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안 빅리거 멸종이라뇨? 누가요 우리가요?
▲ 파베이 산하 트리플A ‘더럼 불스’ 유니폼을 입은 서재응. 그의 메이저리그 꿈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홍순국 메이저리그 사진 전문가 | ||
노포크에서 만난 서재응
탬파베이 데블레이스 산하 트리플A팀 더럼 불스 소속인 서재응. 그를 만난 곳은 뉴욕 JFK공항에서 2시간 정도 더 비행기를 타고 내린 노포크라는 도시였다. 이전 서재응이 뉴욕 메츠 소속일 때 마이너 시절 몸담았던 곳이기도 하다. 8월 27일(현지시간) 노포크 타이즈와의 원정 경기에 참가 중이었던 서재응은 비행 일정으로 뒤늦게 경기장에 도착한 기자를 보더니 공수교대 시간에 더그아웃에서 걸어 나와 반갑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넸다. 서재응이 더럼 불스 유니폼을 입고 손을 흔드는 모습에 까닭 모를 ‘울렁증’이 생긴 건 왜일까.
한국에서 뉴욕을 거쳐 노포크 타이즈의 홈구장인 하버파크까지, 그리고 경기 끝나고 서재응과 얼굴 맞대고 앉기까지 걸린 시간이 30시간이었다. 같은 팀에서 뛰고 있는 ‘쿨가이’ 류제국(24)도 함께한 자리에서 서재응은 미국 야구에 도전장을 내민 10년간의 시간들을 담담하게 회상해 나갔다. 더럼 불스 선수들이 묵고 있는 숙소 인근의 바에서 늦은 저녁을 먹으며 새벽까지 인터뷰를 겸한 수다를 떨었는데 류제국이 분위기 메이커 노릇을 톡톡히 하며 시차와 오랜 여정으로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 기자의 혼미한 정신세계를 이끌어 주었다^^.
일찍 끝나는 시즌 낯설어
“9월에 시즌이 끝나는 건 4년 만에 처음이에요. 마이너는 9월 3일에 시즌이 종료되거든요. 메이저에 올라갈 선수는 9월 1일쯤 구단의 호출을 받는데 만약 그때 얘기가 없다면 그냥 시즌을 마치는 거죠. 기분요? 이상하죠. 여름에 시즌이 끝나니까.”
서재응이 9월 시즌 종료에 대해 아쉬움을 털어내자 옆에서 얘기를 듣고 있던 류제국은 “형, 난 항상 시즌이 빨리 끝나서 잘 모르겠는데요?” 하면서 웃음을 터트린다.
서재응은 올 시즌 시범경기 때만 해도 환상적인 몸 상태와 피칭을 선보이며 기대감을 부풀렸다. 예상대로 2선발로 시즌을 시작하며 양키스, 텍사스전을 치렀지만 이상저온 현상으로 시범경기 때 보여줬던 피칭을 하지 못했고 결국 마이너행을 통보받게 된다.
“오히려 마이너로 내려온 게 마음이 편했어요. 몸에 이상이 없는데도 생각한 대로 피칭이 나오지 않으니까 나중엔 거의 돌 지경이었거든요. 그럴 바엔 차라리 마이너에서 공을 다듬는 게 더 나은 거죠. 그런데 이런 일을 자주 겪다 보면 마이너행에 대해 크게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않아요. 부정적인 생각보다는 ‘이참에 마이너에서 체중조절하며 구위를 점검하자’는 식으로 담담히 받아들이죠. 그게 정신건강에 아주 좋아요.”
서재응이 인터뷰를 하는 동안 더럼 불스 소속 선수들이 하나둘씩 우리가 있는 바에 들어섰다.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류제국은 선수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눴고 서재응은 약간 무게 있는 표정으로 선수들을 대했다. 그때 류제국이 이렇게 말한다.
“재응이 형처럼 영어 안 쓰고 미국에서 야구하는 사람은 처음 봤어요. 선수들이 농담을 하거나 장난을 쳐도 잘 대응을 안 해요. 그냥 쳐다볼 뿐이죠. 영어를 못 하는 것도 아닌데 선수들이랑 말을 잘 안 해요.”
서재응에게 그 이유를 물었더니 “영어로 선수들이랑 말 섞는 게 싫어서 그렇다”라고 설명한다.
“애들이랑 장난치고 농담하는 걸 안 하려고 해요. 별다른 이유는 없어요. 영어가 짧아서 그러냐고요? 잘하는 것도 못하는 편도 아니지만 그냥 어울리는 게 싫을 뿐이에요. 제가 의외로 낯을 가리는 성격이거든요. 친한 사람에게는 정말 잘 하는데 그 외의 사람들에겐 살갑게 대하지 않아요.”
바에 모인 선수들은 서재응보다 류제국과 두터운 친분을 나누는 듯했다. 시끄러운 상황에서도 인터뷰를 계속하자 한 선수가 기자에게 ‘서재응이 한국에서도 유명한 선수냐’고 농담을 던지며 서재응에게 관심을 드러낸다.
1997년 21세의 나이에 뉴욕 땅을 밟은 서재응이 미국에 발을 내딛은 지 10년의 시간이 흘렀다. 말 그대로 ‘어느새 10년’이었다. 서재응의 미국 야구 10년사를 더듬다 1999년 오른쪽 팔꿈치 인대접합수술을 했던 시기를 떠올렸다.
“가장 아쉬웠던 순간이었고 가장 뼈아픈 선택이었어요. 만약 그때 수술을 안 하고 재활을 선택했더라면 지금의 서재응과는 아주 다른 모습으로 성장했을 겁니다. 팔 상태가 최악의 상황이라 선택의 여지가 없었지만 그래도 너무 아쉬워요. 수술만 안 했다면 계속해서 강속구 피처로 남았을 테니까요. 투수에겐 말이죠, 욕심이 있어오. 빠른 공을 던지고 싶은 욕심이요. 컨트롤 아티스트도 좋지만 느린 볼보다는 빠른 볼을 갖고 싶어 해요. 전 해마다 이런 꿈을 꿔요. 내 볼 스피드를 2~3마일만 더 올렸으면 좋겠다는…. 그럼 정말 원이 없을 것 같아요.”
서재응은 한때 미국 야구 도전기에서 사이영상을 목표로 삼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거창한 목표를 마음속에서 지운 지 오래다. 메이저리그와 마이너리그라는 온탕과 냉탕을 넘나들면서 자연스럽게 생긴 숙제가 ‘메이저리그에서 오래 버티기’.
“처음 미국에 왔을 때는 꿈이 참으로 엄청났어요. 해마다 10승 이상씩 거두고 싶었고 돈도 많이 벌고 싶었죠. 아예 마이너라는 글자는 떠올리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그 꿈이 현실에 부딪히면서 제 마음 속에서 그릇 깨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죠. 2003년 처음으로 메이저에 올라와 보니까 10승이고 돈이고 아무 정신이 없는 거예요. 언제 어느 순간에 마이너로 강등될지 모르는 상황이라 어떻게 하면 빅 리그에서 오래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꽉 차 있었어요. ‘오르기보단 머물기 힘든 곳이 메이저리그’란 말이 정말 딱 들어맞는 것 같아요.”
서른 살, 나이를 느끼다
이전과 달리 올 시즌 들어 서재응은 몸에 잔고장이 많았다고 한다. 투수 생활을 시작하면서 어깨가 아픈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올해는 뻐근하고 뭉치는 느낌이 시즌 초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생전 처음 햄스트링 부상도 맛보고 허리가 아프다는 느낌도 든다고 한다.
“나이 먹는 걸 팍팍 실감하는 중이에요(웃음). 아무리 몸 관리를 잘해도 동양인은 어쩔 수 없나 봐요. 이전에는 고참 선수들이 어깨가 아프네, 허리가 아프네 하면 ‘돈 많이 벌었나보다’ 했거든요. 그런데 제가 그 입장이 돼 보니까 그렇지가 않은 거예요. 지금 (류)제국이 나이 때 잘 다져놔야 해요. 몸은 진실해요. 자기가 노력한 만큼 증상이 나타나거든요.”
▲ 인터뷰 당시 서재응은 노포크 원정 중이었다. 숙소 인근의 바에서 서재응(오른쪽 두 번째) 류제국(맨 왼쪽)과 팀동료들이 다같이 ‘찰칵’. 소피 J. 신 프리랜서 | ||
미국 도전 두려워 말라
최근 미국에서 한국으로 ‘유턴’한 선수들이 늘어나면서 그들의 인터뷰 때마다 자신들의 도전이 얼마나 무모하고 힘들었는지에 대해 많은 사연들이 소개됐었다. 서재응은 후배들의 국내 복귀에 대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이해하면서도 다른 후배들이 미국 야구에 대해 겁을 내는 부분은 잘못된 생각이라고 지적했다.
“루키들이 미국으로 건너오는 건 (대부분) 한국 프로야구에서 지명 받지 못해 오는 거잖아요. 그런 애들이 여기 못 오면 어딜 갈 수 있겠어요. 비록 싼 값이라도 야구를 할 수 있다면 어디든 가야 하는 거잖아요. 더욱이 여긴 미국이고 자기 실력 여하에 따라 기회를 얻을 수 있는 곳인데요. 남미 애들은 1000달러, 2000달러 받고도 와요. 그러니까 선수도 많고 성장 규모도 다르죠. 많이 와야 해요. 도전도 안 해보고 지레 겁먹고 포기하는 건 잘못이라고 봐요. 여기 있다가 한국으로 돌아간 선수들이 미국 야구 운운하면서 인터뷰하는 걸 보면 좀 불편해져요. (결국) 포기해서 돌아간 거잖아요. 그렇다면 다른 말 안 했으면 좋겠어요.”
서재응은 설령 자신이 마이너에서 야구 인생을 마친다고 해도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미국에서 야구를 해봤고 메이저리그에서 날고 기는 타자들도 상대해봤고 ‘용병’ 신분이면서도 자국 선수들 못지않은 절대 자신감으로 10년의 ‘온·냉탕’ 생활을 견뎌온 것이다.
“어느 기사를 보니까 ‘메이저리그에 한국 선수 멸종’이란 제목이 눈에 띄더라고요. 정말 맘 상했습니다. 멸종은 영원히 사라진 걸 뜻하는 게 아닌가요? 지금 병현이는 뭐고 또 제국이나 내가 메이저리그에 올라가면 어떻게 되는 거죠? ‘메이저리그에 한국 선수 생존’이란 기사가 나올 수 있도록 직접 보여드릴게요. 그럼 그 기사 꼭 써주셔야 해요!”
노포크=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