리처럼 루키부터 시작하면 힘들지예. 국내에서 경험 쌓고 도전하는 것도 개안을낀데. 지금가면 한 달에 120만~130만 원 받으면서 살아야 될 낀데.”
▲ 연합뉴스 | ||
돈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사실 이승학의 야구인생도 돈 때문에 힘들었다. 배를 탔던 아버지는 평소 건강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부산공고 졸업 당시, 롯데로부터 우선지명을 받았던 이승학. 아버지는 어머니를 통해 ‘더 이상 배를 못 타겠다’며 아들이 프로로 가주길 바라셨다. 하지만 어머니는 이승학이 대학에 가기를 소원하셨다. 이승학도 대학 진학을 원하자, 아버지가 이렇게 말씀하셨단다.
“그래, 아버지가 4년만 더 고생할게.”
그랬던 아버지가 지난 5월 4일, 세상을 떠났다. 3형제 가운데 막내인 이승학은 초등학교 때부터 야구를 했다. 아버지는 배를 타고 어머니는 옷수선을 하며 막내아들 야구 뒷바라지를 했던 것이다.
“솔직히 저 하나 때문에 마이 쪼달렸지예. 학교 다니면서 고기반찬 거의 안하셨는데, 엄마가 야구부 식사 당번하시는 날이나 돼야 고기반찬이 올라왔거든예.”
엄마는 여대생
2001년, 미국 진출 첫 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의 일이다.
엄마:아들이 명색이 미국에서 야구하는데, 엄마가 옷수선하면 니 얼굴에 먹칠하는 거 아이가?
승학: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마시소. 엄마가 옷수선 안 하고 아버지가 배 안 탔으면 내가 지금까지 야구를 우째 하겠슴미꺼. 내 생각하지 말고, 엄마하고 싶은 거 하이소, 마.
그래서 어머니는 가게를 그만두시고 공부를 시작하셨다. 중·고등학교 과정을 거쳐 부산여대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했고 올해 나이 57세에 졸업반이란다. 어머니가 공부하는 동안, 배에서 내린 아버지는 집안 살림을 도맡으셨다. 밥하고 청소하며 어머니의 뒤늦은 공부를 도와주신 것이다. 그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시던 날, 어머니는 참 많이 우셨다고 한다.
8월 3일, 선발 첫 승을 하던 그날, 이승학도 아버지 생각에 눈물이 났다고 한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사실 이제는 제가 가장 역할을 해야 하는데 솔직히 좀 힘들어요, 아버지께서 아무도 모르게 빚을 좀 지셨더라고요. 그거 갚아야죠, 월급 받으면 생활비 보내드려야죠, 당분간 결혼은 좀 힘들겠죠?”
우리 나이로 스물아홉인 이승학은 리오스처럼 다른 팀 코칭스태프와 선수들이 까다로워하는 투수. 내년 즈음에는 두산 선발의 핵이 되고 싶다며 수줍게 씽긋 웃는다. 여름내 뜨거운 햇빛 아래서 달궈진, 6년 내내 마이너리그에서 땀과 눈물로 달궈진 두산의 토종선발 이승학의 어깨가 기분 좋게 무거워지고 있다.
김은영 MBC라디오 아이러브스포츠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