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구는 내 전부니까 나를 던진 거예요”
▲ 탁구협회의 문제점을 제기하며 유남규와 함께 대표팀 감독직을 동반 사퇴한 현정화.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최근 대한탁구협회 천영석 회장의 권력남용과 월권행사에 반발, 유남규 감독과 함께 탁구대표팀 동반 사퇴를 선언한 현정화 KRA 감독(38) . 제도권에 맞선 스타플레이어 출신의 항변에 대해 탁구인들은 물론 팬들까지 지지 의사를 보내며 응원을 하지만 정작 본인은 마음이 불편할 수밖에 없다. 지난 12월 11일 기자와 만나 소주잔을 기울이며 그동안의 마음 고생을 조금씩 꺼내 보인 현 감독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선 조금의 후회도 없다고 잘라 말했다.
# 몸풀기 스타트!
현정화 감독을 만난 곳은 논현동 부근의 생선회무침을 전문으로 하는 식당이었다. 깻잎에 날치알을 얹고 생선회무침을 싸서 먹으면 맵고 톡톡 튀는 맛에 깻잎의 향긋함이(쓰다보니까 마치 요리 방송을 하는 듯^^) 입안을 가득 맴돈다. 거기에 곁들이는 소주 한잔!(크윽) 정말 술이 절로 넘어간다는 말이 딱 들어맞을 만큼 술과 안주가 환상의 궁합을 보여줬다.
이영미(이): 워낙 술을 잘 마신다고 해서 잔뜩 긴장하고 나왔어요. 숙취해소 드링크제까지 먹고 말이죠.
현정화(현): 진짜 잘 마시는 편이에요. 하지만 술자리 나름인 것 같아요. 편한 사람들이랑 있으면 조금만 마셔도 취하고, 어려운 자리에선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구요. 원래는 술 잘 먹는다고 깝죽대다가 먼저 뻗는 스타일이에요(웃음). 어휴, 근데 한 잔 마셨더니 속이 짜르르 하네.
이: 아까 언뜻 보니까 차 번호가 1988이더라구요. 올림픽과 관련 있는 거죠?
현: 야, 눈치 빠르시네. 차량등록소 직원 분이 제 팬이시래요. 그래서 처음에 차 뽑을 때 번호를 1988로 주셨어요. 그 번호를 지금까지 쓰고 있어요.
이: 그때는 팬들이 장난 아니었다면서요?
현: 하루에 받는 팬레터가 자루 채 담겨 왔어요. 수백 통이 넘어서 일일이 읽어볼 수조차 없었죠. 방송에서 인터뷰할 때 제가 뭘 좋아한다고 말하면 다음 날 바로 선물이 도착해요. ‘김이 먹고 싶다’면 김이 오고, 인형 좋아한다고 하니까 인형이 방 안에 차고 넘칠 정도로 배달돼 와요. 정말 재밌었어요. 인기라는 걸 실감할 수 있었으니까.
#‘본게임’에 들어가다
이: 인터뷰 기록을 찾아보니까 2004년 시드니올림픽을 앞두고 8개월 전에 코치직에서 물러난다고 발표한 적이 있었어요. 결국 합류하긴 했지만.
현: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시는 것 같네. 이쯤에서 ‘원샷’ 한 번 해요.
‘몸 풀기’로 마신 술이 벌써 두 병째다. 얼굴 색 하나 변하지 않고 들이키는 현 감독의 술 실력이 놀라울 따름이다. ‘본게임’에선 현 감독이 탁구협회와 갈등을 겪는 과정을 주로 들어보기로 했다.
현: 잘 될 거라고 믿었어요. 집행부에 선배들이 있었으니까 믿고 따르기로 했던 거죠. 그런데 그 믿음을 배신하더라구요. 제가 가장 충격적으로 받아들인 게 유남규 감독이 농심삼다수에서 해임된 부분이었어요. 어떻게 유남규라는 지도자를, 나이 육십 넘은 사람이 자기가 감독 더 하겠다고 내칠 수 있느냐는 말이죠. 어떤 변명을 하더라도 용납이 안 되는 사건이었어요. 그 점에 전 ‘뚜껑’이 확 열렸습니다. 그때 최종적으로 대표팀에서 물러나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 아테네 올림픽에서 경기에 진 선수들을 다독이는 모습. 당시 코치였던 그의 모습이 퍽 따스해 보인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현: 사실 제가 총대를 멘 거죠. 제가 나서서 조금이라도 달라진다면 총대를 메겠다 이거죠. 정말 화가 나는 건 우리가 밤잠 설치며 공부할 때, 우리가 허리, 목 디스크에다 팔 인대 부상까지 감수하고 후배들 양성할 때, 편하게 다리 뻗고 주무신 분들이 오히려 우리에게 “너희가 한 게 뭐가 있어”라고 손가락질하는 모습이었어요. 우리가 박사 따고 석사 딸 때, 지도자 1급 자격증 따느라 시간을 쪼개며 살 때, 도대체 그 분들은 뭐 하셨는지 묻고 싶어요. 코치하라고 감독하라고 맡겨놨으면 그냥 우리를 믿어줘야죠.
이: 천영석 회장을 만나 그런 문제점들에 대해 얘기해 보진 않았어요?
현: 사실 그 분 임기가 내년까지라 베이징올림픽까지는 그냥 참고 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너무 안하무인이세요. 모든 일에 간섭을 해야 마음이 편한 분이세요. 이건 정말 술 마셔서 하는 얘기가 아니에요. 제 얼굴에 침 뱉는 거나 마찬가지라 그동안 말을 꺼내지 않았던 거죠. 오늘 아침에 한 일간지 기자가 전화를 했더라구요. 회장이랑 통화를 했다면서. 그 기자가 회장에게 물어봤대요. 대표팀 선수 선발권, 코칭스태프 결정 등을 회장이 직접 다 하느냐고. 회장이 뭐라고 말한 지 아세요? “걔네들은(유남규, 현정화) 너무 어려서 믿을 수 없기 때문에 내가 나설 수밖에 없었다”라고. 나이 마흔이 넘은 지도자에게 어리다고 하는 게 말이 돼요?
이: 10명 중에 9명이 ‘당신이 잘못’이라고 말하는데도 그 얘기를 귀 담아 듣지 않는다면 정말 문제 있는 거죠.
현: 전 유남규 감독이랑 달리 그동안 무조건 ‘예스맨’이었어요. 제가 할 수 있는 게 탁구밖에 없으니까, 갖고 있는 재능으로 후배들을 가르치고 키우고 싶으니까 제도권에 들어가 살아야 했어요. 그런데 이건 너무하는 거예요.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고, 이번엔 제가 꿈틀한 겁니다.
이: 협회 내부에 임직원들이 있는데 왜 그들은 아무 목소리를 못 내는 거죠?
현: 많은 선배들이 그 분 밑에서 일하고 있는데 후배들의 몸부림을 보면서도 ‘우리도 어쩔 수 없다’며 손 놓고 있는 부분이 정말 실망스러워요. 선수단에서 회식을 한 번 하려고 해도 회장 결재를 받아야 해요. 그 돈이 얼마나 되겠어요. 100만 원도 채 안 돼요. 그런 부분까지 일일이 다 보고를 해서 허락을 받아야 하는 거예요.
이: 누구보다 선수들이 많이 혼란스러워 할 것 같아요.
현: 저, 정말 그 얘기하면 눈물 나요. 사실 후배들 때문에 많이 갈등했고 망설였어요. 중요한 대회를 앞두고 지도자들이 흔들리면 선수들은 말할 것도 없잖아요. 나름 정상적인 길을 가려고 하는 현정화가 오죽했으면 총대 메고 욕 먹으면서까지 이런 결정을 했겠어요. 부디 이런 몸짓들이 허무하게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타임아웃
이: ‘현정화=운동+가족+여자’라는 연결된 단어 속에서 묘한 이질감들이 있어요. 다 공유하고 있는데도 말이죠.
현: 나이가 마흔이 돼 가니까 가족의 소중함이 커져만 가요. 요즘 전 잠 자다 눈을 떠 보면 오른쪽에 딸이 있고 왼쪽에 아들이 자고 있는 모습을 볼 때 너무 행복해요. 애들 아침 밥 먹이고 옷 챙겨 입혀서 유치원 보내는 풍경이 그림처럼 다가오거든요. 사소한 행복이란 게 우리 가족들한테는 없었어요. 선수시절 때도 지도자하면서도 운동이 전부였고 그 운동으로 인해 가족들의 희생이 엄청 컸죠.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그냥 아이 엄마로, 주부로 평범하게 살고 싶을 때가 너무 많아요.
이: 여자로서 지도자 생활을 하는데 불편한 점이 있었나요?
현: 이건 아이러니한 얘기인데요, 남자와의 경쟁보다 여자와의 경쟁이 더 힘들었어요. 시기, 질투, 이런 보이지 않는 감정들로 인해 상처를 받게 되니까요. 전 남자들 세계에서 ‘꽃’으로 보이기 싫었어요. 그들과 어울려서 술을 마셔도 대차게 마셨고 좀처럼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어요. 전 치마를 입은 적이 없어요. 그들이 절 여자로 볼까봐. 술도 당당하게, 일도 씩씩하게, 성격도 털털하게, 동등한 입장에서 서고 싶었죠.
이: 이렇게 희생을 각오하고 제도권과 맞서 싸우는데도 그 결과가 미미하다면 어떻게 할 건가요.
현: 아무리 용을 써도 변하지 않는다면 제가 탁구계를 떠날 수 밖에요. 제 청춘 다 바쳐서 탁구를 위해 살았고 탁구로 인생의 희로애락을 배웠지만 더 이상 발전이 없다면 제가 탁구를 버릴 겁니다.
현정화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최선을 다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할 때 그 시간이 아깝고 서운하지 않은 거지, 일하는 게 아깝다고 생각한다면 이게 무슨 가치있는 삶이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소주 6병에 김치말이 국수와 매운탕까지 비운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데 현 감독의 격한 감정들 속에 녹아서 그런지 전혀 술이 취하지 않았다. 세상이 정의만 통하지 않는다는 걸, 열정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걸, 그리고 우리의 삶에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새삼 절감했다. 현정화의 탁구에 대한 ‘애정’이 ‘애증’으로 변하지 않길 바랄 뿐이다. 탁구는 ‘그들만의 공유물’이 아니라는 걸 부디 ‘그 분’이 깨달아 주셨으면 한다.
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