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칫밥도 눈물밥도 꿈이 반찬이면 꿀맛
▲ 지난 9일 부산 동의대 야구장에서 만난 정수민(왼쪽)과 안태경.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 ||
정수민의 첫 인상은 두산의 김선우를 연상케 했다. 선하고 차분하게 생긴 이미지가 김선우와 비슷한 분위기를 나타냈는데 정수민도 평소에 ‘김선우 닮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고 한다. 안태경은 쾌남형이다. 자꾸 보니까 쌍꺼풀 진 눈매가 임창용을 떠올리게 한다. 두 사람은 오랜만에 만나서 그런지 기자가 인터뷰를 할 틈도 없이 서로에 대한 얘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서로에 대한 첫 인상
안태경(안): 수민이를 처음 본 건 부산고 입학하고 나서부터예요. 신입생 중에서 투수가 5명 정도 있었는데 다들 잘했거든요. 수민이도 2학년 때부터 두각을 나타냈었죠. 아주 좋은 공을 가지고 있는 선수라고 생각했어요.
정수민(정): 제가 고등학교 진학했을 때는 오병일(롯데)이랑 안태경이 너무 잘했어요. 전 마운드보단 벤치에서 경기 보고 기록하는 일들을 주로 했었고요. 2학년 때까지 계속 기록을 맡다가 2학년 말부터 제대로 마운드에 올라갔던 것 같아요.
-미국 야구에 대한 꿈은 언제부터?
안: 초등학교 야구를 시작하기 전부터 메이저리그를 꿈꿔왔어요. 제가 고등학교를 부산고를 택한 이유도 부산고 출신 선배들이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제가 드래프트에서 1차지명이 안 돼 미국으로 갔다고 생각하지만 설령 지명이 됐다고 해도 미국 야구에 대한 꿈은 포기하지 않았을 거예요.
정: 전 처음에 야구를 그리 잘하는 선수가 아니었기 때문에 대학만 가도 목표 달성했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다 야구가 좀 되기 시작하면서부터 프로에 대한 꿈을 키웠죠. 만약 1차지명이 됐더라면 한국에 남았을 겁니다. 물론 지금은 제 선택을 후회하지 않아요.
▲ 정수민, 시카고컵스 | ||
정: 평소 (백)차승이 형과 (추)신수 형으로부터 마음가짐 단단히 하고 오라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나름 준비를 하고 들어갔는데 현실로 부딪힌 마이너리그는 정말 엄청나더라고요. 예상한 것보다 10배 이상은 힘들었던 것 같아요. 구단에서 연결해준 호스트 집에선 컵라면 끓여 먹는 것도 눈치보였어요. 집주인이 그 냄새를 싫어하시더라고요. 아침엔 시리얼, 점심엔 샌드위치 등으로 때우니까 항상 배가 고팠죠.
안: 우리 팀은 월급은 다른 팀에 비해 적게 줘도 먹는 건 잘 해줬어요. 근데 선수들이 좀 많이 먹는 편이잖아요. 그게 당연한데도 음식을 더 퍼서 담으려면 ‘저스트 원’이라고 하면서 개수 맞춰서 가져왔다고 더 가져가지 못하게 해요. 먹는 것 갖고 치사하게 그러니까 좀 섭섭하더라고요.
정: 우린 딱 개수를 정해서 줘요. 작은 상자 안에 샌드위치, 과자 한 봉지, 사과 한 개 담아 있어요. 그런데 그것만 먹고는 운동할 수가 없어요. 자기 돈으로 더 사먹어야 배가 채워져요.
-하루하루 전쟁 연속
안: 지난해 텍사스 레인저스에 입단할 때만 해도 단장, 감독, 코치까지 나와서 저에 대해 큰 관심을 보였어요. 입단식을 위해 미국에 들어갔다가 마침 텍사스가 원정 중인 시애틀에 들러 구단관계자들을 만났거든요. 세이프코필드 불펜에서 불펜피칭을 해보라고 하더라고요. 그만큼 저에 대한 기대치가 높았어요. 그런 가운데 스프링캠프를 맞이했는데 몸이 좋은 컨디션이 아닌데도 마음만 급한 나머지 뭔가를 보여주려다 결국엔 허리를 삐끗했어요. 그 다음부턴 악몽의 연속이었습니다. 심지어 캐치볼도 못할 정도였어요. 포수들끼리 수군거리며 제 흉을 보는 것 같았고 자꾸 주눅 들고 공 던지기가 무섭고…. 한마디로 야구 선수도 아니었어요. 일곱 살짜리 애가 공을 던져도 그 정도는 던졌을 거예요. 당시 체중이 10㎏이나 빠졌어요. 잠 자는 게 두려웠다면 이해되세요? 잠을 자면 아침이 오니까…, 그럼 야구장에 나가야 하니까.
정: 고등학교 때는 잘린다는 걱정은 해본 적이 없었어요. 그냥 학년이 올라가니까요. 그런데 거긴 하루하루가 잘리는 위기의 연속이었어요. 어제 같이 연습했던 선수가 안 나와서 아픈가보다 했더니 잘려서 집에 갔다고 하더라고요. 투수코치가 개인적으로 부르면 절반은 퇴출이더라고요. 저도 세 번 정도 불려갔는데 다행히 팀을 떠나라는 얘긴 아니었죠.
안: 제일 힘들 때가 신인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올 때. 그 선수들과 또 다시 경쟁을 벌여야 하니까요. 한 번 잘리면 10명씩 제거될 때도 있어요. 진짜 총만 없을 뿐이지, 전쟁터나 다름없었어요. 나중엔 포수들이 제 공을 안 받으려고 하더라고요. 어떤 포수는 스트라이크 공을 볼로 잡기도 해요. 무시한다는 걸 그렇게 행동으로 표현한 거죠.
정: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으로 운동을 하는 게 처음엔 적응이 안 됐어요. 박찬호 선배님도 그렇고 차승이 형, 신수 형이 대단하게 느껴졌고 너무나 존경스러웠습니다. 메이저리그에 오르기가 얼마나 힘들고 어렵고 먼 길인지 아주 뼈저리게 느꼈으니까요.
▲ 안태경, 텍사스레인저스 | ||
정: 루키리그에 있을 때는 2주에 200달러 정도 받은 것 같아요. 그러다 로우 싱글로 올라가니까 400달러로 껑충 뛰더라고요. 그 돈이 엄청나게 많게 느껴졌어요. 호텔비랑 밥값 내고 나면 얼마 안 남지만 그래도 적은 돈이라도 벌 수 있다는 데에 감사했어요. 사실 지금은 돈 벌려고 야구하는 게 아니잖아요. 당분간은 수입보다 지출이 더 많을 거예요.
안: 텍사스가 좀 짜요. 2주마다 한국 돈으로 20만 원씩 받은 거죠. 그거 갖고 어떻게 생활을 하겠어요. 그래도 항상 긍정적으로 현실을 받아들였습니다. 어차피 고생은 각오하고 온 거니까요.
-미국 도전을 후회하지 않는지
안: 정말 속으로 눈물 흘린 적도 많았고 스트레스 때문에 불면증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단 한 번도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안 했어요. 어렸을 때의 꿈이 메이저리그였기 때문에 고생을 해도 그곳에 있는 게 제 자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단계를 밟아서 올라가고 싶어요. 루키리그, 싱글A, 더블A 등등.
정: 후회는 안 해요. 한국 들어오면서 내년 2월에 스프링캠프에 합류할 수 있다는 게 너무 행복했어요. 사실 한국에 있었으면 조금 편하게 운동을 할 수 있었겠지만 고생도 다 때가 있는 거잖아요. 처음엔 꿈과 희망을 가득 안고 갔다가 현실에 부딪히면서 조금씩 그 꿈들이 자신감을 잃기도 했는데 이제 겨우 시작이니까 내년엔 한 계단 더 올라 설 수 있도록 노력해야죠.
-올 시즌 성적은?
안: 수민이에 비해 전 형편없어요. 레벨도 루키이고. 올 시즌 모두 5게임 나갔는데 그중 3게임은 아주 잘 던졌어요. 다행이라면 시즌 마지막을 잘 마무리했다는 사실이에요. 팀 관계자들한테 가능성을 보여준 것 같거든요.
정: 방어율이 4점대를 기록했어요. 홈런도 4개나 맞았고요.
-계획이라면?
안: 당분간 야구 글러브는 안 꺼내려고요. 몇 주 동안 만이라도 야구를 잊고 싶어요. 그 다음 동계훈련에 들어가야죠. 수민이랑 동의대에서 같이 훈련할 겁니다.
정: 구단에서 당분간 쉬라고 했거든요. 친구들 만나면서 인간답게 살아보려고요. 그래도 태경이랑 같이 운동할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적응 기간은 지난 1년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내년 시즌부터는 ‘적응’ 운운하며 변명할 수가 없잖아요.
안태경이 텍사스 레인저스에 입단하는 날, 단장이 존경하는 야구 선수를 물어봤다고 한다. 안태경은 평소 생각하던 대로 ‘박찬호 백차승 추신수’라고 대답했다. 순간 텍사스 단장의 얼굴 빛이 확 변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고.
“박찬호 선배님이 텍사스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지 못했잖아요. 아무래도 그것 때문에 그랬던 것 같아요. 그래도 전 지금도 똑같은 질문이 들어오면 같은 대답을 할 겁니다. 누구보다 찬호 선배님은 메이저리그를 꿈꾸는 후배들의 우상이니까요. 그래서 텍사스에서 더 잘하고 싶어요. 잘할 수 있다는 것도 보여주고 싶고요.”
부산=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