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따라 16대 대선은 한나라당 이회창, 민주당 노무현 대통령후보와 함께 ‘3+α’ 구도를 형성하게 됐다. 하지만 정 의원의 출마선언은 정치권 합종연횡의 기폭제가 될 것으로 보여 앞으로 대선구도가 어떻게 변할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아무튼 말도 많고 소문도 많던 정 의원이 출사표를 내면서 그에 대한 관심은 더욱 증폭하게 됐다. 정 의원 지지자들이나 반대파들이 우려하거나 벼르던 그에 대한 검증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을 정 의원 스스로도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는 검증에 대해 꽤 많은 준비를 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검증을 헤쳐나갈 ‘무기’는 무엇일까. 일각에선 그것은 다름 아닌 ‘솔직함’과 ‘인간애에 대한 호소’라는 말이 나온다. 대선 출마를 공식선언하기 이틀 전인 지난 15일 정 의원은 기자들을 서울 L호텔 식당으로 불러 스스로 ‘언론의 심판대’에 올랐다.
정 의원은 이날 기자들에게 비교적 솔직하게 사생활을 털어놓았다. 민감한 부분에 대해선 정치적인 언변으로 피해갔지만 다른 때와 달리 많은 이야기를 쏟아냈다.
다음은 일문일답.
─집에는 일찍 들어가나.
▲그저께 아내 생일이었다. 9시30분쯤 집사람 언니집에서 서프라이즈 파티(Surprise Party:초대받는 사람이 모르도록 파티를 준비해서 놀라게 해주는 생일파티의 일종)를 했는데 늦게까지 앉아 있었다.
─평소 아내를 어떻게 부르는지. ‘어!,야!’ 이렇게도 부르나.
▲평상시에는 ‘기선(장남)이 엄마’라고 부른다. (하지만) 비상시엔 그렇게 부른다. 예전에 신사동아파트를 팔고 집사람 통장에 넣어준 적이 있었다. 모처럼 기분 냈는데 작년 초인가 자선단체에 전부 기부했더라. 그런 뒤 ‘또 달라’고 그런다. ‘월드컵 유치기념으로 기부하라’고. 그러고 또 ‘성공으로 끝났으니 기부하라’고 그런다.
집사람은 17년간 미국서 살았다.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데 본인은 그게 사투리라는 인식을 못하더라. 영어는 나보다 잘한다. 나는 4년 반 미국에서 살았고. 석사논문 쓸 때 아내가 많이 고쳐주었다.
집사람은 초등학교 3년 때 외국에 갔다가 대학 졸업 뒤 귀국했다. 친구가 없다. 장점이자 단점이다. 성격은 안정감이 있다. 대선출마에 대해 집사람이 상당한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상대방이 비난하는 것, 그리고 낙선 때 예상되는 어려움 때문에. 우리 사회에 밝지 못해 막연한 두려움, 공포심을 갖고 있다. 어렵게 생각 말라고 얘기했다.
─정치를 하게 된 동기는.
▲12대 (총선) 때 출마하려고 했는데 전두환 대통령이 불러서 출마를 만류했다. 당시 아버지는 전경련 회장을 하면서 대한체육회장을 맡았는데 하기 싫어하셨다. 전 대통령이 하루는 불러서 ‘대한체육회장 자리가 높지 않아서 안하려고 하느냐’고 해서 (아버지가) 할 수 없이 맡았다.
그 일 이후로 나는 (출마의 뜻을 접고) 미국에 갔다. 두 번째 미국에 갈 때는 막막했다. 경영하는 것은 싫고. 이홍구 한승수씨가 존스홉킨스대를 추천해줘서 갔다.
당시 아버님은 집에 늦게 들어왔다. 아버지를 보면서 기업인으로 일생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안들었다. 또 그때엔 자고 나면 신문에 ‘족벌경영’이란 말이 나왔는데 답답했다. 난 회사를 그만두려고 했는데 그러기 위해선 직업을 구해야 했다. 먹고 노는 사람 리스트에 올라갈 수는 없지 않는가.
그때 전두환 대통령을 만나 그런 말을 했더니 ‘말은 맞는데 출마는 안돼’ 그러더라. 나는 국회의원을 하면서 사익추구를 떠나서 공직자리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정치(politics)보다는 공공 서비스(public service)를 한다는 기분으로 했다.
사장 하다가 의원 하면 출세라고 하는데 해보니까 출세인지 강등인지 의심이 많았다. 무소속으로 왔다갔다 하는데, 대한민국에서 제일 큰 제조업체 책임자 하다가 의원 되면서 왔다갔다 하니까 (동료 의원들과) 어울려 다니기가 쉽지 않았다. 본회의 끝난 뒤 다들 쑥덕공론하러 가는데 안붙여 주더라.
15대 시절 이홍구 총리 때인데 YS가 ‘여당 가서 하면 어떻겠는가’ 했는데 그런 분위기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안했다. 계속 몇 분이 ‘여당 하면 어떻겠느냐’ 문의했는데 ‘당신들 정치하는 데 내가 방해가 된다면 출마하지 않겠다’고 했더니 다시는 그런 말 안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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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박사논문을 쓰려고 도쿄대 교환교수로 가 있었다. 당시 의원신분이었다. 3당 합당이 되면서 무소속은 나와 서경원 의원뿐이었다. 서 의원은 구속된 상태였다. 이 즈음 통일 대비 3당 합당 얘기가 있었다.
(이에) 동감했다기보다는…. 본회의장에 제일 왼쪽 앞자리에 서경원 그 다음이 내 자리였다. 심리적 압박감도 있었다. 그리고 김동영 의원하고 가깝게 지내며 일요일 도봉산 등산을 함께 하기도 했는데 그분이 권유하고 그랬다. 그래서 민자당에 2년 있었다.
─지도자는 어떠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먼저 정서적 안정감(emotional stability)이 있어야 한다. 정신적, 지적 열등의식이 없어야 한다. 이게(정서적 안정성이) 없으면 이를 극복하려다가 다른 사람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게 된다.
둘째는 본인 스스로 행복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지도자가 돼야 한다. 본인이 그런 생각없이 남을 행복하게 만들기 어렵다.
─강력한 경쟁의식을 느낀 적이 있었나.
▲학교 때 공부를 잘하고 키 크고 잘생긴 사람을 봤을 때였다. 사회생활하면서 큰 기업을 경영하고 돈 많은 사람에 대해 경쟁의식이나 부럽다는 생각은 안했다. 국회의원하면서 자기 의견을 거침없이 소신껏 말하는 사람을 보고 부러웠다.
─노무현 후보를 말하는 것인가.
▲그 사람은 경쟁자라기보다….
─생모 문제에 대해 궁금해 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공개 문제를) 조금 생각해 보겠다. 생모라는 단어는 느낌이 너무 강하다. 발표시기에 대해 생각하겠다.
─어린 시절 별명이 있었나.
▲글쎄 …‘꺼벙이’. 친구끼리 ‘멍청아’라고도 하고 ‘몽탱아’라고도 했다. 장난이 심한 편이었다. 다섯 번 골절상을 입었다. 군에서 축구하다가 무릎에 금이 갔고, 직할강 스키시합에 나갔다가 어깨뼈가 부러졌다. 농구하면서 리바운드볼을 잡다가 팔관절이 부러진 적도 있다.
─집에선 정몽헌 회장하고 같은 방을 썼다는데.
▲당시 일본식 집이었다. 한 방에서 잤다. 옛날에 화장실에 가는 걸 무서워했는데 같이 갔다. 귀신 나온다는 얘기도 있고. 두 살 차이다.
─서울대 경제학과에 지원하게 된 동기는.
▲경제와 경영의 차이를 몰랐다. 당시 서울대에서 커트라인과 관련해 경제학과 입학생의 자부심이 대단했다. 법대보다 높았다고 그랬던 것 같다.
─대학 1학년 때 커닝을 해 유급했다는데.
▲고교 때엔 통제된 상황이었는데 대학 때는 처음에 규칙적인 생활을 못했다. (그때가) 2학기 마지막 시험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학생들도 학교에 별로 없었고.
─결혼 과정은.
▲아내와는 소개로 만나 1년 뒤인1979년 7월29일 정동교회에서 결혼했다. 은중관 목사가 주례를 맡았다. 지금 연세대 명예교수이다. 교회 신관이 문을 연 뒤 첫 번째로 했다. (한여름인데) 에어컨이 작동하지 않아 더워서 혼났다. 당시 유학중이었는데 여름방학 때 귀국해서 결혼을 했다.
아내의 둘째 언니가 워싱턴에 살았는데 그 집에서 쓰던 가구를 유홀(렌털용 이삿짐전문트럭 회사)을 통해 보스턴으로 날랐다. 아내는 웨슬리(보스턴 근교)에 다녔다. 대학원과정이 없는 작은 여대였다. 이 학교 앞 3층짜리 아파트를 얻어 신혼집을 차렸다.
처음에 아내를 소개받은 뒤 바빠서 자주 만나지는 못했다. MIT와 웨슬리대는 자매학교였는데 학교버스로 40분 거리에 있었다. 가끔 그 학교에 놀러가서 봤다.
─따로 종교가 있나.
▲우리 형제는 모두 정동교회에서 결혼식을 했다. 아버지가 (그렇게) 시켰다. 아버님도 교회에 다녔다. 중학교 시절 교회에 다녀서 좋았던 점은 아버님이 같이 교회에 갔다가 가끔 한일관에서 점심을 사주시고, 영화도 함께 봤던 일이다.
지금은 소망교회에 다닌다. 교회에서 좋은 말씀을 많이 듣는다. 지식인이 많이 가는 교회다. 일요일엔 특별한 일이 없으면 간다. 직책은 서리집사이다. 셋째(차녀 정선이)는 조지타운대학병원에서 태어났다. 셋째가 때어날 때 내가 먼저 세례를 받아야 된다고 해서 뒤늦게 귀국해서 세례를 받았다.
─정 의원의 골프 실력은.
▲핸디는 18이고 최고기록은 6오버다. 제일CC에서 외무위 의원들하고 갔을 때였다. 홀인원은 이홍구 전 총리가 대사로 나갈 때 환송파티차 골프치러 갔다가 했다. 당시 IMF때여서 야단맞을까봐 소문도 못냈다. 장타라기보다 강타다. 박세리 김미현하고도 쳤는데 똑바로 가면 박세리하고 비슷하게 간다. (한 3백야드 되나) 그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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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딸(정남이)이 연세대에 재학중이다. 그 아이는 자기 친구들이 아버지에 대해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친구가 집에 오면 (내) 사진을 다 치운다. 미국서 재즈뮤직을 공부하겠다고 한다.
어릴 때 피아노를 공부했는데 미국유학을 권유했더니 도피유학으로 낙인찍히기 싫다며 부득부득 연세대에 진학했다. 졸업 때 전교 1등을 했는데 수시입학모집에서도 여러 군데 합격했다.
둘째 딸은 미국에서 태어났는데 미국 고교에 다니고 있다. 현지에서 대학에 가려면 운동을 해야 한다고 해서 최근 육상하고 골프를 시작했다. 나는 한국국적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는데 최종판단은 본인이 할 것이다. 첫째 아들은 ROTC를 선택했다. 늦둥이는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다.
─기업경영에 있어 독재자라는 말도 있는데.
▲일을 하다보면 생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땐 이야기해야 된다. 못 알아들으면 두 번 얘기해야 되고. …자기 자신에 대해 더 엄격해야 한다. 공직에 있는 사람은 서로에게 좀더 엄격해야 되지 않나.
─일각에선 어릴 때 정신병을 앓았다는 얘기도 들린다.
▲내가 정신병자라는 주장이 있는데 사실이라면 내가 하든지 그 사람이든지 조사해야 한다. 그 사람 말이 사실이라면 내가 ‘인간승리상’을 받아야 되지 않겠나.
월드컵으로 많은 국민에게 기쁨을 주었는데 이보다 더한 인간승리가 어디 있나. 국회의원을 4번 했는데 유권자 모독이다. 그 사람들이 우리 아버님 선거 때 많이 조사했다.
박상구 언론인 제목 = ‘MJ 출생문제’ 지인들의 말 내용 고 정주영 회장의 집안 사정을 잘 아는 인사들은 정 의원의 출생문제와 관련해 한결같이 “한 인간으로서 고뇌를 느끼게 하는 아픈 부분”이라며 구체적인 언급을 피했다.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인간의 생에 대해 “출생은 고통의 시작이요, 삶은 죽음을 잠시 연기시킨 것일 뿐이며 이 모든 것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것”이라고 말한 것처럼, 정 의원의 출생문제도 이와 마찬가지라는 입장이다.
정 회장과 동년배로 오랜 친분을 쌓아왔던 김상기 전 동아일보 사장은 “다 옛날 얘기인데 지금 와서 꺼내는 것은 옳지 못하다. 친모가 따로 있다고 해서 문제될 것은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정몽준씨가 훌륭하다는 것뿐이다”라며 정 의원을 높이 평가했다.
정 회장의 인생사를 담은 〈이봐, 해봤어?〉의 저자 박정웅씨는 정 의원의 인간적인 한 단면을 소개했다. “정몽준씨는 너무나 소탈하고 인간적인 면이 많은 사람이다. 그가 유학시절의 내게 한 말이 있다.
‘세상에서 자장면이 제일 먹고 싶다’고 말이다. 돈이 많은 집안의 아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장면을 좋아했다. 지금도 그는 그때와 동일하게 말하고 있다. 정 의원은 상황이 바뀌었다고 말을 바꾸는 사람이 아니다.”
박씨는 생모문제와 관련해 “생모가 따로 있다고 해서 그의 인간성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면서 “그 스스로가 그 문제를 밝히겠다고 하지만 자신에게는 너무나 아픈 부분이다”고 전했다. 그는 21세기를 살아가는 현 시점에서 적자•서자 논란은 적절치 않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정 회장의 가족문제를 잘 아는 한 스님은 “이미 고인이 된 분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면서 “정 의원 자신의 개인문제로 다른 사람이 먼저 말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말했다.
〈돈 황제〉를 쓴 백시종씨도 “그냥 덮고 지나가도 정 의원의 대권도전과는 무관한 문제”라는 견해를 밝혔다. 출생문제와 관련해 정 의원과 관련 있는 것으로 알려진 한 인사는 “세상을 살다보면 이런저런 일도 다 있다.
출생문제는 자신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그 부분에 관한 한 그냥 놔두는 것이 그를 돕는 일”이라고 말했다. 백승구 기자 eagl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