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 바뀐 반상’ 중국 굳히기냐 한국 역공이냐
▲ 박정환 7단. 아래 작은 사진은 나현 연구생(왼쪽)과 김지석 6단. | ||
1월 11~13일 한국기원에서 벌어진 통합예선에서 한국 35명, 중국 18명이 관문을 통과했다. 일본은 예선 결승에 4명이 나갔으나 모두 떨어졌다. 국가별로 시드를 배정 받아 기다리고 있는 한국의 이창호·최철한 9단과 김지석 6단, 중국의 구리·창하오·콩지에 9단, 일본의 야마다 기미오·이야마 유타 9단, 대만의 천스위엔 8단, 그리고 주최사 BC카드에서 와일드카드로 추천한 조훈현·이세돌 9단 등 11명과 예선 통과자 53명이 64강 본선을 구성, 우승 상금 3억 원의 레이스를 시작한다.
먼저 통합예선 결승이 전하는 기분 좋은 뉴스. 우리 아마추어 선수들이 9명 출전해 5명이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큰 활자로 다가온다. 연구생 1조인 나현, 박태희와 2조 이주형, 3조 최현재, 그리고 이들과 같이 공부하다가 나이가 좀 많아 2008년에 나온 박영롱이다.
현역 연구생 혹은 연구생으로 공부하다가 나이 제한에 걸려 일반 아마추어로 돌아온 선수 가운데 프로보다 강한 실력자도 있다는 것이 입증된 셈. 이들이 요즘 프로 입단의 문을 넓히라는 주장에 결정적 힘을 실어주고 있거니와 어쨌든 대단한 일이다.
특히 나현(충암중 3)의 분전이 집중 조명을 받았다. 강완 이영구 7단과 몇 년 전까지 중국 바둑 주력의 한 사람이었던 위빈 9단(43)을 연파, 돌풍의 핵으로 떠오른 것. 위빈 9단은 지난 2000년 제4회 LG배 세계대회 결승5번기에서 유창혁 9단을 3 대 1로 꺾고 우승, 세계 타이틀 홀더에 이름을 올렸고 최근엔 중국 팀의 단골 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다. 양재호 9단 문하인 나현은 현재 연구생 내신 1등급. 이대로만 가면 올 4월 내신 성적으로도 입단하게 되는데, 그에 앞서 이번 BC배에서 8강에 오르면, 그 성적으로도 자동 입단이다. 차분한 실리형 기풍이 이창호 9단을 닮았다는 얘기를 듣고 있다. 예선과는 또 달라서 본선 8강이 결코 만만치는 않을 것이지만 기대해 보자. 한국은 연구생도 세계최강의 수준이다.
조금 처지는 소식. 한국 35명, 중국 18명이나 우리가 두 배나 되는 것 같지만, 그건 우리 쪽 출전 선수가 처음부터 많아서 그런 것이고, 사실은 좀 달랐다. 예선결승에서 한·중 대결의 결과는 우리가 5승15패, 절대 열세로 나타났다. BC카드배 탄생의 공로자 유창혁 9단, 2008년 제1회 국제 마인드스포츠대회 한국 대표였던 온소진 4단, 최근 군 제대 후, 입대 전보다 훨씬 강해진 모습을 보이고 있는 안달훈 8단과 박승현 6단이 제 몫을 했을 뿐이고, 나머지 한 판은 어린 후배 나현이 일군 것. 온소진 4단이 중국 랭킹 5위 후야오위 9단을 꺾은 것이 돋보였다는 것을 빼면 좀 민망한 성적이다. 늘 파란 불일 것 같았던 것이 어느 순간부터는 노란 불로 바뀐 것처럼 느껴지더니 이제는 빨간 불 같다. 차세대 기대주로 촉망받는 김승재 강유택이 보이지 않는 것도 아쉬운 일.
대신 박정환 7단의 어깨가 무거워졌다. 박 7단은 BC카드배보다 조금 앞서 지난해 말 김지석 6단과 제14기 박카스배 결승5번기를 겨루어 그때 한창 질주하던 김 6단을 3 대 0이라는 뜻밖의 스코어로, 간단히 제압하며 우승과 함께 김 6단보다 빨리 7단 승단의 기쁨을 누리더니 해가 바뀌어 얼마 전, 1월 10일에는 제5기 원익배 십단전 결승3번기 제3국에서 이창호 9단을 반집으로 물리치면서 종합 전적 2 대 1로 우승, 2관왕에 올랐다. 뻗어나가려면 우승을 하고, 타이틀을 따야 한다. 타이틀은 결정적 추동력이 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창호 9단이나 이세돌 9단을 이기는 일이다. 이세돌 9단이 실질적으로 한국 제일인자라고 하나 아직 이창호 9단을 완전히 제압하지 못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세돌 9단을 포함해 누구든 이창호 9단을 제압해야 명실상부, 만인이 인정하는 1등이 되는 것. 그 점에서 소년 박정환의 대 이창호 전 승리는 타이틀 획득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이겨 본 경험이 있어야 이기는 것.
2010년에는 김지석과 박정환의 경쟁이 더욱 볼만해질 텐데, 지금 이 시점에서는 박정환이 조금 앞서기 시작한 느낌이다. 김지석은 너무 착하게만 보이는 게 좀 안쓰럽다. 나현이 입단하면 바람을 일으킬지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까지 유망주로 불렸던 모두가 프로 입문 직후엔 시쳇말로 ‘개업 끗발’ 같은, 이른바 ‘입단 특수’ 효과로 빛을 발했는데, 그들 중 상당수는 또 프로야구에서처럼 ‘2년차 징크스’에 걸려 죽죽 뻗어나가질 못했거나 못하고 있다. 아무튼 올해는 김지석 박정환 나현이 기대주로 꼽히고 있다.
이창호가 최근의 회복세를 이어갈지, 돌아온 이세돌이 6개월의 침묵이 침묵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줄지, 작년부터 갑자기 구리 9단에게도 마구 이기고 있는 콩지에 9단이 계속 그렇게 힘을 낼 것인지도 올해 바둑계의 관전 포인트다.
이광구 바둑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