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빛 돌려차기’로 새로운 장벽 ‘빠샤’
▲ IOC 선수위원에 도전하는 문대성. 그는 유명세보단 누가 가장 열심히 뛰어다니느냐에 따라 승패가 결정된다며 강한 자신감을 피력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2008 베이징올림픽에 참가하는 1만5000여 명의 선수들을 상대로 선거 운동을 벌일 예정인 문대성은 출국 전, 태릉선수촌과 축구대표팀이 훈련 중인 파주트레이닝센터, 그리고 체육계 관계자들을 만나러 다니면서 빡빡한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었다. 오래 전부터 스포츠행정가를 목표로 세웠던 터라 그의 행보가 당연한 수순처럼 보이지만 혼자서 그 모든 과정을 감당하고 진행하고 추진하는 부분들이 새삼 남다른 그의 아우라를 실감케 한다.
워낙 대단했던 유명세 탓에 아테네올림픽 이후 크고 작은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던 문대성은 <일요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그동안 자신을 둘러싼 오해와 루머들에 대해 속 시원한 입장을 밝혔다.
▶▶▶ 4년 전의 ‘문대성 신드롬’
“얼마 전에 대한체육회에 인사차 들어갔더니 분위기가 다소 냉랭하더라고요. 이상하다 싶어서 아는 분께 여쭤봤더니 저에 대한 이미지가 별로 안 좋다는 거예요. 4년 전 아테네올림픽 이후에 벌어진 일들 때문이었어요. 그때 스케줄이 너무 많아서 매니지먼트사와 따로 계약을 맺고 모든 스케줄을 거기서 조정했었거든요. 그런데 당시 대한체육회 관계자 한 분이 무슨 일 때문에 저에게 전화를 하셨다가 ‘매니저와 상의해 달라’는 대답에 굉장히 언짢으셨나봐요. 그 후로 체육회 내부에서 제 이미지는 완전 엉망이 됐던 거죠.”
선수와의 직접 접촉에 익숙했던 체육회 관계자들 입장에선 당시 문대성의 반응에 당황했을 게 틀림없다. 4년 전 문대성과의 인터뷰는 하늘의 별 따기나 마찬가지였다. 매니저가 휴대폰 2개를 들고 다니면서도 폭주하는 통화량을 감당 못했을 만큼 그의 주가는 치솟았다. 오죽했으면 ‘문대성 신드롬’이란 말이 나왔을까. 당시 문대성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런 현상들에 대해 ‘다 거품일 뿐’이라며 애써 폄하했었다. 그 후로 TV 출연이나 인터뷰를 꺼리게 됐다는 그는 이번 인터뷰에도 어렵게 나왔다며 웃음을 지어 보였다.
▶▶▶ 은퇴 후 선수로 복귀
2007년 6월 20일, 문대성은 전격 선수 복귀 선언을 한다. 공식 발표를 하기 전부터 강도 높은 체력 훈련에 들어갔던 문대성은 기자회견까지 열고 자신의 현역 복귀 사실을 기정사실화했었다. 문대성의 선수 복귀를 두고 태권도계에선 찬반양론이 분분했다. ‘기량이 녹슬었을 것이다’ ‘후배들 자리를 뺏는 거나 마찬가지다’ ‘침체한 태권도를 끌어올리기 위해선 문대성이 필요하다’ ‘충분히 도전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 등등의 얘기들이 나오면서 문대성에게 비난과 응원이 엇갈렸다.
문대성은 주위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전국대회 4강에 오르며 당당히 국가대표선발전 출전 자격을 얻었지만 최종대표선발전에 불참하며 올림픽 2연패의 꿈을 접었다. 그 이유가 궁금했다.
문대성은 선수 복귀를 준비하면서 굉장히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회상한다. 이전에는 선수 생활에만 집중했지만 교수와 감독을 겸한 상황에서의 선수 복귀는 운동과 강의와 학교 생활을 병행하는 상태라 온전히 훈련에만 전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첫 경기를 치르기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 부정적인 시각으로 선수 복귀를 지켜본 태권도 관계자들이 첫 경기를 무사히 치러내자 더 이상 태클을 걸지 않았다는 설명도 덧붙인다.
“몸이 둔하고 생각처럼 움직여지지 않더라고요. 하지만 훈련을 거듭할수록 조금씩 이전의 감각들이 살아났어요. 태권도는 다른 운동과 달리 서른 살이 넘으면서 노련미가 더해져 원숙한 플레이를 할 수 있거든요. 시늉만, 흉내만 내고 접을 생각이 아니었기 때문에 치열하게 준비를 했었는데 좀 일찍 그만두게 된 거죠. 은퇴하면서 아쉬움이 많았거든요. 그 준비 과정을 통해 어느 정도 해소는 된 것 같아요.”
▶▶▶ K-1의 유혹과 자존심
씨름을 하던 최홍만이 이종격투기 K-1으로 전업하자, 격투기 관계자들은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문대성에게 일제히 ‘꽂혀’ 있었다. 특히 입식 타격을 하는 K-1 측에서는 문대성의 인기와 가치, 상품성 등을 높이 평가하며 문대성을 K-1 선수로 ‘모셔오기’ 위해 혈안이 됐다.
그러나 문대성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돈과 명예의 갈림길에서 명예를 택했고 명예를 선택한 이후론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때 말들이 많았잖아요. 제 몸값으로 수십억 원이 제시됐다는 등 하면서. 그러나 실제 K-1 측에서 제시한 금액은 알려진 것보다 훨씬 작았어요. 물론 돈이 적어서 안 간 건 아니지만요. 일본에서 최홍만 선수가 뛰는 경기를 직접 본 적도 있어요. 그런데 K-1 선수들의 움직임이 무척 느리더라고요. 선수들 움직임이 다 파악이 될 정도예요. 흑인 선수 중에 발차기로 유명한 선수가 있죠? 그런 발차기는 태권도 고수들의 발차기와 품질이 달라요. 지금 K-1에서 활약 중인 태권도 출신의 박용수 선수는 체력을 키울 필요성이 있어요. 체력이 달리니까 스텝이 안 되거든요. 태권도 도복 입고 링 위에 오르려면 도복에 대한 책임감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문대성은 태권도 출신이라는 타이틀에 대해 굉장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어릴 때 덩치 큰 친구들에게 얻어맞고 다니는 것을 보다 못한 어머니의 강권에 못 이겨 태권도 도장을 찾았던 것이 태권도 선수 문대성을 만들었다는 그는 태권도 선수로, 교수로, 감독으로 살아온 인생역정들이 태권도에 대한 자부심을 책임감으로 승화시켰다고 설명했다.
문대성이 IOC 선수위원에 도전하는 가장 큰 이유는 한국 스포츠 외교 문화의 가교 역할을 하고자 하는 거시적인 야망도 있지만 작게는 엘리트 체육을 국민 생활 체육에 자연스럽게 접목시킬 수 있도록 시스템을 구축하려 함이다.
“선진 문화의 체육 정책과 비교를 하면 우리나라 선수들은 ‘기계’나 마찬가지예요. 기계가 제대로 작동될 때는 열심히 사용하다가도 그 기능을 충실히 하지 못하면 폐기처분되잖아요. 선수도 마찬가지거든요. 엘리트 체육을 하던 선수들이 그 좋은 능력을 버리지 말고 국민들의 생활 체육을 위해 재활용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 방법들을 연구 개발해서 우리나라 스포츠 정책이나 문화가 더욱 업그레이드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싶어요.”
정치권의 선거처럼 후원금을 모집하거나 선거자금이 지원되는 상황이 아니라 문대성은 사비를 털어 선거 운동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경제적인 부분이 마이너스로 치닫는 것 같다며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리는 그는 신문이 나오기 전인 28일, 중국 칭다오로 출국한다. 칭다오에서 해상훈련 중인 요트 및 조정 경기 선수들을 만나 득표 활동을 하기 위해서다.
문대성과 함께 IOC 선수위원에 도전하는 후보들은 수영의 그랜드 해켓(호주), 여자 테니스 세계 1위였던 쥐스틴 에냉(프랑스), 마라톤 스타 폴 터갓(케냐) 등 총 31명이다. 다행이라면 남자 육상 110m 허들 세계기록 보유자인 개최국 중국의 류시앙이 출마를 선언했다가 포기했다는 부분. 2000년 이은경(양궁)을 시작으로 전이경(쇼트트랙), 강광배(루지 봅슬레이)가 IOC선수위원에 도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그러나 문대성은 강한 자신감을 피력했다.
“처음엔 반신반의했어요. 경쟁자들이 너무 쟁쟁했으니까요.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자신감이 생기더라고요. 아테네올림픽 때 무명의 이집트 선수가 아테네 광장에서 땡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 선거 운동을 한 덕분에 당당히 선수위원에 뽑힌 적이 있었거든요. 득표는 유명세보단 어느 누가 가장 열심히 뛰어다니면서 자신을 홍보하느냐에 따라 달려 있어요. 제가 내세운 슬로건이 ‘Pure Powerful Peaceful’이거든요. 한국 선수들이 적극적으로 지원해 줄 것이라고 믿어요. 일단 시작했으니까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