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도 안돼 150건…선심성·재탕·베끼기 기막혀
지난 5월 30일 국회가 개원한 후 10일도 지나지 않아 의원들이 발의한 법안은 150건을 훌쩍 넘어섰다. 하지만 법안의 내용들을 살펴보면 질보다 양에 치중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사진은 텅빈 국회 본회의장.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우선 20대 국회 1호 법안부터 논란거리다. 더불어민주당(더민주) 박정 의원(파주을)은 국회 의안과 앞에서 밤을 새며 기다린 끝에 ‘통일경제파주특별자치시의 설치 및 파주평화경제특별구역의 조성·운영과 지원에 관한 특별법안’을 20대 국회 1호 법안으로 발의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내용이 과연 1호 법안으로 적합한 지는 의문이다. 이 법안은 경기도 파주 북부에 개성공단과 대칭되는 남북경제협력형 특구(파주 공단)를 조성하자는 내용이 골자다. 당장 현실성이 없다는 얘기가 나온다. 또 박 의원 지역구인 파주에 특혜를 주려는 노골적인 지역 선심성 법안이라는 지적이다.
박명재 새누리당 의원(경북 포항남구울릉군)도 지역구를 챙기는 선심성 법안을 내놨다. 박 의원이 발의한 법안은 자신의 지역구인 ‘울릉도·독도 지역 지원 특별법안’인데 이 법안이 통과되면 향후 5년간 해당 지역구에 3000억 원가량의 예산을 투입해야 한다.
법안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포퓰리즘적인 요소가 적지 않다. 해당 법안에 따르면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울릉도·독도지역에 사회기반시설·사회복지시설 등의 설치를 우선 지원해야 한다. 학생의 수업료 지원·노후 주택 개량 지원·생활필수품 및 여객 운송지원 등이 가능하도록 하며 농림·해양·수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지원을 해야 한다. 또 울릉도·독도지역 주민의 안정적인 생활을 지원하기 위해 정주생활지원금을 지급하고, 공공요금 및 국민건강보험료를 감면하도록 했다.
그러나 박 의원 측은 법안이 포퓰리즘이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울릉도·독도 지역은 육지에서 130km 이상 떨어져 있고 연평균 80일 이상은 육지로 입·출항할 수 없는 도서 지역이라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박지원 국민의당 원내대표가 발의한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 일부개정법률안’도 지역 선심성 법안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해당 법안은 국민의당 의원 전원이 참여해 당론으로 발의됐다. 국민의당이 호남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만큼 호남 정서를 의식해 발의한 법안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법안은 5·18민주화운동을 비방·왜곡하거나 사실을 날조하는 행위를 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일부 시민단체에서는 이 법안이 헌법에 명시된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소지가 크다며 반발하고 나섰다. 또 학계에서도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비방이나 왜곡은 기존의 명예훼손죄로도 충분히 처벌이 가능한데 굳이 특별법을 따로 만드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는 반응이다. 게다가 명예훼손의 경우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는데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비방에 대해서만 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자는 것은 형평성도 맞지 않는다는 견해가 나오고 있다.
발의 법안들 중에는 재탕 법안도 적지 않았다. 개원 첫날에만 새누리당 김광림 의원(규제개혁특별법), 홍문표 의원(정부조직법개정안), 더민주 윤후덕 의원(공직선거법개정안) 등이 19대 때 발의된 법안과 자구까지 똑같은 법안을 각각 발의했다. 새누리당 홍문표, 이명수, 경대수, 이종배 의원은 노인복지청을 신설하자는 내용의 정부조직법 일부 개정안을 개원과 동시에 각자 발의해 주변을 어리둥절하게 만들기도 했다.
물론 다른 의원이 자신과 같은 내용의 법안을 준비 중이라는 사실을 몰라 발생한 해프닝일 수도 있다. 그런데 해당 법안들의 공동 발의자를 살펴보니 이명수 의원이 대표 발의를 할 때는 경대수 의원이 공동발의자로 참여했고, 경대수 의원이 발의를 할 때는 홍문표 이명수 의원이 역시 공동발의자로 참여했다. 이미 서로 똑같은 내용의 법안이 발의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았다면 서로 조율했어야 하는데 같은 날 같은 내용의 법안을 각자 발의한 것은 전형적인 법안 건수 채우기가 아니냐는 비판이다.
법안 건수 채우기로 의심되는 사례는 야권에서도 발견됐다. 국민의당 최도자 의원은 지난 3일 지방교육재정교부금법 일부 개정안을 발의했는데, 같은 날 국민의당 주승용 의원도 비슷한 내용의 법안을 발의했다. 최 의원은 지방교육재정교부금의 재원을 내국세 총액의 22.27%로 상향 조정하자고 했고, 주 의원은 25%로 상향 조정하자고 했다. 그런데 최 의원이 법안 발의를 할 때 주 의원도 공동발의자로 참여했다. 수치만 다른 비슷한 내용의 법안을 발의하면서 서로 조율하지 않고 각자 법안을 발의한 것이다.
이처럼 비슷한 법안들 중 한 법안이 통과되면 다른 법안들은 대안 반영 폐기로 처리된다. 대안 반영 폐기도 법안 가결률 실적에 포함되기 때문에 의원들이 이를 악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 국회는 국가 재정 건전성을 위해 지난 2014년부터 국회법을 개정해 법안을 발의할 때는 반드시 비용추계서를 첨부하도록 했다. 그런데 지금까지 발의된 법안을 살펴보면 비용추계서가 첨부된 법안은 10%가량에 불과했다. 이에 대해 국회사무처는 현재 예산정책처에 추계를 의뢰하고 결과를 기다리는 법안이 많아 생긴 일이라고 해명했다. 비용추계서를 첨부한 법안들을 살펴봐도 앞이 깜깜한 것은 마찬가지다. 가장 많은 예산이 드는 4건의 법안만 통과돼도 향후 5년간 3조 원에 달하는 예산이 소요될 것으로 추산되기 때문이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물론 지금까지 발의된 법안 중 상당수는 국민 실생활에 큰 도움이 될 만한 법안이었다. 이런 법안들과 실적 채우기용 법안들이 동일하게 평가된다면 입법활동 의욕이 저하될 것”이라며 “일부 실적 채우기용 법안들을 걸러낼 제도적 뒷받침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김명일 기자 mi73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