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로 한국 알리기 그 꿈은 변함 없어요”
▲ 사진=홍순국 메이저리그 사진 전문가 | ||
그 인터뷰 이후 기자와 개인적인 인연을 맺었던 백차승과는 줄곧 연락을 주고받았지만 아쉽게도 직접 얼굴을 마주한 적이 없었다. 그러다 이번 미국 출장 중이었던 지난 9월 3일(한국시간) 플로리다에서 8시간의 여정 끝에 시애틀에 도착, 그 날 저녁 시애틀 타코마의 한 식당에서 백차승과 만났다.
상상했던 것보다 굉장히 체격이 좋았고 사진보다 훨씬 잘생긴 외모에 부산 사투리를 섞은 차분한 목소리가 친근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올시즌 메이저리그 40인 로스터에 들었지만 부상으로 트리플A에 내려온 백차승은 마이너리그 시즌 이후 애리조나 피오리아 캠프에서 재활을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하지만 9월 18일 현재 백차승은 부상자 명단에서 복귀해 시애틀 메이저리그 로스터에 이름을 올렸다).
미국 진출한 지 9년째. 그동안 누구보다 파란만장, 우여곡절의 야구 인생을 만들어온 백차승과의 인터뷰에서 이 단어만큼은 절대 꺼내지 않을 예정이었다. ‘국적’ 문제 말이다.
―이번 출장 중에 꼭 만나야만 하는 선수였어요. 내일 시즌 마지막 등판인데 이렇게 나와 줘서 고마워요(백차승은 9월 4일 콜로라도 스프링스전에 선발 등판이 예정돼 있었다).
▲당연히 나와야죠. 절 보러 여기까지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메이저리그에 있을 때 오셨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좀 아쉽네요.
―그래도 반가운 걸요. 식사 중이니까 가볍고 식상한(?) 질문부터 할 게요. 야구를 시작하게 된 동기가 뭐예요.
▲세 살, 네 살때쯤이었을 거예요. 아버지가 처음으로 야구장이란 곳을 데려가셨어요. 나이트 게임이었는데 휘황찬란한 불빛 아래서 깔끔한 유니폼을 입고 야구하는 선수들을 보니까 ‘뿅’ 가겠더라구요. 너무 신기했고 너무 즐거웠어요. 그 후로 아버지 손 잡고 야구장 다니면서 볼과 스트라이크의 차이를 배우게 됐죠. 처음 가 본 야구장이 구덕구장이었거든요. 얼마 후 사직구장이 세워지면서 거길 들락거렸는데 파란 인조 잔디 위에서 외야를 뛰어 다니며 마냥 좋아했던 시절이 그리워요.
―어렸을 때부터 야구를 잘 했나요.
▲또래 애들보다 제가 큰 편이었거든요. 팀의 주축 선수로 활약했었죠. 부산중앙초등학교 시절에는 우릴 꺾을 팀이 없었어요. 전국대회를 휩쓸다시피 했어요. 그때 저랑 다른 학교에 다녔던 송승준(롯데)이 부산에서 최고의 에이스로 꼽혔어요. 초등학교서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줄곧 상대팀으로 맞붙었으니까요. 승준이는 정말 잘 던지는 선수였는데 미국에 왔다가 별다른 성과 없이 한국으로 돌아갔어요. 운이 없었던 선수예요. 한 번이라도 제대로 기회가 주어졌다면 달라졌을 텐데 부상으로 인생이 꼬이면서 잔혹한 미국 생활을 보내게 됐죠.
―98년 말 시애틀 매리너스와 계약하고 99년 미국으로 건너왔는데 당시 기분이 남달랐겠어요. 꿈인가 생시인가 싶었을 것 같기도 하고. 드디어 미국 야구에 도전할 기회를 얻었으니까요.
▲한 마디로 붕 떠 있었죠. 비자 문제로 심하게 마음 고생을 하다 한창 시즌 중이었던 99년 6월에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어요. 반드시 성공해서 돌아가겠다는 마음뿐이었습니다. 잘 할 수 있을 거란 기대감에 부풀었구요. 그런데 막상 와서 부딪혀 보니까 그게 아니더라구요. 쉽게 올라갈 수 있을 거라 기대했는데 결코 쉬운 과정이 아니었습니다.
―어느 부분이 가장 힘들었던 거예요.
▲흔히 마이너리그하면 비슷비슷하다고 생각하실 거예요. 그런데 싱글A도 로우(low)와 하이(high)로 나뉘어요. 루키부터 시작해서 메이저리그에 오르기까지 무려 6단계를 거쳐야 하죠. 그 현실을 깨달았을 때 절망스러웠어요.
―2001년 팔꿈치 수술을 받았잖아요.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재활하는 동안 맘 고생이 만만치 않았겠어요.
▲그만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어요. 희망이 안 보였다고나 할까. 1년 반 이상 재활을 하며 체력적인 부분보다 제 자신과의 싸움이 힘들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조금씩 오기 같은 게 생기더라구요. 영구제명된 상태에서 한국으로 돌아갔다간 야구를 더 이상 못하게 되는 거잖아요. 신기한 건 마인드가 달라지니까 야구하는 자세도 변하게 되더라구요. 낯가림이 심한 성격을 버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갔어요. 수술 이후 성격도 활발해지고 자신감도 생겨났죠. 선수들이랑 비로소 ‘어울림’이란 단어가 어색하지 않을 만큼 친근하게 지낸 것 같아요.
―2003년, 2004년에는 보기 드문 성적을 냈어요. 2004년에는 40인 로스터에도 들었구요.
▲수술 후유증이었나?(웃음) 성적은 좋았는데 자만심이란 병이 생겼어요. 2004년 마지막 게임을 잘 던졌지만 2005년 초반 마이너리그로 내려갔거든요. 곧 (메이저에서)불러주겠지, 잘 던지고 있으면 오라고 하겠지 하는 기대감만 잔뜩 부풀리는 바람에 집중을 할 수 없었어요. 전반기에 7승3패를 하며 나름 괜찮았었는데 후반기 들어선 와장창 무너지고 말았죠. 야구가 안 되니까 팔이 다시 아프기 시작했고. 있잖아요, 제 팔은 야구가 잘 되면 안 아픈데 야구가 안 되면 아픈 데가 더 많아져요(웃음).
(백차승은 2005년 마이너리그에서 불안한 나날을 보내다 시즌을 마쳤다. 2005년은 그에게 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 해였다. 야구에선 ‘널뛰기 인생’이었지만 야구 외적으론 미국시민권자가 되며 안정적인 환경을 구축했다. 그러나 시민권 획득 이후 그는 나태해졌다고 고백했다. 야구 외적인 문제가 안정되면서 이젠 한국에 갈 수 있다는 생각에 야구가 뒷전으로 밀려났다는 얘기였다. 백차승의 국적과 병역 문제에 관해선 여전히 네티즌들의 ‘폭발적인’ 관심을 이끌고 있다. 백차승은 이에 대해 자신이 ‘감당해야 할 몫’이라고 말했다.)
―2005년 시즌을 마치고 7년 만에 귀국을 했었죠? 귀국길이 순탄치만은 않았다면서요.
▲ 늘 전화로 기자와 소식을 주고받던 백차승을 지난 9월 3일 시애틀에서 드디어 만났다. 외국에서 만난 부산 사투리의 그는 역시 ‘한국인’이었다. | ||
―어떤 상황이었을지 그림이 그려지네요. 그런데 그때는 이미 시애틀 구단으로부터 방출 통보를 받은 후였잖아요.
▲김해공항에 도착해서 에이전트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안 좋은 소식이 있다며 팀에서 잘렸다고 말해주더라구요. 한국에 돌아온 감격도 잠깐이었죠. 오랜만에 만나는 가족들에게 좋은 선물을 해줘야 하는데 이건 방출 통보를 선물 대신 전달해야 하니. 가족들에게 알리지 않고 귀국한 거라 공항엔 저 혼자뿐이었어요.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가는데 막 눈물이 쏟아지더라구요. 당시 미국에 있으면서 꿈꿨던 그림은 금의환향이었거든요.
―7년 만의 가족 상봉. 부모님들이 더 기뻐하셨겠어요.
▲7년 만에 뵌 부모님의 얼굴에 늘어난 건 주름살밖에 없더라구요. 이미 제 방출 소식을 알고 계셔서 오히려 절 위로해주셨어요.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굉장히 컸었거든요. 한달 반 동안 고향에서 지내며 많은 용기도 얻고 힘도 얻고 또 의욕도 새롭게 다질 수 있었죠. 그때 한국에서 보낸 시간들이 2006년의 백차승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절 방출시킨 팀과 결국 다시 계약을 맺으며 새로운 기회를 부여받았어요.
(백차승은 2006년 시즌을 마치고 귀국해서 3개월가량 한국에 머물다 미국으로 돌아갔다. 당시 야구 기자들 사이에선 백차승이 입국할 때 비행기가 아닌 일본에서 배를 타고 들어왔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국적 문제로 입국을 거부당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곁들여졌다. 그러나 백차승은 이미 2005년 정상적인 절차를 밟아 입국한 상태였고 지난해에도 배가 아닌 비행기로 한국을 찾았다. 인천공항을 통하지 않는 이유는 집이 부산이라 일본에서 짐을 찾지 않고 곧장 김해공항까지 들어갈 수 있다는 편리함 때문이었다.)
―만나기 전에 국적 문제는 절대 묻지 않겠다고 마음먹었어요. 이전 인터뷰(본보 747호)에서 충분히 설명이 된 상태이기 때문에 다시 거론하고 싶지 않아요. 그런데 이번 기사가 나가면 또 몇몇 사람들은 국적 문제를 걸고 넘어질 거예요. 그런 댓글을 볼 때마다 먹먹해지는 느낌이 드는데 기자보다 본인은 더 하겠죠.
▲제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 말, 저 말 떠들어도 변명으로밖에 안 들리잖아요. 그래도 <일요신문>에 인터뷰 기사가 나간 후 절 지지해주는 팬들도 늘었고 한국에서 직접 절 만난 분들은 모두 격려해주셨어요. 여기서 취재하시면서 느끼셨겠지만 미국에서 야구하다 보면 개인적인 타이틀은 전혀 중요하지 않거든요. 전 분명 한국 사람이고 여기 있는 모든 야구 관계자들이, 심지어 방송이나 취재 기자들도 절 한국인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국적만 미국이지 제가 한국 사람이란 걸 잊어 본 적이 없어요. 사실 절 비난하는 분들이 제 야구 인생을 책임지시는 건 아니잖아요. 제가 국적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간다면 그분들이 저에게 야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것도 아니잖아요. 어떤 분은 제가 미국에서 스티브 백으로 불린다고 하시더라구요. 저도 모르는 이름이 있었나보다 했어요. 구단 홈페이지 보시면 아시겠지만 전 여기서 ‘차승 백’으로 불립니다.
―미국에서 활약 중인 한국 선수들은 대부분 올림픽대표팀에 뽑혔어요. 그런 면에서 볼 때 대표팀에 대한 회한이 있을 것 같아요.
▲많이 아쉽고 부럽죠. 솔직히 대표팀에 뽑혔으면 좋겠어요. 한국 사람으로 태어났고 계속 한국에서 야구하다가 여기 오게 됐는데 대표팀에 갈 수 없다는 건 아픔으로 남아요. 이런 말 하기도 겁나네요. 또 다시 ‘죽일 놈’ ‘살릴 놈’ 하실 것 같아서.
백차승은 시애틀 매리너스의 홈구장인 세이프코필드에 울려 퍼지는 ‘백차승 파이팅’하는 응원 소리가 그 어떤 격려보다도 큰 힘이 된다고 했다. 한국 교민들의 응원에는 한국인, 미국인이 아닌 한국 출신 선수에 대한 뜨거운 관심이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백차승은 기자와 헤어지기 전 이런 말을 남겼다. “어렸을 때 선생님이 꿈이 뭐냐고 물어보시면 훌륭한 야구선수가 돼 한국을 알리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어요. 지금도 그 꿈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시애틀=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