앉아서 죽느니 박차고 나가 새살림?
▲ 김근태 당의장(왼쪽), 정동영 전 의장 | ||
북핵 사태가 자칫 내년 대선의 핵심 이슈로 부상할 수도 있는 상황인데다 연말을 전후한 정계개편 과정에서도 북핵 해법에 따른 시각과 대응 방식에 따라 정치권 이합집산이 이루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됐다. 여권 내 차기 대권주자들이 북핵사태와 관련해 노무현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우거나 또 나름대로 독자노선을 걷고 있는 것도 이러한 가능성과 무관치 않다. 노 대통령과 참여 정부는 미국의 압력과 국제 사회의 분위기에 따라 유엔의 대북 제재에 동참한다는 기본 입장을 천명하고 있지만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 등 열린우리당의 대권 주자들은 대체적으로 대북 포용정책 기조를 유지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대권 주자들 사이에도 어느 정도 온도차를 보인다.
이에 따라 한동안 잠잠했던 당청갈등도 재점화될 조짐마저 일고 있다. 친노세력 일각에서는 국내 정치문제도 아니고 국민의 생명과 직결될 수 있는 대북문제를 놓고 제 정파들이 엇갈린 견해를 펼치고 있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차라리 헤어지자”는 볼멘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을 정도다. 또한 퇴임 후 지금까지 국내 정치에 일절 관여하지 않았 던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자신의 최대 치적으로 평가받고 있는 ‘햇볕정책’의 당위성과 정당성을 설파하면서 현실정치에 뛰어들고 있어 그 파장도 만만치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북핵 파문이 노 대통령과 DJ, 그리고 여권 내 차기주자들의 엇갈린 대권 셈법과 맞물리면서 정계개편을 부추기는 화약고로 부상하고 있는 형국이다.
“위기는 곧 기회다.” 북한 핵실험 파문 이후 정동영(DY) 전 열린우리당 의장과 김근태(GT) 열린우리당 의장 진영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소리다.
DY와 GT는 열린우리당의 최대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유력한 차기주자로 분류되고 있지만 당내 입지 및 대권 형세가 녹록지 않은 게 현실이다. 한 자리수 지지율은 답보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고 친노세력의 압박도 갈수록 거세지고 있다. 여기에 열린우리당이 내년 대선후보를 완전개방형 국민경선제(오픈프라이머리)로 선출키로 결정함에 따라 두 사람은 모든 기득권을 포기해야 하는 위기상황에 몰려 있다. 일부 친노세력들은 ‘DY GT 불가론’을 주장하며 정권재창출을 위해 두 사람 모두 대권 욕심을 버려야 한다고 압박하고 있다.
이처럼 대권레이스에서 중도 탈락할 위기에 몰려 있었던 두 사람에게 이번 북핵 파문은 새로운 전기가 되고 있다.
두 사람은 미국의 압력으로 일단 유엔의 제재조치를 받아들인 정부 측 입장과는 달리 대북 포용정책 기조를 유지해야 한다는 스탠스를 고수하고 있다. 북핵 위기 해법을 둘러싼 당내 보혁 갈등이 가시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중도와 개혁세력을 모두 끌어안겠다는 포석으로 풀이된다. 또한 DJ가 북핵 파문 이후 현실정치로 뛰어든 만큼 호남과 민주세력을 결집시키는 대권 전략도 내포돼 있는 것으로 관측된다.
당 의장 취임 이후 노 대통령과 맞섰다가 번번이 판정패를 당한 GT 입장에서 이번 북핵 사태는 위기이면서 동시에 대권주자로서 입지를 다질 수 있는 기회라고 보고 있는 듯하다.
그동안 ‘뉴딜 정책’ 등을 통해 중도 보수권을 끌어들이려는 몸짓을 보여주기도 했던 GT는 이번 사태로 청와대와도 선을 그으면서 기존의 지지세력인 진보 세력을 하나로 묶기 위한 행동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북핵 파문을 계기로 그동안의 모색기를 마치고 확실한 노선정립기로 삼겠다는 모습이다.
GT는 청와대와 정부가 북한 핵실험에 따른 대응조치로 PSI(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 참여 입장을 밝히자 ‘PSI 불가’ 원칙을 천명하며 노 대통령과 선 긋기를 시도하고 있다. 지난 20일에는 당내 논란에도 불구하고 개성공단 방문을 강행했다. GT는 이날 출발 성명을 통해 “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사업이 한치 흔들림 없이 지속돼야 한다는 사실을 국제사회에 명확히 알리기 위해 개성공단을 가는 것”이라며 개성 방문 배경을 설명했다.
이와 관련 GT계인 열린우리당 한 초선의원은 20일 기자와 전화통화에서 “북핵 대응과 관련한 GT의 차별화된 행보 이면에는 다목적 카드가 숨겨져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 의원은 “우선 노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워 그동안 위축됐던 위상을 되찾겠다는 강한 의지가 담겨 있고 동시에 ‘햇볕정책을 근간으로 한 대북 포용정책 유지’ 입장을 분명히 함으로써 진보 세력과 DJ를 정점으로 한 호남권 민심을 다잡겠다는 포석도 깔려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지난 1일 독일에서 귀국한 후 정치 외연 확대를 위해 고심해 온 DY도 북핵 파문이 새로운 행동의 시발점이 되고 있다. 대북정책을 총괄한 전직 통일부 장관 출신으로 당장은 야권의 책임론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는데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면담한 대북통임을 자임하고 있는 그로서는 이 문제를 외면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DY로서는 북핵 문제가 잘하면 자신의 이미지를 높일 수 있는 계기이기도 하지만 자칫하면 누구보다 깊은 상처를 입을 수 있는 처지이기도 하다. 노 대통령과 정부의 입장이 선회할 움직임이 보이자 DY가 “포용정책 근간은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어선 안 된다”면서도 포용정책 유지에 강경한 입장을 보이는 GT와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도 이러한 입장과 무관치 않다.
정치적 언행도 심상치 않다. DY는 얼마전 모 언론사와의 인터뷰를 통해 “열린우리당 창당은 시대정신을 담고 있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며 ‘열린우리당 실패론’을 거론해 당내 논란을 야기하기도 했다. 또 지난 16일에는 서울 삼성동 ‘법무법인 아주’ 사무실에서 열린 추미애 전 의원 대표 취임식에 참석해 추 전 의원과 덕담을 주고 받기도 했다. 참여정부를 탄생시킨 주역이었던 두 사람의 회동은 옛 민주당 분당 과정에서 길을 달리한 이후 3년 반 만에 처음으로, 정치권에선 혈액형이 같은 두 사람이 향후 정치권 새판짜기가 본격화 될 경우 호남과 범민주세력 재결집을 명분으로 공조 내지는 연대를 모색할지 여부에 주목하고 있다.
친노세력이 지원하고 있는 예비 잠룡으로 분류되고 있는 천정배 의원도 북핵 해법과 관련해서는 노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천 의원은 11일 당 홈페이지에 올린 칼럼을 통해 “북한의 핵실험 사태를 불러온 것은 포용정책 때문이 아니라 참여정부 대북정책의 일관성 부족 때문”이라며 오히려 GT보다 강경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천 의원은 또 13일 열린우리당 소속 의원 77명이 서명한 ‘PSI 확대 참여에 반대하고 정부가 포용정책 기조를 흔들림 없이 유지해야 한다’는 내용의 성명서에도 동참했고 20일 GT의 개성 방문에도 동행했다.
그런가 하면 김한길 원내대표는 GT의 개성 방문에 대해 반대 입장이다. 김 원내대표는 “당의장의 중요한 일정에 대해서는 지도부와 사전에 상의했으면 좋겠다”는 말로 우회적인 불만을 표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현재 북핵 문제는 여권 내 주자들의 다양한 입장들에 대한 리트머스 시험지가 되고 있는 양상이다. 그동안 정치 경제 문제와 관련 비슷한 목소리를 내온 여권 인사들이 나름대로 온도차를 느끼게 할 만한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이와 관련 여권의 한 중진의원은 “여권 내 차기주자들이 북핵 사태를 계기로 노 대통령과 다른 정치적 색깔과 정체성을 보여줌으로써 현 정부와의 차별화 전략을 통한 전통적 지지층 끌어안기를 시도하고 있는 것 같다”며 “더구나 열린우리당의 모태가 옛 민주당이고 든든한 지지층은 DJ를 정점으로 한 호남세력이라는 점을 감안해 호남권 민심잡기 차원에서 DJ가 평생 업적으로 삼고 있는 햇볕정책을 옹호하는 행보를 보이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선거기획통으로 잘 알려진 이 중진의원은 또 “북핵 위기정국이 장기화되고 그 해법에 대한 여권 내 중지가 모아지지 않을 경우 여권 핵분열은 불가피 할 것”이라며 “차기주자 진영이 현 정부의 대북정책과 일정한 선을 긋고 있는 이면에는 정치권 새판짜기에 대비한 사전 정지작업 수순일 것”이라고 분석했다.
현 정부의 대북정책 기조와 차별화 전략으로 선회한 여권 내 차기주자들의 동조 움직임을 감지한 친노세력들의 견제도 만만치 않다.
‘헤쳐모여식 정계개편’에 반대하면서 열린우리당 사수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친노그룹은 DY의 ‘열린우리당 실패론’ 주장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당내 대표적인 친노의원 모임인 참여정치실천연대(참정연) 상임대표인 김형주 의원은 18일 참정연 홈페이지 칼럼을 통해 “정 전 의장은 정치는 그만두고 철거 전문회사에 취직해야 맞는 것은 아닌가”라며 DY의 ‘창당 실패론’을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그런가 하면 20일 개성공단 방문을 강행한 GT의 행보와 관련해서도 친노 의원들은 “GT가 당 지도부와 사전협의 없이 개성 방문 결정을 내렸다”며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개인의 대권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자충수를 둔 것”이라며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친노파인 정장선 의원은 얼마전 모 월간지와 인터뷰를 통해 “앞으로 진행될 정계개편의 연착륙을 위해서 정동영 김근태 두 분은 대선 불출마를 선언해야 한다. 두 분은 정계개편이 잘 성사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해 또다른 논란을 예고하고 있다.
또 일부 강경파 친노세력들은 “차기주자들이 위기에 처한 노 대통령과 정부 정책에 도움은커녕 분열만 야기하고 있다”며 “이럴 바엔 차라리 헤어져 제 갈 길을 가는 게 낫다”는 격한 주장을 내놓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DJ의 행보도 관심을 끌고 있다. 정치권 관계자들은 DY 추미애 등 범여권 정치권 새판짜기 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할 유력 인사들이 북핵 해법과 관련해 약속이나 한 듯 ‘DJ 노선’을 지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여권 내 일부 세력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는 범여권 통합론과 맞물려 이들 인사들이 북핵 등 대북정책을 매개로 노 대통령과 친노세력을 배제한 통합론에 동조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관측이다.
북한 핵실험은 참여 정부의 대북 정책에 대한 시련인 동시에 대권주자들에게도 하나의 시험대가 되고 있어 앞으로 북한이 추가 핵실험을 하고 유엔 안보리의 제재 수위가 높아질수록 여권 내 차기주자들 간의 정계개편 방향 및 대선정국을 겨냥한 노선 싸움은 더욱 치열하게 전개될 전망이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