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제·이세돌 거푸 꺾고 한국 바둑 새 이정표 세워
지난 6월 14일 중국 우한 완다루이화 호텔 특별대국실에서 벌어진 제8회 응씨배 세계바둑선수권 준결승 3번기 최종국에서 박정환 9단이 이세돌 9단에게 285수 만에 흑 3점승(한국식으로는 3집반승)을 거두고 종합전적 2-1로 승리했다. 지난 7회 대회에서도 결승에 오른 바 있는 박정환은 당시 중국 판팅위에게 1-3으로 패해 아쉽게 준우승에 머문 바 있다.
한편 반대편 조에서는 중국 기사들끼리 대결을 벌여 탕웨이싱 9단이 스웨 9단에게 157수 만에 흑 불계승을 거두고 역시 종합전적 2-1로 응씨배 첫 결승행을 확정지었다.
박정환 9단(왼쪽)과 이세돌 9단의 준결승3번기 제3국 종국 장면. 응씨배는 심판이 대국자를 대신해 계가를 해준다. 박정환이 반면 11집을 남겨 덤8점을 제하고 흑3점승을 거뒀다. 우리 식으로는 흑3집반승이다.
요즘 가장 핫한 사나이, 이세돌 9단. 이창호 9단의 바통을 이어받아 국내 최고, 아니 세계 바둑 넘버원 자리를 10년 이상 지켰음에도 응씨배와 인연을 맺지 못했던 이세돌은 이번에도 정상 등극을 코앞에 두고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대회 시작 전 “내 나이를 감안하면 이번이 응씨배 정상에 도전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될 것 같다. 올해는 반드시 우승컵을 안고 싶다”던 이세돌의 바람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우승상금 40만 달러의 응씨배는 프로기사라면 누구나 탐내는 대회다. 4년마다 올림픽이 열리는 해에 치러진다고 해서 ‘바둑올림픽’이라 불리는 응씨배는 5억 원 가까운 상금도 매력적이지만, 4년에 한 번 열리는 희소성 때문에 초일류급 기사들에게도 선망의 대상이다.
특히 조훈현-서봉수-유창혁-이창호-최철한으로 이어지는 우승 라인은 한국바둑의 법통과 일치하고 있어서 아마 이세돌도 꼭 한 번 품에 넣고 싶었던 우승컵이었을 텐데 아쉽게 됐다.
반면 박정환은 2회 연속 결승에 진출하는 저력을 보여줬다. 2회 연속 결승에 올랐다는 것은 4년 동안 세계 정상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준결승 제1국은 박정환이, 2국은 이세돌이 승리한 가운데 맞은 최종국. 응씨룰은 덤이 크기 때문에(8점) 누가 백을 잡느냐가 관심거리였는데 이세돌이 백을 들었다.
1도, 2도
3도, 4도
5도, 6도
<1도> 장문이 아닌 백1의 어정쩡한 씌움이 국내 검토진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뭐야, 이거. 또 알파고가 빙의한 건가?” 백1의 늘씬한 중앙 행마에 과연 이세돌답다는 찬사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2도> 장문으로 흑 두점을 가둬두지 않고 백1로 둔 것은 이것으로 중앙을 효율적으로 봉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다. 흑2 이하로 몸부림을 쳐봐도 백17까지 중앙을 완벽히 틀어막을 수 있다.
<3도> 실전의 진행. 하지만 용의주도한 박정환은 흑2·4로 백의 포위망을 비집고 나온다. 혹시 이세돌은 이 수단을 간과한 것일까. 흑8의 젖힘에 백은 9로 받는 정도. 결국 흑12까지 일단락되었는데. 최명훈 9단은 “대국 당시에는 백의 시도가 신선해 보였고 두터워서 둘 만하다고 봤지만 자세히 보니 우하 흑의 실리가 커서 백이 좋지 않다”는 의견을 보였다.
7도
<5도> 백1·3은 이른바 역방향의 공격. 인터넷 해설의 최철한 9단은 “비세를 의식한 이세돌 9단이 올인을 선언한 장면”이라고 말했다. 물론 공격 대상은 아래 흑▲들이다.
<6도> 백의 정수는 1쪽 단수일 것이다. 백3·5는 기분 좋은 선수. 하지만 백의 즐거움은 거기까지다. 백7로 위아래를 갈랐지만 실익은 없다. 하변 흑은 더 이상 공격이 안 되고 좌상 흑도 8로 훨훨 날아가 버리고 나면 백이 손에 쥔 것은 없게 된다.
<7도> 흑이 초반에 벌어둔 실리가 많기 때문에 백은 좌하 흑을 최대한 공격해 이득을 얻어내야 한다. 하지만 흑5가 소름끼칠 정도로 냉정한 한수. 이래도 아래 흑은 잡히지 않는다는 박정환의 자신감이다. 이세돌은 백6~10으로 날카로운 발톱을 드러냈지만 공격이 먹히지 않는다. 결국 백14까지 흑 두점 얻어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흑15로 중앙도 두터워져 절망적인 형세가 됐다.
이후 박정환은 끈질기게 추격전을 전개한 이세돌을 3점 차이로 따돌리고 4년 만에 다시 한 번 결승 진출에 성공한다.
박정환의 결승 파트너 탕웨이싱은 93년생으로 박정환과 동갑내기. 상대전적도 3승 3패로 팽팽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 2013년 삼성화재배 세계바둑오픈 결승에서 이세돌을 2-0으로 꺾고 세계대회 우승을 경험한 바 있다.
응씨배 결승에서 맞붙게 된 박정환 9단(왼쪽)과 탕웨이싱 9단. 동갑내기에 상대전적도 3승 3패로 팽팽하다.
박정상 9단은 “탕웨이싱 9단은 커제, 스웨와 더불어 한국 기사들이 가장 까다롭게 생각하는 기사다. 모든 면에서 두루 강한데 특히 함정을 파놓고 끈질기게 기다리는 노림이 강한 스타일이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무서운 역습을 맞게 된다”면서 “반면 중국기원 관계자의 말에 의하면 중국 기사들 중 가장 늦게까지 남아 공부하는 기사가 탕웨이싱이라고 말할 정도로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는 기사”라고 말했다.
한편 결승에 오른 탕웨이싱은 현지 인터뷰에서 박정환이 결승 상대라는 이야기를 듣고는
“두말할 필요 없는 최강의 기사다. 최근 박정환의 바둑을 보면 이전의 단점을 모두 보완한 느낌이다. 이젠 어떤 빈틈도 찾기 어렵다. 이번 결승전은 솔직히 이길 자신이 없다. 다만 최선을 다해서 준비하고 공부하겠다. 지난 2014년 삼성화재배 준결승에서 박정환에게 2-1로 이겼지만 내용만 보면 모두 완패였다. 그때는 내가 잘 둔 것이 아니라 박정환이 스스로 무너졌다”고 말했다.
김성룡 9단은 “이번 응씨배 준결승전은 한국 바둑사에 또 하나의 이정표가 될 만한 승부였다”고 평하면서 “지금까지는 이세돌 9단이 한국바둑을 대표해왔다면 오늘 이 시간 이후 한국바둑의 간판은 박정환을 꼽아야 한다. 박정환은 이번 대회 예선에서 커제, 이세돌을 거푸 꺾었고 세계랭킹 1위라는 커제를 상대로 최근 3연승을 거두고 있다. 만일 박정환이 결승에서 탕웨이싱을 물리치고 응씨배 정상에 오른다면, 이제 세계 최강은 커제가 아니라 박정환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제8회 응씨배 결승5번기 1국과 2국은 오는 8월 10일과 12일 열리며, 3국부터 최종국까지는 10월 22일부터 26일까지 치러진다. 1~2국 대국 장소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으며 3~5국은 중국 상하이에게 열린다.
응씨배는 대회 창시자인 고(故) 잉창치(應昌期) 선생이 고안한 응씨룰을 사용한다. ‘전만법(塡滿法)’이라고도 불리는 응씨룰은 집이 아닌 점(點)으로 승부를 가리며 덤은 8점(7집반)이다. 응씨배의 우승상금은 단일 대회로는 최고 액수인 40만 달러(한화 약 4억 7000만 원), 준우승상금은 10만 달러다.
유경춘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