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권에 오염된 ‘괴물’이 몰려온다
▲ 최근 정치권에 떠도는 괴문서들. | ||
한나라당 소속 의원들의 성향을 분류한 문건이 나도는가 하면 17일에는 범여권 후보군으로 분류되고 있는 고건 전 총리 캠프에 참여할 인사들의 명단이 정치부 기자들의 이메일로 보내지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19일에는 한나라당 유력 후보의 동향보고서가 등장해 괴문서 출처 논란을 부추기고 있다.
특히 괴문서 내용이 여야 차기 대선주자들과 직간접적으로 연계돼 있다는 점에서 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이고 이러한 유형의 괴문서는 대선정국이 본격화 할수록 더욱 횡행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연말을 전후한 정치권 빅뱅 움직임과 맞물려 차기 주자들을 중심으로 한 세력 다툼과 더불어 마타도어 징후마저 감지되면서 바야흐로 대선정국의 서막이 오르고 있는 형국이다.
정치권 주변에서 당권주자나 대권주자를 중심으로 한 이른바 ‘줄 세우기’ 관행은 비단 어제오늘만의 얘기가 아니다. 당권이나 대권에 뜻이 있는 거물급 인사들은 큰 꿈을 이루기 위해 조직이나 지지세력 확장이 불가피하고 초재선 의원들도 어느 쪽에 줄을 서느냐에 따라 자신의 정치운명이 엇갈려 왔던 게 현실이다.
과거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을 정점으로 한 상도동계와 동교동계는 우리나라 계보정치의 실상을 잘 대변하고 있다. 이들 두 전직 대통령이 퇴임하고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면서 특정 인물이나 지역 연고를 매개로 한 계보정치가 점차 퇴색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물밑에선 제2의 상도동계 동교동계를 노리는 정치세력들이 적지 않다.
최근 여야 차기주자들에 대한 지지성향을 엿볼 수 있게 하는 괴문서가 여의도 정가 주변에서 나돌고 있다는 사실은 이를 반증하고 있다.
지난 17일 고건 전 총리 캠프에 참여할 인사 명단이 정치부 기자들의 이메일로 보내졌다. 발신자가 기록돼 있지 않은 메일에는 “최근 고 전 총리가 정ㆍ재계 인사들과 부지런히 접촉 중인데 이들은 2007년 고건 캠프에 대부분 참여할 것으로 예상된다”는 내용과 함께 친 고건 인사로 열린우리당 전ㆍ현직 의원 13명, 민주당 전ㆍ현직 의원 5명 등 정치권 인사들과 P 회장, M 사장, H 전 회장, J 전 장관 등 재계 인사 등 모두 38명의 명단이 들어 있다.
메일 발신자로 의심받고 있는 고 전 총리 측 한 인사는 20일 기자와 전화통화에서 “메일 내용에 비춰볼 때 고 전 총리 진영이 의심을 받을게 뻔한데 그것도 정치부 기자들을 상대로 무모한 일을 했겠느냐”고 반문하면서 “일부 열성 지지세력이 순수한 의도로 메일을 보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지만 대선정국을 앞두고 고 전 총리를 음해하는 세력이 정치적 음모 차원에서 메일을 발송했을 것이란 의혹을 감출 수 없다”고 말했다.
이어 19일에는 한나라당 ‘빅3’중 한 사람에 대한 ‘동향보고서’ 문건이 일부 언론에 보도돼 또 다른 파문을 예고하고 있다. 이 동향보고서에는 특정 대선주자의 핵심 측근으로 구성된 ‘8인회의’라는 모임이 등장하고, 캠프와 관련된 전반적인 사항이 상세히 기록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8인회’ 명단에는 현 지도부의 고위관계자도 포함돼 있어 지도부의 중립성 논란마저 일 전망이다.
이보다 앞서 한나라당 소속 의원들의 성향을 분석한 A4 용지 한 장 분량의 괴문서가 나돌아 주목을 끈 바 있다. 이 괴문서에는 박근혜 전 대표, 이명박 전 시장, 손학규 전 지사 등 한나라당 ‘빅3’에 대한 의원들의 지지 성향이 세밀하게 적시돼 있다. 괴문서에는 소속 의원 126명의 성향(‘빅3’ 지지 여부)과 모임 현황, 노력(자기세력화 추정) 등이 기록돼 있고, 성향과 관련해서는 친박(근혜) 50명, 친이(명박) 20명, 친손(학규) 11명 등으로 분류했다.
그러나 이 괴문서는 앞서 7·11 한나라당 전당대회 이전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A4용지 5장 분량의 괴문서와 소속 의원들의 지지 성향이 상반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작성자가 누구인지에 따라 의원들의 성향 분류에 차이가 있었던 것.
이 문건은 7·11 전대 당시 당권주자였던 강재섭 이재오 후보의 측근 의원 진영에서 작성한 것으로 취재결과 드러났다. 박빙의 승부였던 만큼 선거 당락을 좌우할 수 있는 현역 의원들의 성향을 분석하기 위한 목적으로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이러한 성향 분류 문건은 외부로 유출될 개연성이 높은 만큼 각 당권주자 진영이 자신들을 물밑 지원하고 있는 당내 유력주자들의 세력을 과시하기 위해 아전인수식으로 의원들의 성향을 분류했을 것이란 관측에 무게감이 실리고 있다.
이처럼 출처 불명의 괴문서와 정체를 알 수 없는 메일건으로 정치권이 뒤숭숭한 가운데 여야 정치권과 대권주자 진영은 괴문서 정국에 따른 유·불리를 따지며 분주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특히 괴문서 출현으로 당내 차기주자 간 갈등과 분열 조짐이 일고 있는 한나라당 지도부와 ‘빅3’ 진영은 몹시 당혹스러워 하면서 파문 확산 차단에 주력하고 있다.
보통은 이런 괴문서의 존재자체를 애써 무시하려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지만 황우여 사무총장이 18일 이례적으로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출처불명 문건이 어지럽게 유포되는 바람에 당의 ‘민생우선’ 방침이 훼손되고 당내 분열로 이어질까 걱정”이라며 “문건 배포자가 누구인지 알아내고 혹시라도 당내 인사가 개입됐을 경우 해당행위 차원에서 엄중 조치할 것”이라고 한 것은 한나라당의 내부 분위기를 잘 반영하고 있다.
작금의 괴문서 논란에서 한 발짝 벗어나 있는 여권은 한나라당의 분열 조짐에 반색하고 있지만 내심 “남의 일이 아니다”는 걱정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다. 괴문서 논란이 차기 대선정국과 직접 연계돼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여권 역시 조기 대선 경쟁으로 인한 부작용에 결코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정치권 관계자들도 여야를 망라하고 차기 주자들을 중심으로 한 이합집산 현상은 갈수록 심화될 것이고 이 과정에서 또 다른 괴문서 출현은 불가피 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따라서 출처 및 배후세력을 밝혀낼 수 없는 마타도어식 정치행태는 연말 정계개편 및 대선정국이 다가올수록 더욱 심화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괴문서’ 소동은 바야흐로 ‘정치의 계절’ 개막과 함께 여야 각 대선캠프의 활동이 본격화되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 될 것이란 관측도 점점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