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수형, 요삼이, 그리고 아들을 위해”
“(최)용수 형의 패배와 (최)요삼이의 죽음을 걸고 멋진 승리를 약속한다.”
서울 양평동 21세기권투체육관에서 마무리 훈련에 한창인 지인진에게 시합을 앞둔 각오를 밝혀달라고 주문하자 이렇게 시원하게 답했다. 이번 K-1 데뷔전이 결코 개인적인 차원의 일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지난 연말 지인진은 괴로웠다. 개인적으로 가볍지만 교통사고를 당해 수습하기에 바빴다. 그 사이 친형제와도 같은 전 WBA슈퍼페더급챔피언 최용수가 K-1 4번째 경기에서 일본의 강자 마사토에게 KO로 비참하게 쓰러졌다(12월 31일). 앞서 세계타이틀매치에서 쓰러져 의식불명이었던 친구 최요삼은 새해 첫날 산소마스크를 떼어내며 유명을 달리했다. 선배를 위로하랴, 친구의 관을 들랴 지인진의 가슴은 시커멓게 멍이 들기만 했다.
데뷔전을 앞두고 한창 훈련에 매진해도 모자랄 판에 이렇게 ‘일’이 많으니 보다 못한 매니저 양명규 T엔터테인먼트 대표가 태국전지훈련을 제안했다. 모든 것을 잊고 무에타이의 고향 태국에서 몸을 만들라는 주문이었다. 지난 1월 20일에 출국한 지인진은 3주간 더운 태국에서 땀을 쏟아내고 자신감에 가득 찬 모습으로 돌아왔다.
“원래는 오사카(최용수-마사토전의 열린 장소)에 갈 예정이었어요. K-1 데뷔를 앞두고 현장 분위기도 익히고, 용수 형도 응원하려고요. 그런데 출국 며칠 전 교통사고가 났어요. 함께 훈련을 했기 때문에 용수 형의 몸 상태가 좋은 것을 잘 알고 있었고, 내심 이변이 일어나리라고 기대를 했죠. 그런데 결과가 너무 처참했어요. 용수형이 마사토의 킥을 얼굴에 맞고 쓰러지는 장면을 보는데 피가 거꾸로 치솟더군요.”
지난해 8월 WBC페더급타이틀을 반납하고 K-1행을 선언한 지인진은 최용수보다 불과 한 살 어리다. 하지만 최용수는 은퇴 후 3년이 지난 후에 K-1에 데뷔했고 자신은 현역 세계챔피언으로 파이터 변신을 택했다. 공백기가 있었던 최용수가 4번 중 한 번, 그것도 세계 최강자에게 진 것은 용서할 수 있다고 해도 전성기의 복서가 데뷔전부터 고생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복싱에 먹칠을 하는 일이다. 그래서 더욱 부담이 된다.
▲ 2006년 12월 지인진의 세계타이틀 획득 모습. 연합뉴스 | ||
마침 지인진의 데뷔전 상대 카지와라 류지는 일본의 킥복서 출신이다. 주로 전 일본 킥복싱에서 활약한 선수로 12승1무3패의 좋은 전적을 기록하고 있다. 최용수를 눕힌 마사토와 같은 일본선수라는 점에서, 그리고 복싱과 비교되는 킥복싱 출신이라는 점에서 꼭 화끈한 승리를 거두고 싶은 것이다. 물론 승리의 방정식은 복서 특유의 시원한 소나기 펀치로 이끌어낼 것이다.
고 최요삼에 대해서도 한마디 했다. “요삼이의 죽음을 대할 때 누구보다 괴로웠어요. 요삼이가 프로복싱을 되살리기 위해 마지막 라운드까지 파이팅을 펼치다 변을 당했잖아요. 그런데 저는 세계챔피언을 버리고 K-1으로 갔으니 복싱 쪽에서는 그다지 좋을 게 없잖아요. 빈소와 장례식장에서 죄인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지인진의 목소리는 아직도 떨리고 있었다. 그만큼 친구의 죽음은 충격이었던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다시 복싱 세계챔피언으로 복싱 중흥을 이끌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곧 마음을 바꿔 먹었다. 현재 자신이 할 수 있는 ‘복싱사랑과 망자에 대한 예의’는 K-1 무대에서 현역 세계챔피언의 자존심을 곧추 세우는 일이라고 말이다.
21세기권도체육관의 박현성 관장은 “이제껏 많은 복서와 파이터를 가르쳐왔지만 지인진처럼 머리가 비상한 선수는 처음 본다. 최용수가 힘과 투지의 파이터라면 지인진은 생각하는 파이터다. 복싱보다 발까지 사용하는 격투기에서 지능적인 플레이가 더 필요하다. 좋은 경기를 펼칠 것”이라고 강조했다.
지인진은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이름으로’를 강조했다. 아들과 딸을 둔 아버지 파이터로 자식들을 위해서라도 좋은 경기를 펼치겠다는 것이다. “첫째가 아들(성민)인데 어린이집에 다녀요. 그런데 요즘 아버지 챔피언, K-1 등 어디서 들었는지 그런 얘기를 곧잘 해요. 용수 형도 마사토한테 진 후 아들이 울어서 아주 힘들었다는데 저도 마찬가지예요. 예전엔 은퇴를 빨리해 아이들이 아버지의 경기를 보는 일이 거의 없었는데 이제 용수 형이나 저는 아버지 파이터가 돼 더 책임이 막중해요.”
유병철 스포츠전문위원 einer6623@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