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균) 치워야 ‘문’(재인) 열린다…친노·친문 몰표
9일 국회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의원총회에서 국회의장 후보로 당선된 정세균 의원이 당선수락 연설을 하고 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들어올 때하고 여기 서있을 때랑 다르네, 서있다는 건 참 가슴 떨리는 일이야”
6월 9일 오전 10시 50분경 더민주 의원총회장에 도착한 문희상 의원(6선)은 이같이 말했다. 그는 이석현 의원(6선) 바로 옆자리에서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더민주 국회의장 내부 경선에 도전한 의원은 총 4명. 문 의원과 이 의원 정세균 의원(6선)과 박병석 의원(5선)은 기호 순으로 의원총회장 입구에 나란히 섰다. 4명의 후보들은 지나가는 의원들을 한 사람씩 붙잡고 “어서오십시오. 잘 부탁합니다”며 연신 악수를 청했다. 네 사람은 한껏 상기된 표정으로 의원들을 맞이했다.
10분 뒤 김종인 더민주 비상대책위원회 대표와 우상호 원내대표는 의원총회장 안쪽 단상 왼편 앞쪽에 자리를 잡았다. 더민주 의원들 역시 단상을 바라본 채 빙 둘러앉았다. “의원 123명 중 현재 100명이 참석했다. 의원총회를 시작하겠다”라며 윤관석 의원이 성원 보고를 했다.
마이크를 이어받은 김 대표는 “총선 뒤 의장을 어느 당이 갖느냐는 문제는 국민이 표로 결정해줬다. 협상의 대상이 아니었는데 협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모습을 보인 것에 대해 유감이다”고 밝혔다. 김영주 의원(더민주 국회의장 선거 선관위장)은 “의장직에는 막중한 책임이 따른다. 정부여당과도 협상을 잘해야 하고 300명의 의원을 대표해야 한다. 매의 눈으로 후보들을 관찰해달라”고 보탰다.
갑작스레 감표위원으로 뽑힌 금태섭 의원이 머쓱한 표정으로 투표함 앞에 앉았다. 어쩔 줄 몰라 하는 금 의원을 보고 의원들 사이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김 선관위장이 4명의 후보 소개를 마치자 의원들은 3개의 기표소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투표를 마친 김영춘 의원은 “살다보니까 이런 순간이 또 온다. 거의 10년 만에 의장을 배출하니까 감회가 남다르다. 제20대 국회는 국가적인 위기상황에서 개원했다. 새로운 국회의장의 롤모델이 필요한 때다”고 설명했다. “누구를 찍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전현희 의원은 “그건 비밀이다. 의회주의를 지키고 외부의 압력에 굴하지 않을 분을 뽑았다”고 답했다.
“전체 121표 중 문 후보 35표, 이 후보 6표, 정 후보 71표, 박 후보 9표로 정 의원이 국회의장 후보로 선출됐습니다”
김 선관위장이 개표 결과를 발표한 순간 더민주 의원들 분위기는 차분했다. “예상한 대로 결과가 나왔다”며 고개를 끄덕이는 의원들이 많았다. 단상에 오른 정 의원은 “문 선배 죄송하다. 제대로 잘해서 부끄럽지 않도록 하겠다. 선의의 경쟁을 해준 이 의원과 박병석에게도 다시 한 번 감사하다. 아직 선거가 끝나지 않았다. 다른 당 의원들이 제 얼굴을 모를 수 있으니 의원들이 말을 잘 전했으면 좋겠다”며 소감을 밝혔다.
의원총회가 막을 내린 뒤 기자와 만난 김종민 더민주 의원은 “일단 과반수를 넘겼으니 정 의원은 앞으로 더 힘을 받을 것이다. 문 의원과 박빙을 예상했는데 정 의원 표가 더 나와서 깜짝 놀랐다. 아무래도 의원들이 정 의원의 정치적 역량을 더 높게 평가한 것 같다”고 밝혔다. 김한정 의원은 “될 만한 분이 됐다”고 말했다.
승자와 패자의 명암도 엇갈렸다. 정 의원 측은 “내부적으로 정보를 수집한 결과 60~70표 정도 나올 것으로 예상했다. 의원들을 직접 만나보니까 분위기가 달랐다. 의원 본인도 선거 직전까지도 특별히 걱정하는 기색을 안 보였다”고 설명했다. 이 의원 측은 “선거가 워낙 예측 불가능했다. 할 말이 없다”고 밝혔다. 문 의원 측 관계자들은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다크호스로 거론되며 두 사람을 맹추격한 박 의원 측도 “열심히 했는데 정 의원 흐름이 워낙 좋았다”고 평했다. 한편, 정 의원은 이날 오후 국회 본회의에서 무기명 투표로 총 투표자 287명 중 274표를 얻어 국회의장으로 선출됐다.
더민주 내부 경선은 일찌감치 문 의원과 정 의원의 2파전으로 압축됐다. 그런데 막상 투표함을 열자 두 사람의 표차가 두 배 이상 났다. 이 결과를 두고 친노 성향의 더민주 핵심 당직자는 “친노·친문이 정 의원 쪽으로 표를 몰았다. 특히 친문 입장에선 문 의원보다 정 의원이 비켜주는 모습이 낫다. 어쨌든 정세균이란 대선주자급 거물을 제치고 앞으로 문재인 전 대표는 정 의원 관리를 받을 수 있게 됐다. 범친노 진영은 이제 새로운 고민을 할 필요가 없다. 범친노 쪽이 ‘이번에 우리가 정 의원을 도와줬으니 대선 때 우리를 도와줘야 한다’는 무언의 메시지를 정 의원 쪽으로 보냈다“라고 말했다.
더민주의 한 보좌관은 “스킨십 차이다. 정 의원은 당대표 선거를 여러 번 경험했고 그때마다 지역 대의원 대회에 찾아와서 지역위원장들과 식사를 했다. 정 의원이 당시 각 지역의 정치지망생도 많이 만났는데 그 사람들이 이번 총선에서 초·재선 의원이 됐다”고 설명했다.
더민주 당직자도 “정 의원은 이미 당내 최강자였다. 정 의원을 두고 당직자들은 평점 10점짜리 예술영화라고 부른다. 정 의원을 향한 대중적인 지지가 약할 뿐 탄탄한 당내지지층을 가지고 있다. 선거가 가까워질수록 초선의원들 사이에 문 의원보단 정 의원이 훨씬 더 많이 회자됐다. 과거부터 더민주를 ‘정세균당’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말했다.
최선재 기자 s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