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서운 중국바람 ‘공한증’ 날리나
▲ 제7회 춘란배 결승국에서 이창호 9단(왼쪽)과 창하오 9단이 대국을 펼치고 있다. 이 대회는 창하오 9단이 2:0으로 이기고 우승컵을 안았다. | ||
올 시즌 한국 바둑계의 날씨가 좋지 않다. 흐리고 한때 우박을 동반한 비. 중국은 신이 났다. 구리 9단이 지난 2월에 이세돌 9단을 꺾고 LG배를, 5월에는 조한승 9단과 겨루어 BC카드배를 가져가더니 보름 전 서울 김포공항 근처 메이필드호텔에서 열린 TV아시아선수권전에서는 콩지에 7단이 이창호 강동윤 이세돌 9단 등 한국 랭킹 1, 2, 3위를 연파하며 우승컵을 안았다. 그리고 이번엔 창하오다.
중국 3인방이 세계 바둑계를 휩쓸고 있다. 한국 바둑까지 삼킬 태세다. 몇번 우승한 것뿐이니 아직 그렇게 겁을 낼 필요는 없지 않겠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심상치 않다. 구리 9단이야 성적이 꾸준했지만 창하오 9단이나 콩지에 7단은 실제로는 이름만큼 그렇게 뛰어난 활약을 보인 건 없었다. 특히 우리 이창호 9단, 이세돌 9단에게는 절대 열세, 거의 판 맛을 못 보았을 정도였다.
치고 올라가는 것이나 무너지는 것이나 다 순식간이다. 그러나 같은 ‘순식간’이라도 치고 올라오는 것은, 그 전까지의 과정이 길고도 험난한 것에 비해 내려가는 것은 쉽고도 허망하다. 일본 바둑이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반에 이르는 시기, 채 10년이 안 되는 사이에 갑자기 주저앉더니 이후 올라오질 못하고 있는 것을 지금 보고 있지 않은가.
이창호 9단도 요즘 마음이 좀 불편해서 그런 것인지 성적이 신통찮다. 그렇다면 이것도 이세돌 사태의 후유증의 일각일 수도 있겠다. 스승 조훈현 9단이 논란의 한가운데 있으니 어찌됐든 직간접으로 관련돼 마음이 편할 리는 없을 것이다.
바둑은 고도의 심리 게임. 약간의 정서 불안, 터럭만 한 잡념이라도 승부에는 결정적 변수로 작용한다고 하는데, 이건 약간이나 ‘터럭만큼’의 정도가 아니다. 바둑 내용이 잘 말해 주고 있다. 두 판 다 질 바둑이 아니었다고 한다.
첫째 판은 백을 들었다. 초-중반까지는 좀 불리했지만, 그것도 크게 뒤진 형국은 아니었는 데다가 승부의 고비에서 묘수를 작렬, 일거에 형세를 뒤집었다. 그 다음부터는 이창호 9단 자신의 능기 중 능기, 마무리 솜씨를 동원하면 되는 거였다. 그런데 그 바둑을 재역전을 당하고 말았다.
둘째 판은 흑. 초반에 일찌감치 실리를 크게 확보하면서 우세해졌는데, 중반 이후 강온 조절에 실패했다. 검토실이 “공격하면 백이 버티기 어렵다”고 한 장면에서 물러섰고, “뛰어 들어가 헤집었으면 끝난다”고 할 때 뛰어 들지를 않고 거꾸로 집을 굳혀 주었다. 그러다가 “여기선 차분히 지키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할때 갑자기 무리한 강공으로 선회하더니 카운터펀치를 맞았다.
예전의 이창호 9단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 두 번 거푸 일어났다. 얼마 전부터는 사람들이 “이창호 9단도 이젠 좀 지쳤구나” “지칠 만도 하지” 그런 얘기들을 주고받았는데, 최근 이창호 9단은 완연한 회복세를 보여 주고 있었다. 그런 판국이라 창하오 9단과의 역대 전적은 들먹일 필요도 없이 이번 연패가 더욱 불가사의하고 찜찜하게 느껴지는 것.
이세돌 9단이 6월 30일 기자회견을 한다고 하는데, 과연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하고, 걱정이 된다.
휴직이 아니라 아예 은퇴를 선언할지도 모른다는 추측도 있고, 얼마 전 가까운 지인, 바둑기자들과 뭔가 의견을 나눈 것으로 보아 은퇴 같은 폭탄선언을 할 것 같지는 않고, 아마도 그간 일련의 사태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히면서 해명할 건 해명하고 바둑팬들에게 사과할 건 사과하는 자리가 되지 않겠느냐는 예상도 있다. 시기를 놓친 감은 있으나 그래도 후자이기를 바란다.
기자회견을 하겠다는 말이 나온 직후 인터넷 바둑사이트 ‘사이버오로’에 이세돌 사건을 다룬 장문의 칼럼이 실렸다. 필자는 <월간바둑> 편집장을 거쳐 현재 사이버오로 이사로 있는 정용진 씨. 왜 한국기원 기사회가 이세돌 9단의 행동을 공론에 부쳤는지, 그 사유를 조목조목 나열했다. 사건의 전말을 집대성한 백서 같은 느낌이다.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것들이 많다. 이번 기자회견에서는 그 칼럼 내용에 대해서도 이세돌 9단이 답변을 해 주었으면 한다.
그나저나 중국은 일사불란하게 전진하며 ‘한국 바둑 극복’을 외치고 있는데 우리는 이거 적전분열의 양상이다. 질 수도 있는 것이지만 이런 식으로, 이런 이유들로 져서는 곤란한 것 아닌가.
이광구 바둑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