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 바둑, 부족한 2% 채웠다
▲ 조한승 9단. | ||
12월 9일 한국기원 특별대국실에서 벌어진 제14기 GS칼텍스배 도전5번기 제4국에서 도전자 조한승 9단이 타이틀 보유자 박영훈 9단(24)에게 백을 들고 138수 만에 불계승, 종합 전적 3 대 1로 타이틀을 쟁취했다. 2006년 제11기 박카스배 천원전 결승에서 이세돌 9단을 3 대 1로 물리치며 타이틀 홀더에 이름을 올린 이후 3년 만에 차지하는 두 번째 우승컵이다.
박영훈 9단이 돌을 거두면서 패배를 선언하는 순간, 그런 경우 보통은 표정 관리에 들어가는 것이지만, 조한승은 환하게 웃으면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지난 몇 년 동안 자신을 따라다녔던 준우승 악몽과 안타까움, 이제 며칠 후면 입대해야 한다는 설렘과 절박함, 막연한 허전함과 두려움, 그런 감정의 불균형 속에서 임한 승부였던 만큼, 게다가 박영훈은 평소 까다로운 후배, 잘 안 되는 상대였기에 승리의 감격을 주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대국을 지켜본 사람들도 덩달아 웃으면서 “박영훈이 입대하는 형에게 좋은 선물을 했다”는 말로 두 사람에게 격려와 축하를 보냈다. 입영전야의 선물로 이만한 것이 또 있으랴. 4국을 졌으면 입대 바로 전 날인 12월 14일에 5국을 두어야 했고, 그랬으면 결과는 또 모를 일이었다.
뛰어난 기재들이 전부 그렇듯 조한승도 1995년 입단할 때부터 유망주요, 기대주였다. 바로 본선 멤버가 되었고, 몇 년간 단련기간을 거쳐 5단에 오른 2003년에는 제11기 신인왕전에서 우승, 정상가도의 첫 관문을 통과했으며 그 해 연말정산에서 61승23패로 최다대국과 최다승, 2개 부문에서 1위를 차지했다.
2003년부터는 본격기전 도전무대에 진출해 제46기 국수전과 GS배의 전신인 제8기 LG정유배, 2004년 제23기 KBS바둑왕전, 2005년에는 국제기전인 제17회 TV아시아선수권전 등에서 준우승, 정상권 기사로 인정받으며 차세대 선두주자군에 합류했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2006년, 이세돌을 제치고 박카스배의 주인이 되면서 정상의 8부 능선에 올랐다. 이창호-이세돌과 지근거리였고, 나이는 좀 많았지만 최철한-박영훈 등과는 동렬이었다. 이제 조한승의 타이틀 행진은 계속될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8부 능선 다음은 정상이 아니라 미처 예상치 못한 악천후였다.
2007년 국내 최고기전 제35기 하이원배 명인전에서 다시 이세돌 9단에게 도전장을 던졌다. 결과는 영패였다. 5번기에서 처음부터 내리 세 판을 졌다. 준우승. 작은 기전 박카스배 때와는 싸움터의 분위기부터가 달랐다. 마음을 추스른 후 방향을 바꾸어 제23기 KBS바둑왕전 결승에서 이창호 9단을 만났다. 결과는 1승2패, 또 준우승. 이창호-이세돌과 지근거리라고 생각했던 것인데, 멀리서 보았던 거리와 실제로 느끼는 거리와는 차이가 있었다.
2008년에도 이세돌을 만났다. 낯익은 장소, 제20회 TV아시아선수권전이었다. 여기서도 졌다. 거듭되는 준우승. 마지막 한 걸음을 나가지 못하는 조한승을 보고 사람들은 “2% 부족”이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바둑의 질로 말하자면 최상품이다. 폭 넓은 대국관과 유연한 행마, 리드미컬한 반면 운영, 부드러움으로 강함을 제압하는 솜씨는 당대 제일이다. 그런데 위닝샷이 없다”는 것이었다.
2008년 말 획기적인 국제기전이 또 하나 생겼다. 우승 상금 3억 원의 BC카드배였다. 조한승은 승승장구, 치고 올라가 올해 5월 결승5번기에서 구리 9단을 만났다. 일생일대의 기회. 결승 전야제에서 조한승은 “3 대 1로 이길 것”이라고 기염을 토했다. 결과는 거꾸로 1승3패. 준우승은 숙명 같았다.
그 모든 회한과 쑥스러움과 자괴감을 조한승은 12월 9일 BC카드배에서 눈물 흘린 지 반년 만에, 한 방에 날려보냈다. 인생은 한 방이다.
12월 9일은 또 마침 낮에 서울역 건너편 힐튼호텔에서 제2회 BC카드배 개최 발표식이 있었다. 발표장 한쪽 벽에 걸린 스크린에는 홍보영상이 흐르고 있었다. 거기서 파이팅을 외치는 조한승을 보면서 사람들은 그때 조한승과 박영훈이 두고 있을 GS배 도전4국을 얘기했다. 오늘 이기고 군대 가나, 지고 가나?
조한승의 군 입대를 걱정하는 소리가 있다. 이제 물꼬를 텄는데, 2년 있다 나오면 원위치되는 것 아니냐는 것. 군 입대로 조한승의 승운이 더 좋아질 것이라는 얘기도 있다. 조한승에게 필요한 것은 기량의 상승보다는 담력의 훈련, 근성의 배양일 것이기에. 조훈현 9단이나 서봉수 9단, 유창혁 9단도 그렇고, 병영생활이 마이너스는 아니었다는 전례가 있다는 것.
GS칼텍스배는 우승 상금 5000만 원으로 하이원배명인전, 전자랜드배와 함께 국내 프로기전 ‘빅3’로 불리는 기전. 최근 전자랜드배가 잠시 중단되면서 ‘빅2’가 되었다. 현재 국내 프로기전 가운데 유일한 도전제 기전이기도 하다.
어떤 기전에서 올해 우승한 사람은 다음 기에는 예선과 본선에 참가하지 않고 있다가 본선 최고 성적자가 나오면 그를 상대로 타이틀을 놓고 3번기-5번기-7번기를 겨루는 것이 도전제. 이번 기에 우승한 사람은 다음 기 결승에서 지더라도 준우승이니 최소한 다음 기의 준우승 상금까지는 확보하는 것. 이와는 달리 이번 기 우승자도 다음 기에는 본선부터 참가하는 것이 결승제. 이번 기 우승자가 다음 기에도 결승전을 벌인다는 보장이 없는 것.
일본은 프로기전이 생긴 이래 지금까지 주요 기전은 모두 도전제이고, 우리는 지금 대부분이 결승제. 도전제인 GS배는 그런 의미에서도 개성적인 기전이었는데, 이것도 올해를 마지막으로 내년부터는 결승제로 바뀐다는 소식이다.
이광구 바둑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