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전사 자리 제가 예약합니다”
▲ 암흑 같은 긴 터널을 빠져 나와 고속 질주를 하고 있는 추신수. 그는 아직 갈길이 멀다며 겸손함을 보였다. 홍순국 메이저리그 사진 전문기자 | ||
전날 팀은 승리를 챙겼지만 추신수는 5타수 무안타를 기록하는 바람에 한창 불을 지피던 그의 타율이 조금 주춤했는데 추신수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12경기 연속 안타 행진 마감). 요즘 너무 잘나가는 것 아니냐는 인사말에 추신수는 “아직 멀었는데요”라며 멋쩍은 웃음을 흘려보낸다.
지난해 왼쪽 팔꿈치 수술을 받고 암흑 같은 재활의 과정을 거쳐 온 그로선 지금의 상승세가 조금 다행이긴 하지만 크게 만족하는 수준은 아니라고 한다. 그 이유를 들어봤다.
아직 멀었다!
“생각보다 괜찮다, 뭐 이 정도지 아주 잘하거나 몹시 좋은 성적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물론 수술하고 나서 좋은 성적을 내니까 고무적이긴 해요. 그래도 최상은 아니에요.”
추신수는 앞날을 내다봤을 때 지금의 성적으론 어림 반푼어치도 없다고 단정 지어 말했다. 한국의 언론에선 추신수의 쾌속 질주에 다들 감탄사를 연발하면서 연일 그 배경과 급성장세의 이유를 찾는 데 반해 정작 당사자는 담담하다 못해 못마땅한 반응을 나타내는 게 이색적으로 보였다.
“지금이야 수술 이후에 맞는 첫 시즌이니까 괜찮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아직도 내가 갖고 있는 실력의 100%가 나오질 않았어요. 연습할 때나 배팅할 때는 홈런도 치고 2루타 3루타도 날리는데 정작 게임에 들어가면 그게 잘 안 돼요. 내가 갖고 있는 파워에 비해 홈런이 잘 안 나오거든요. 그렇다고 홈런에 연연해하는 건 아니구요. 그냥 뭔가 부족한 듯한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네요.”
수술 후의 시간들
추신수는 지난해 태어나서 처음으로 수술대에 올랐다. 부상도 처음이었고 그 부상으로 수술받은 것도 처음이었다. 더욱이 올림픽 예선전을 앞두고 수술과 대표팀 참가를 놓고 오랜 동안 고민과 갈등의 시간들을 보냈기 때문에 수술을 결정한 뒤 심하게 가슴앓이를 해야만 했다.
마음이 땅을 닿지 못하고 떠돌다보니 재활하는 과정들이 힘들고 조급함만 가중됐다고 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선수들 사이에서 ‘왕따’가 되는 듯한 느낌에 몸 만드는 일이 버겁기만 했다. 하지만 조금씩 아픔이 가시고 몸이 회복되기 시작하자 몸은 물론 마음의 병까지 가시는 것 같았단다.
“서서히 캐치볼을 시작했는데 간간이 통증을 느낄 때가 있어요. 그러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요. 마치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지금 생각해보면 좀 여유를 갖고 왔어도 되는 건데 왜 이렇게 마음을 졸였나 싶어요.”
한국야구로의 복귀?
추신수는 이전 스프링캠프에서 가진 <일요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막막한 ‘현실’ 앞에서 잠시 한국 복귀를 생각해 본 적이 있다고, 다소 충격적인 고백을 한 적이 있었다. 당시 추신수가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었던 상황을 충분히 이해했기 때문에 기자는 일부러 그 내용을 ‘작게’ 다뤘다. 확대해서 나갈 경우 마음 잡고 훈련 중인 추신수에게 부메랑이 될 수도 있다는 염려 때문이었다.
기자가 당시의 얘기를 꺼내자, 추신수는 웃으면서 “그땐 정말 한국에서 날 받아만 준다면 떠나고 싶었다”고 솔직한 심정을 내비친다.
“전 가장이잖아요. 가족들이 나로 인해 더 이상 힘들게 사는 게 싫었어요. 경제적인 부분도 그렇고, 생활의 여유도 아쉽고. 나야 야구선수이니까 미국이든 한국이든 상관없어요. 하지만 아내가 겉으론 내색하지 않았지만 힘들어 하는 게 보였거든요. 정말 강한 여자인데, 그런 여자가 저 정도로 힘들어한다면 내 꿈이고 뭐고 가족을 위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어요. 나중에 와이프한테 ‘(하)원미야, 우리 한국 갈까?’라고 말했다가 엄청 혼나기만 했어요. 자신은 더 고생할 자신있으니까 제발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말은 하지 말라며 울더라구요. 제가 다른 건 몰라도 결혼은 정말 잘한 것 같아요.”
결혼 전에는 야구가 추신수 인생의 전부였다. 그러나 지금은 야구보다 더 중요한 존재들이 있다. 바로 아내와 아들이다. 그래서 그들이 행복하게 사는 걸 소원했고 그 소원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야구장에 출퇴근하지만 미래가 불투명한 그때에는 몸은 물론 마음까지 약해졌던 추신수였다.
“아내와 난 서로 불쌍해해요. 고생한다며 서로 부둥켜안고 울기도 하구요.”
아! 올림픽! 그리고 군대
추신수에게 가장 미안한 질문이었다. 올림픽대표팀에 선발될 수 있었지만 팔꿈치 수술로 포기해야 했던 그한테 이번 베이징올림픽에서의 금메달 획득은 엄청난 기쁨이면서 심한 아픔으로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군대 얘기를 꺼내자마자 추신수의 반응이 차갑게 다가온다.
그래도 그의 속내를 듣기 위해선 알면서도 베이징올림픽을 지켜본 심경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기자의 집요함과 짓궂음에 가볍게 항의를 하던 추신수가 다음과 같이 털어 놓는다.
“금메달로 병역 혜택 받은 선수들, 정말 부러워요. 너무 너무 축하해줄 일인데 조금은 질투나는 것도 사실이에요. 어쩌겠어요. 제 운명이 이것밖에 안 되는 것을. 팀에서 보내준다고 했을 때는 한국에서 절 부르지 않았고, 한국에서 절 필요로 할 때는 메이저리그에 포함돼 팀에서 보내줄 수가 없었고…. 제 팔자죠 뭐. 앞으로 벌어지는 WBC나 아시안게임에 제가 뛸 자리가 있다면 한으로 남아 있는 태극마크 달고 뛰고 싶어요.”
마음은 아파도 추신수는 올림픽 동안에 어깨에 힘 잔뜩 주고 다녔다고 한다. 한국대표팀이 미국은 물론 일본, 쿠바까지 물리치고 금메달을 따, 동료 선수들에게 ‘심하게’ 자랑을 했던 것이다.
“미국이 한국팀에 진 다음 날 라커룸에서 선수들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미국, 진짜 경기 못하더라’라고. 그랬더니 선수들이 흥분해서 ‘올림픽에는 마이너리그 애들이 참가해서 실력이 떨어진 것이다’라고 반응하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그랬죠. ‘그럼 지난 번 WBC 때 미국이 한국에 진 건 뭐냐? 그땐 메이저리그 선수들이 참가했는데도 졌거든’. 선수들이 할 말 없어 하더라구요. 야구는 절대 강자도, 절대 약자도 없어요. 우리가 미국엔 강한 면모를 보이다가도 중국과의 경기에선 내내 끌려가는 인상을 줬잖아요. 그래서 ‘야구는 속을 알 수 없는 게임’이란 말도 나오는 거죠.”
연봉, 대박 꿈꾼다!
추신수는 지금까지 메이저리그 최저 연봉을 받고 있다. 풀타임으로 3년을 뛰어야 연봉 조정 신청 자격이 주어진다. 내년 시즌이 지나야 추신수는 그 대상이 된다. 벌써부터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부풀어 오른다고 한다.
“지금까지 이런저런 운도 안 따르고 힘든 시간들도 많았지만 내년 시즌까지 메이저리그에서 뛰면 말 그대로 빅리거 다운 연봉을 받게 돼요. 그땐 ‘대박’ 한 번 터트릴 거예요. 설마 제 인생이 매번 꼬이기만 하겠어요?”
2008년 시즌도 얼마 남지 않았다. 시즌을 마치고 주변 정리를 한 다음 귀국할 예정이라는 추신수는 “한국에서 술 한잔 해요. 이번엔 소주 말고 와인으로 하시죠. 와인이 은근히 취하면서도 뒷끝이 없더라구요”라며 인사를 건넨다. 그리고 이런 말을 덧붙인다.
“제가 잘할 때나 못할 때나 변함없는 관심을 보여주셨으면 좋겠어요. 좀 전에 아내랑 통화를 했는데 어제 경기에서 안타를 못 쳤다고 또 한국 매스컴에서 부정적인 기사가 나왔다고 하더라구요. 지금까지 계속 좋았는데, 계속 안타 치고 타점 내고 좋았는데, 한 번 못 했다고 부정적인 기사를 쓰시면 정말 너무 하는 거 아닌가요? 그래선 전 인터넷 잘 안 봅니다.”
암흑 같았던 긴 터널을 빠져 나와 고속도로를 질주하고 있는 추신수. 그러나 그 고속도로가 영원히 존재하지 않을 거란 사실은 그 자신이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고속도로와 갓길을 넘나들면서도 목표를 향한 방향성을 잃지 않으리란 믿음이 있기에 추신수의 ‘달리기’에 ‘찐한’ 응원을 보낸다. 선수들 사이에서 ‘추야’로 통하는 추신수의 ‘추추 트레인’은 오늘도 무조건 ‘고우!’다.
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