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돌부처 손바닥도 벗어났다
▲ 삼성화재배 준결승서 격돌한 이창호 9단(왼쪽)과 치우쥔 8단. | ||
이창호 9단과 치우쥔 8단, 구리 9단과 콩지에 9단. 지난 2일부터 5일까지 중국 상하이 한국문화원에서 한국 1명과 중국 3명이 벌인 제14회 삼성화재배 준결승 3번기에서 콩지에 9단과 치우쥔 8단이 각각 구리 9단과 이창호 9단을 꺾고 결승에 진출했다. 이번 삼성화재배는 지난 1988년 세계대회 출범 이후 통산 100번째가 되는 타이틀이어서 세계 바둑계가 색다른 관심으로 주목하고 있는 참인데, 타이틀 결정전은 중국 기사끼리의 잔치가 되었다.
콩지에 9단이 먼저 구리 9단을 2 대 0으로 꺾고 결승에 선착했다. 콩지에 9단은 최근 무서운 상승세. 구리 9단은 현재 세계 타이틀 5관왕. 관록과 명성의 객관적인 전력에서는 구리 9단이 앞서 있었지만, 이번엔 상승세가 명성을 눌렀다.
이창호 9단과 치우쥔 8단의 대결에서는 물론 이창호 9단의 우세를 점치는 사람이 많았다. 이 9단이 근래 예전만 확실히 못하며 준우승 징크스에 시달리고는 있지만 치우쥔 8단이 이 9단을 넘기에는 아직은 역부족일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치우쥔은 준결승 1국에서 신산(神算) 이창호를 두텁고 끈끈한 반면 운영과 정확하고 치밀한 끝내기로 따라잡으며 선취점을 올렸다. 두텁고 끈끈함과 정확무비한 종반 계산은 이창호의 국제적 브랜드인데, 두 사람의 대국을 지켜보던 관전자들은 누가 이창호고, 누가 치우쥔인 줄 얼른 분간하지 못했다. 치우쥔의 선승은 그만큼 인상적이었다.
이후 2~3국도 바둑의 양상은 비슷했는데, 2국에서는 치우쥔이 미세한 종반에서 대마를 돌보지 않고 버텼고, 이창호는 즉시 칼을 뽑아 치우쥔의 대마를 함몰시켰다. 1 대 1 동률. 이창호 9단이 치우쥔의 대마를 잡고 반격에 성공하자 이날 중국 언론은 “치우쥔 마왕의 높이는 1척, 이창호 부처의 높이는 1장”이라는 제목의 기사로 이창호 9단에 대한 저들의 변함없는 경외심을 표현했다. 3국은 거의 1국의 재판이었다.
이제 승부 호흡으로 말하자면, 구리를 제친 콩지에보다 이창호를 넘은 치우쥔을 더 주목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콩지에가 구리에게 약간 부족했던 것처럼 치우쥔도 콩지에보다 약간은 부족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지만, 현실에선 구리가 콩지에게 뜻밖에 허망하게 넘어갔던 것처럼 결과는 모르는 일.
누리꾼들의 베팅도 거의 50 대 50이다. 통계 자료만으로는 파악되지 않는 플러스 알파가 치우쥔에게 있다는 것. 우선 콩지에에 비해 치우쥔의 전력은 완전히 드러나지 않은 상태는 것. 그리고 거함 이창호를 격침시킨 후 흥분과 감동의 목소리로 “이미 목표의 120%를 달성했다. 충분히 만족한다”고 토로했듯 치우쥔은 승부 결과의 부담에서 벗어난 것으로 보이는데, 큰 승부에서 어깨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만큼 큰 무기는 없다는 것이다.
우려했던 것들이 계속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밀려오는 파도의 속도가 생각보다 아주 빠르다. 올라가는 길은 멀고 험하지만 내려가는 길은 가깝고 금방이다. 뒤집히는 것은 순식간이다. 이창호-이세돌의 투톱 가운데 한 사람은 피곤에 지쳐있고 한 사람은 뜬금없이 쉬고 있다. 최철한-박영훈은 독한 마음이 풀어졌는지, 정상 근처에서만 거닐고 있다. 강동윤은 무슨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도 같고, 김지석과 박정환은 열심히 빨리 달리고는 있는데, 결정적인 순간에 넘어지곤 한다.
우리를 위협하는 중국의 선수들은 나이가 그렇게 어린 것도 아니다. 천야오예(20)가 조금 어릴 뿐 구리나 콩지에나 이번의 치우쥔이나 다 20대 중반을 넘어선 나이다. 우리는 “어린 신예, 어린 신예” 하고 있지만 빨리 피었다가 빨리 지는 것보다는 조금 늦게 피더라도 오래 가는 것이 좋은 것 아닌가.
뒤돌아 볼 점은 또 있다. 쉬어야 할 사람은 이세돌 9단이 아니라 이창호 9단이다. 준결승을 치르러 상하이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이창호 9단은 간단한 인터뷰를 했다. 컨디션이 좋으냐는 기자의 질문에 “별로 좋지 않다”고 대답했고, 만성두통에 시달리고 있음을 밝혔다. 이창호 9단 같은 성격에 열 살 때부터 지금까지 오직 바둑 승부 한 길로만 왔으니 만성두통에 시달리지 않는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그는 이제 좀 쉬어야 하며 많이 웃어야 한다. 그에게 웃음을 줄 수 있는 것이 스포츠인지, 바투 게임인지, 아니면 연애나 결혼인지는 모르겠지만.
11월 9~11일에는 제주도에서 제14회 LG배 8강전과 준결승이 벌어진다. 이창호와 치우쥔, 박영훈과 후야오위 8단, 최철한과 콩지에, 구리와 박문요가 대결한다. 여기서는 한국 5명, 중국 3명. 삼성화재배 8강전과는 숫자가 반대로 되었다. 그러니 또 기대를 해 보자.
구리, 콩지에, 치우쥔의 이름이 또 그대로 보인다. 박문요도 이젠 단골손님이 되었다. 공교롭게도 이창호와 치우쥔이 다시 붙는다. 이창호 9단으로서는 설욕전이다. 그런데 삼성화재배와 LG배, 우리가 주최하는 굴지의 세계대회 일정이 꼭 이렇게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열려야 하는 것인지. 우리끼리 경쟁하는 인상인데, 그럴 필요가 있는 것인지. 잉칭치배 같은 대회는 4년 만에 한 번씩 열려도 권위와 품위를 유지하고 있는데 말이다.
이광구 바둑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