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박계 “우리 욕 들어갈 게 뻔한데” vs 비박계 “참패 책임소재는 밝혀야”
새누리당이 백서 발간을 위해 당 공식 페이스북에 올린 글. 페이스북 페이지 캡처.
총선 패인을 되짚어보고, 당의 운영 방식과 정책을 바꿔 내년 말 대선에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게 백서발간의 이유다. 새누리당 사무처는 백서 발간을 위해 기자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새누리당 공식 페이스북 페이지엔 “국민 여러분께 묻습니다. 새누리당 총선 참패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의견을 발췌해 제20대 총선 백서에 담겠습니다”는 공지가 올라왔다. 새누리당 기획조정국 관계자는 “일반 국민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백서의 기본 취지다. 기자와 국민들의 전반적인 의견들을 담으려고 노력했다”고 밝혔다.
이처럼 새누리당은 백서 발간에 적극적인 입장을 보여왔지만 정진석 원내대표의 깜짝 발언 뒤 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정 원내대표는 5월 22일 “새누리당을 비토(반대)했던 국민 의견만을 담아 아주 파격적인 총선 백서를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백서의 정체를 두고 친박 비박 간 신경전이 일어난 배경이다.
정 원내대표 발언 이후 친박계 일각에선 “김희옥 혁신비대위 체제가 자리를 잡아가는데 굳이 백서를 만들 필요가 있느냐”는 목소리가 고개를 들었다. 새누리당의 한 보좌관은 “친박이 백서를 만들지 않겠다는 메시지를 전한 것이다. 백서에 친박계 욕이 들어갈 수밖에 없으니까. 공천 파동이 총선의 가장 큰 패배 원인으로 거론되는 상황이다. 공천 문제를 백서에 담으면 친박 의원들에 대한 욕을 안 할 수 없다. 자신들 잘못을 발가벗고 시인하는 격인데 당연히 골이 아플 거다. 그쪽이 가만히 있겠나. 백서가 박근혜 대통령하고 연계가 안 될 수도 없는 노릇이고”라고 귀띔했다.
비박계는 “백서 발간으로 총선 참패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며 점점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비박계의 한 의원은 기자와의 통화에서 “국민백서에 담긴 그룹 설문 조사가 총선의 책임자들이 누구인지, 또 국민들의 목소리를 잘 담고 있다고 들었다. 국민들에게 백서 내용을 가감 없이 밝혀야 한다. 그래야 혁신 작업에 속도를 낼 수 있다. 내용이 절대 바뀌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비박계 일각에선 친박계가 의도적으로 ‘백서 무용론’을 띄워 국민백서 발간 작업에 제동을 걸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그렇다면 국민백서엔 어떤 내용이 들어있을까. 새누리당 기획조정국 관계자는 “감수까지 끝난 상태는 아니다. 독립된 필진이 집필 중이다. 새누리당이 크게 참패했던 수도권과 부산·경남지역(PK)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한 심층 집단 인터뷰와 경선탈락자들의 목소리도 담았다. 한쪽에선 백서를 수정한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는데 우리는 그런 압력에서 자유롭다. 출간이 무산될 염려도 없다”고 설명했다.
백서를 둘러싼 갈등은 2012년 대선이 끝난 후의 민주통합당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당시 한상진 민주통합당 대선평가위원장은 한명숙, 이해찬 의원 등 친노 진영에 대선 패배의 주요 책임이 있다는 대선평가보고서를 작성했다. 친노계는 “비주류가 대선평가 결과를 바탕으로 전당대회 국면을 유리하게 이끌고 가려는 의도”라며 평가보고서를 격렬히 비판했다. 반면 비노계는 “당내 비주류 인사들은 평가보고서에 동조하며 대선 당시 지도부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반박했다. 친·비노계가 같은 내용의 대선평가 보고서를 두고 상반된 반응을 보인 것이다.
당시 문재인 대선캠프에 있었던 친노 성향의 인사는 “비노가 대선 국면에서 전혀 안 움직였다. 우리가 박영선 의원을 보고 방송에 나가서 지원유세를 하라고 해도 묵묵부답이었고 세게 움직여주지 않았다. 그런데 대선 평가 결과 보고서에 친노 패권주의가 나와 우리 쪽에서 난리가 났다. 너무 억울했다”고 털어놨다.
당시 정치권에선 이를 민주통합당 전당대회와 연관지어 해석했다. 대선평가결과보고서가 친노와 비노 간 당내 주도권 확보 싸움과 맞물려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이는 새누리당의 국민 백서 역시 향후 전당대회에서 ‘메가톤급’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전망으로 이어진다. 백서 발간의 ‘타이밍’도 절묘하다. 백서는 8월 9일로 예정된 전당대회를 앞두고 발간될 예정이다. 앞서의 새누리당 보좌관은 흥미로운 이야기를 꺼냈다.
“지금 친박 쪽에서 당권을 잡을 사람은 최 의원뿐이다. 백서 발간이 전당대회 시기와 맞물리면 얼마나 곤란하겠나. 백서가 토씨 하나 안 바꾸고 있는 그대로 나오면 최 의원 당권에 영향이 있을 수밖에 없다. 유승민 공천 파동을 보면 그때 친박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을 했나. 백서 만들면 당연히 이 내용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사실 처절한 반성이란 말은 ‘친박 때문에 총선 졌다’는 말이다. 이런 내용은 길이길이 남아 친박의 영원한 족쇄가 될 수 있다. 백서는 동창회 회보가 아니다. 한 번 만들면 영원히 남는다. 찢어버린다고 없어지나.”
최선재 기자 s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