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난 자식도 못난 자식도 ‘천덕꾸러기’ 신세
▲ 2006년 맥도널드LPGA에서 우승한 박세리.(위) KTF와 재계약 당시의 김미현. | ||
어느 골프전문가가 사석에서 내놓은 화두다. 그만큼 직업 골프선수들에게 타이틀스폰서, 즉 소속사가 중요하다는 의미다. 기본적으로 성적이 좋으면 상금이 많고, 또 미디어의 주목을 받고, 홍보효과가 뛰어난 까닭에 스폰서도 이쪽으로 쏠린다. 당연히 부익부빈익빈 현상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거품경제의 버블이 꺼지듯 최근 한국이 자랑하는 여자골프에서 ‘타이틀스폰서 대란’이 발생할 조짐이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프로골퍼들의 타이틀스폰서 세계를 취재했다.
박세리는 고등학교 3학년이던 1995년 10월 계약금 8억 원에 연봉 1억 원이라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삼성과 계약을 맺었다. 계약기간도 무려 10년이었다.
그러나 박세리는 2001년 말 삼성과 재계약에 실패했다. 워낙 국민영웅이었던 까닭에 70억, 100억 등 천문학적인 숫자가 오간 끝에 삼성이 박세리의 요구를 맞추지 못했다고 하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2002년 거의 전부를 무소속으로 지내던 박세리는 그 해 말 한국 골프역사에 기념비적인 계약을 체결했다. CJ로부터 연간 최대 30억 원(계약기간 5년)이라는 초특급 후원계약을 끌어낸 것이다. 물론 30억 원 중 10억 원은 성적에 따른 인센티브다.
하지만 20억 원만 해도 엄청난 액수다. 이것이 기준이 돼 김미현은 이후 KTF와 재계약을 하면서 연간 10억 원을 받게 됐다. 더욱이 한희원(휠라코리아) 박희정(CJ) 등이 ‘박세리 효과’에 힘입어 미LPGA 카드만 있으면 3억 원 이상은 쉽게 받아내는 몸값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박세리는 심지어 용품회사(서브스폰서)인 테일러메이드로부터 3년간 연간 10억 원을 받기도 했다.
타이틀스폰서는 경제적 관심 외에 ‘자존심’ 측면도 있다. 올해 US오픈 우승 후 SK텔레콤과 계약한 박인비는 “모자에 마크가 없는 선수 입장에서 스폰서를 가진 선수를 보면 얼마나 부러운데요. 여기에 회사 관계자가 미국으로 와서 밥도 사고 그렇게 해봐요. 돈을 떠나서 심리적으로 영향이 정말 커요”라고 말했다.
골프 스폰서 시장에 찬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은 2005년부터다. 미LPGA에서 뛰는 한국선수가 폭증했고, 이에 따라 희소성이 크게 떨어졌다. 예컨대 신문에서 ‘미LPGA 어떤 대회에서 누가 우승했다’고 해도 더 이상 큰 뉴스가 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먼저 2005년 말 김미현은 KTF와 재계약하면서 큰 손해를 봤다. 일단 고정된 후원금이 연간 10억 원에서 3억 원으로 70%나 줄었다. 물론 줄어든 액수만큼 인센티브를 강화했지만 스폰서 시장의 찬바람을 대표적으로 표현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김미현은 2007년의 경우 한국선수 중 가장 높은 상금랭킹(4위)에 오르며 약 9억 원의 인센티브를 챙겨 ‘배보다 배꼽이 큰’ 상황을 만들었다. KTF는 3년 계약의 만료를 앞둔 최근 아예 “계약연장은 없다”고 강수를 두었다.
▲ US오픈에서 우승한 박인비.(왼쪽) 2008년 브리티시오픈에서 우승을 한 신지애. | ||
이렇듯 버블이 꺼지자 아주 낮은 수준에서 시장가가 형성됐다. 미LPGA의 경우 1억 5000만 원에서 3억 원 수준이고, 국내는 심지어 2000만 원부터 1억 5000만 원까지 편차가 더 심하다. 계약기간도 10년, 5년짜리는 거의 없고 대부분 1~3년이다. 이렇게 확 줄어든 스폰서 지원도 그나마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를 지경이 된 것이다.
당연히 타이틀스폰서가 없는 선수들은 경제적으로 큰 고통을 겪고 있다. 말이 프로지 마이너스 살림살이를 보충하기 위해 국내 선수는 레슨이나 각종 행사에 찬조 출연하기에 바쁘다. 미LPGA 선수들도 공식 프로암대회는 물론이고, 몇 백 달러의 용돈이 주어지는 각종 비공식 프로암에도 부지런히 출전한다.
IB스포츠에서 골프를 담당하고 있는 김명구 국장은 “유명한 선수 한 명에게 20억 원을 줄 바에는 실력 있는 신인급 선수 10명에게 2억 원씩 후원하는 게 좋다. 요즘 대부분 국내기업이 이렇게 생각한다. 워낙 한국과 미LPGA의 기량차가 없기 때문에 10명 중 두세 명만 성공해도 홍보 측면에서 큰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했다. 김 국장은 “더욱이 최근 세계 금융위기로 인해 한파가 몰아닥치고 있다. 올해 말 타이틀스폰서 구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가 될 가능성이 높다”라고 우려를 나타냈다.
소속선수가 14명으로 국내 최대 여자프로골프단인 하이마트(2002년 창단)는 ‘신지애 딜레마’에 빠져 있다. 국내파이면서도 미LPGA 메이저대회(브리티시여자오픈)를 석권할 정도로 이미 세계적인 선수가 된 신지애는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미국투어에 도전한다. 마침 올해가 3년 계약기간의 마지막 해이기도 하다. 도대체 얼마를 줘야 할지 가늠할 수 없다는 게 문제다.
하이마트의 최원석 팀장은 “신지애는 일단 우선계약 대상자다. 하이마트의 간판선수로 가능한 재계약을 한다는 것이 회사의 방침이다. 하지만 워낙 세계적인 선수가 된 만큼 금액차이가 클 수 있다. 최악의 경우 신지애를 원하는 큰 회사가 많기 때문에 좋은 차원에서 떠나보내는 것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고 설명했다. 하이마트는 공개하지 않았지만 신지애는 1억 5000만 원 수준에 계약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워낙 성적이 좋았던 까닭에 연봉의 4~5배에 달하는 인센티브가 지급됐다.
신지애가 미국에서 오초아 수준의 활약을 펼친다면 연간 상금은 200~400만 달러 수준으로 예상된다. 하이마트로서는 이름에 걸맞은 연봉은 물론이고 인센티브도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현재 하이마트는 연간 25억~30억 원 정도를 쓰고 있다.
스폰서 시장이 얼어붙다 보니 못하는 선수는 성적이 나빠서, 신지애 박세리 김미현 같은 스타플레이어는 금액을 맞추지 못해서 ‘스폰서 대란’이 벌어지고 있다.
유병철 스포츠전문위원 einer@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