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고픈 라이언킹 ‘이대론 미국 못가’
▲ 사진제공=KBS | ||
지난 10월 2일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이승엽의 극적인 홈런포에 힘입어 역전승을 거두며 5년 만의 센트럴리그 우승을 차지하자 일본 언론에선 3년 연속 30홈런을 터트린 이승엽에 대한 칭찬이 쏟아졌다. 지난해 왼쪽 무릎 수술을 받고 올 초 모친상을 당한 데 이어 시즌 개막전부터 왼쪽 어깨 왼손 엄지 부상 등으로 시달린 이승엽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요미우리 4번 타자의 위상과 역할을 다한 데 대한 일본 언론의 평가가 감동으로 이어졌던 것.
2007년을 ‘부상과의 전쟁’이라고 표현해도 과하지 않을 만큼 극한 고통 속에서 시즌을 치르며 리그 우승까지 일궈낸 이승엽을 지켜보며 가슴앓이를 한 아버지 이춘광 씨는 지난 3일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달뜬 목소리로 “우리 아들이 결국 해내고 말았다”며 벅찬 감정을 드러냈다. 특히 이 씨는 인터뷰 말미에 요미우리가 재팬시리즈에서 우승을 이뤄도 이승엽이 내년 시즌에는 메이저리그 진출이 아닌 요미우리 유니폼을 입고 올시즌 부진했던 성적을 회복시키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지난 1월 모친상을 당한 승엽이한테 올 시즌은 많은 고통과 깨달음을 준 한 해였을 겁니다.”
요미우리 우승에 도취된 사람은 요미우리 선수단과 팬들뿐만이 아니었다. 한국에서 그 장면을 지켜본 이승엽의 아버지 이춘광 씨도 아들의 150m짜리 초대형 홈런포에 환호하며 눈물을 훔쳤다. 9회 5-4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고 우승을 확정지은 순간, 이 씨의 가슴은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올 한 해 일어났던 여러 가지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면서 눈물이 나옵디다. 제 자식이지만 정말 장하고 대단한 선수라고 칭찬해 주고 싶네요.”
마음 같아선 당장 아들에게 전화를 걸어 ‘축하한다’ ‘수고했다’란 말을 해주고 싶지만 이 씨는 3일 오후까지 꾹 참고 있었다. “어젠 마음껏 승리에 도취되길 바랐어요. 오늘 하루는 푹 쉬며 편히 보내라고 일부러 전화를 안 했습니다.”
아들과의 통화 대신 3일 아침 일찍부터 김천의 청암사에 올라 불공을 드리고 스님들과 점심을 함께 하고 내려왔다는 이 씨는 지난 7월 5일 도쿄를 찾았을 때를 떠올리며 이승엽의 힘든 시즌을 회상했다.
“그때만 해도 왼손 엄지손가락 부상이 심각했습니다. 전화로 물어보면 ‘괜찮다’고만 말해서 직접 확인하고 싶었죠. 마침 강진 고려청자 홍보차 일본에 갈 일이 있어 오사카에 갔다가 7월 5일 도쿄로 들어갔습니다. 승엽이를 만나자마자 손을 보자고 했더니 승엽이가 ‘엄지 손가락이 애를 먹인다’라고 말하대요. 경기장에서 이전과 달리 힘 빠진 모습을 보니까 마음이 쓰립디다. 10일 귀국했는데 다음날 승엽이로부터 2군으로 내려간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이 씨는 아들의 2군행 소식에 당황했다. 부상이 의외로 심각하다는 걸 절감했고 이렇게 가면 시즌을 접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비통한 심정이었다고 토로한다.
▲ 하라 감독. | ||
“승엽이가 2군에서 복귀한 뒤 6번 타자로까지 내려갔다가 4번 타자로 다시 선 데에는 하라 감독의 믿음이 결정적이었어요.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자신을 믿어주는 감독의 존재는 선수에게 엄청난 힘이 됩니다. 만약 승엽이가 다른 팀에 있었다면 벌써 퇴출당했을 지도 몰라요. 아님 2군에서 별 볼 일 없는 선수로 취급 받던가…. 감독이 선수를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구단에서도 승엽이에게 함부로 대하질 못했고 다른 선수들도 승엽이를 ‘찬밥’ 취급하지 않았던 거죠.”
어느날 하라 감독은 이승엽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어렸을 때 아버지한테 회초리를 맞은 적이 있느냐’고. 그랬더니 이승엽은 ‘내가 고집이 세서 부모님이 그 고집 꺾으려고 마음 고생이 심했다’며 ‘야구 못할 때는 맞지 않았지만 버르장머리 없이 굴거나 예의범절을 지키지 않을 때는 회초리로 맞았다’라고 말했다.
“하라 감독이 그 말에 감동했었나 봅디다. 그때 일본 가서 우연히 하라 감독을 만날 수 있었는데 저한테 승엽이의 남다른 인간성에 대해 칭찬을 많이 하더라구요. 자유분방하게 자란 일본 선수들과는 달리 승엽이는 예의가 있고 상대에 대한 배려가 많아 저절로 마음이 간다고 합디다. 더욱이 하라 감독이 팀을 장악하고 훈련시키는 데 승엽이의 사례가 큰 도움이 됐다는 인사도 건넵디다.”
이 씨는 이승엽이 6번 타자로 내려갔을 때 전혀 서운하지 않았다고 한다. 설령 9번 타자가 됐다고 해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레귤러 멤버에 포함된 걸 감사했고 2군이 아닌 1군에서 뛴 데 대해 행복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승엽이는 요미우리의 ‘용병’이 아닌 것 같습니다. 선수들도 감독도 승엽이를 팀 동료로 인정하지 용병이라고 이방인 취급을 안 하거든요. 승엽이가 막판에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도 이런 팀 분위기 때문일 겁니다. 그런 점에서 승엽이는 분명 큰 복을 받았어요.”
한편 이 씨는 지난해 이승엽이 해외 진출을 포기하고 요미우리와 재계약을 맺으며 ‘팀을 우승시킨 후 다시 메이저리그에 도전하겠다’는 약속에 대해 ‘승엽이는 내년 시즌에 요미우리에 남을 수밖에 없다’라고 단정지었다.
“만약 재팬시리즈에서 요미우리가 우승을 해도 승엽이는 미국에 도전할 수 없을 겁니다. 가장 큰 이유는 올시즌 부진했던 성적 때문이죠. 자존심이 센 승엽이가 이런 성적표를 가지고 미국 진출을 고려하진 않을 거예요. 승엽이가 저한테 한 말이 있습니다. 누구나 공감할 만한 성적과 누구나 인정하는 시즌을 보내지 않는 한 일본을 떠나지 않겠다고요. 아직 일본에서 성공했다는 확신이 안 서는 거죠. 저도 그 생각엔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