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대, 국대 어깬 무거워도 다린 가볍당께
▲ 사랑과 관심을 받을수록 부담보단 자극제가 된다는 기성용. 그는 축구나 사생활이나 흠 잡을 데 없는 진정한 엄친아이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지난 5일, 구리챔피언스파크에서 만난 FC서울의 뉴아이콘 기성용(20). ‘그라운드의 엄친아’로 불리는 그는 탁월한 말솜씨와 남다른 겸손함, 그리고 신세대다운 도발적인 사고로 ‘누나’도 안 되고 ‘이모’뻘인 기자의 감정선을 넘나들었다. 비록 나이는 어려도 사고의 높낮이는 결코 어리게 볼 수 없는 ‘범생이’ 기성용과의 리얼토크를 소개한다.
기성용을 인터뷰한다고 하자 주위의 반응이 더 뜨거웠다. ‘정말 축구 잘한다’ ‘지난 번 이란전 보고 축구를 더 좋아하게 됐다’ ‘어리고 잘생긴 선수가 축구도 잘하더라’ ‘여자친구는 있나’라며 난리법석이 벌어졌던 것. 기자가 이런 반응을 전하자 기성용은 “난 관심을, 사랑을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더 잘하고 싶다. 부담보단 더 자극제가 돼서 기분 좋다”며 환한 미소를 보인다.
▲ 캐리커처=장영석 기자 zzang@ilyo.co.kr | ||
기성용은 소속팀인 FC서울은 물론 U-20청소년대표팀, 올림픽대표팀, 그리고 성인대표팀에서 모두 주축 선수로 활약했거나 활약하고 있다. 한마디로 오라는 데도 많고 갈 데도 많다. 이렇다보니 시즌이 시작되면 항상 나오는 단어가 ‘혹사’. 더욱이 월드컵 최종예선전을 치르고 있는 성인대표팀과 홍명보 감독이 이끄는 청소년대표팀은 기성용의 존재가 절실하다.
“아직은 나이도 어리고 젊어서 체력적인 부담이 크진 않은 편이다. 그러나 대표팀도 그렇고 소속팀의 일정이 굉장히 빡빡하다. 특히 AFC챔피언스리그도 있기 때문에 솔직히 정신이 하나도 없다. 이럴 때 관리를 잘 못하면 부상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 날 필요로 하는 팀이 많은데 그에 걸맞은 활약을 못하면 팬들에게 실망을 안겨줄지도 모른다. 그래서 매일 긴장의 연속이다. 준비를 잘 하고 노력한다면 게임이 많아도 충분히 다 소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성용은 이전 올림픽대표팀에서 코치로 인연을 맺은 청소년대표팀의 홍명보 감독에 대해 기대감을 드높였다.
“올림픽대표팀 마치고 가끔 전화를 드리곤 했는데 이젠 감독님이 되셔서 함부로 연락하기가 좀 그렇다. 1년 넘게 홍 감독님과 올림픽팀에서 생활하며 그 분의 존재감을 새삼 절감할 수 있었다. 나한테는 너무나 ‘큰 분’이신데 올림픽에서 많은 빚을 진 것 같다. 그래서 청소년대표팀이 치르는 U-20월드컵대회나 그 후 런던올림픽에서라도 그 빚을 만회하고 싶다.”
기성용은 성인대표팀에서 주전으로 뛰었다고 해서 청소년대표팀에서도 당연히 주전이 되리라곤 생각하지 않는다고 못 박았다. 조금이라도 나태하고 불성실하면 바로 다른 선수들이 그 자리를 치고 들어온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국가대표팀에서 뛰었다고 청소년팀을 쉽게 보거나 게을리 행동하면 그 팀의 분위기가 흐트러지기 마련이다. 오히려 막내로 귀여움을 독차지했던 ‘국대’보다 ‘청대’가 더 피곤하다. 거기선 나름 고참이기 때문에 챙길 것도 많고 책임감이 더 막중해진다. 그래도 홍명보 감독님 밑에서 재미있게 훈련할 수 있을 것 같다. 감독님을 빨리 만나 뵙고 싶다.”
2006년 17세의 나이에 FC서울에 입단한 기성용. 시작은 2군이었다. 아버지 기영옥 씨(광양제철고 체육교사)의 남다른 뒷바라지 덕분에 중1 때 호주로 축구유학을 떠나 4년 동안 축구와 영어 실력을 키운 탓에 FC서울 입단할 당시만 해도 기성용은 ‘유망주’로 각광받으며 화려한 프로 생활을 하리라 기대했다.
“처음엔 욕심을 부리지 않으려고 했는데 계속 2군에 머물다 보니 1군에 올라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동기들은 하나둘씩 1군으로 올라가고 난 계속 2군에 머물다보니 좌절감이 들더라. 아마도 그때가 축구하면서 가장 힘든 시기였다고 생각한다. 그 다음 해 가까스로 1군에서 뛸 수 있었지만 이렇다 할 활약을 펼치지 못했고 결국 팀은 7위로 시즌을 마쳤다. 1군에서 뛰게 됐다고 좋아했던 게 참으로 어리석었음을 깨달았다. 지난해 비로소 내 실력을 조금씩 발휘하게 됐고 팀에도 어느 정도 기여한 것 같아 조금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시즌을 마칠 수 있었다.”
기성용의 아버지 기영옥 씨는 금호고 감독을 지내며 김태영 윤정환 고종수 등의 제자들을 양성해냈다. 광양제철고 사령탑 때는 김영광 안태은을 키워낸 전남 축구계의 거목이다. 현재 체육교사를 하며 전남축구협회 부회장 겸 대한축구협회 이사를 겸하고 있다. 아버지가 워낙 축구계의 큰 인물이다 보니 아들 기성용이 느끼는 부담감은 만만치 않을 것 같다.
“크게 힘든 점은 없다. 호주 유학도 아버지의 결단이 아니었으면 갈 수 없었을 것이다. 처음엔 유럽으로 가려다 일이 잘 안 풀려 호주로 갔다. 당시 아버지가 고생 많이 하셨다. 지금도 아버지는 게임이 끝나면 내 단점을 지적해주시는데 이젠 나도 성인이 됐고 프로 선수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말씀을 취사선택하는 편이다. 얼마전 아버지께 언론과의 인터뷰를 자제해 달라고 부탁드렸다. 난 나로서 평가받고 싶을 뿐이다.”
기성용은 지난 시즌 아버지의 제자들 중 한 선수와 그라운드에서 직접 맞붙었던 경험이 있다. 바로 지금은 은퇴한 고종수다.
“종수 형이 금호고에서 뛸 때 내가 다섯 살 정도 됐을 것이다. 그러다 처음으로 축구장에서 다시 만났는데 형이 날 보고 한 말이 ‘너 진짜 많이 컸다’였다. 애기 때 보고 처음 본 거니까 형도 신기했을 것이다.”
호주 유학 생활 덕분에 기성용의 영어 실력은 수준급이다. 지난 2월 11일 테헤란에서 열린 월드컵 최종예선 이란전이 끝난 후 믹스트존에서 외신들을 상대로 유창한 영어 실력을 뽐내며 기성용은 축구팬들 사이에서 진정한 ‘엄친아’로 인정받기도 했다.
“가족과 떨어져서 혼자 외국에서 지낸 시간들이 당시엔 굉장히 힘들었는데 지금은 그 덕을 많이 보는 것 같다. 영어는 물론이고 천연잔디에서 운동한 까닭에 키가 20cm나 컸다. 만약 한국의 맨땅에서 축구했다면 지금처럼 크지 못했을 것이다. 앞으로 해외 진출을 하게 된다면 경험과 언어 면에선 전혀 걱정할 게 없다.”
인터넷 검색을 하다 ‘기성용’을 치면 ‘기성용 여자친구’란 키워드가 저절로 뜬다. 이미 인터넷에선 기성용이 미모의 여자와 다정하게 찍은 사진들이 여러 장 나돌고 있었다. 그래서 대번 “여자친구랑은 잘 지내요?”라고 물었더니 “저, 여친 없는데요”하며 정색하고 말한다.
“인터넷에 뜬 그 사진들은 이전에 잠깐 만났던 사람이다. 지금은 정말 한 명도 없다. 솔직히 여자친구 만날 시간도 없다. 축구할 수 있는 시간은 한정돼 있다. 그래서 당분간은 축구에만 전념하고 싶다. 지금 누군가를 만난다고 해도 관리할 능력이 안 된다. 이런 걸 보면 난 아무래도 결혼을 늦게 할 것만 같다.”
소문대로 ‘애늙은이’였다. 대답 하나 하나에 빈틈이 없었다. 친구들과 놀고 싶은 유혹도 많지 않느냐는 질문에도 “저녁에 나가 놀면 다음날 운동할 때 피곤해서 짜증나요”라고 말한다. 요즘 한창 축구선수와 여자 연예인과의 열애설이 나오는 것과 관련해서도 “우연히 밥은 먹을 수 있어도 연예인이 내 여자친구가 되는 건 부담스러워요”라며 신세대답지 않은 멘트를 날린다.
기성용의 롤모델은 박지성이었다. 그래서인지 모범 답안만 내놓는 인터뷰하며 연예인에 대해 무관심한 부분, 축구 외엔 도통 재미있는 게 없는 것 같은 생활, 그리고 매사에 겸손을 달고 사는 모습은 많이 닮았고 흡사했다. 축구대표팀이 소집되는 날, 기성용은 누구보다 ‘지성이 형’을 만날 수 있어 가슴 설레고 강한 동기부여가 된다며 활짝 웃는다.
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