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도 안 빼 보고 ‘다윗’에게 백기
▲ 이창호 9단(오른쪽)이 17세 연구생 한태희에게 96수 만에 돌을 거둬 화제가 됐다. | ||
돌을 거두는 것은 대국자의 마음이다. 이건 약간 옆길로 가는 얘기인데, ‘돌을 거둔다’는 것보다는 ‘돌을 던진다’라는 말을 더 많이 쓴다. 사용 빈도는 1 대 99쯤 된다. “‘던진다’는 것은 일본식 표현 ‘투료(投了)’를 글자의 뜻 그대로 옮긴 것인 데다가 점잖지 못하기도 하니 ‘거둔다’로 하자”는 주장도 있다.
일본식 표현이라는 것은 둘째 치고,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어감의 전달에서는 ‘던진다’가 효과적이다. 권투에서 흰 수건을 ‘던지는’ 것, 그런 것도 연상이 되어 승부를 포기할 때의 비장미도 묻어난다.
이 9단은 왜 돌을 거두었을까. <1도>가 이 9단이 돌을 거둔 장면이다. 흑1로 붙인 것에 대해 백2로 젖히자 기권을 선언한 것이다. 아마추어는 말할 것도 없고, 프로기사 고수들도 “이건 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고 입을 모았다.
“바둑이 초반부터 좀 단조롭게 짜이고, 백의 흐름이 좋은 건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흑이 돌을 거두어야 할 만큼 비세였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다만 이창호 9단은 형세판단과 계산력이 워낙 뛰어나므로 국면을 다르게 볼 수가 있다. 이런 진행이라면 가망이 없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그렇게 이해해야 할 것 같다.”
BC카드배 해설자, 이번 대회에서 험난한 예선을 뚫고 64강에 들어가고, 거기서 다시 중국의 강력한 신예 류싱 7단을 꺾는 것으로 오랜 침묵을 깬 1980~90년대의 천재 소년 김만수 7단(33)을 비롯한 프로 고수들의 얘기이므로, 맞는 말일 것이다. 형세가 회복불능이어서 돌을 거둔 것이 아닌 것은 분명하지만.
그날 저녁 때 바둑 관계자 몇이 모여, 지난 연말 ‘시간패’ 해프닝 때 그랬던 것처럼, 이창호 단명국에 대한 ‘짐작’을 주고받았다.
“70년대 후반에 기왕전 본선에서 조훈현 9단이 돌아가신 이강일 5단과 두다가 45, 46수쯤에 돌을 던진 적도 있잖아. 그 전에 김인 9단도 돌아가신 강철민 8단하고 최고위전 도전기, 타이틀 결정국에서 80수쯤에 돌을 던진 적도 있고. 일본의 오다케 9단은 돌을 잘 던지기로 유명했고….”
“그렇지. 돌 던진 게 어때서? 불리하다고 느끼면 96수 아니라 그 전에도 던질 수 있는 거지. 다만 이창호와 연구생이라는 것 때문에 좀 의외인 것뿐이야.”
“그러네. 백8로 갖다 붙인 수도 날카롭더군.”
“맞아. 그리고 <3도> 흑1~5에서 백6으로 연결할 때 흑7, 9로 백 넉 점을 잡은 게 작았대. 그에 비해 백10은 요소였고. 흑7로는 A 자리나 10의 곳, 아무튼 중앙으로 먼저 가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하더군.”
“그것도 그렇군. 흑7, 9는 끝내기잖아. 열 집짜리밖에 안 되는데. B의 곳을 막는 것보다는 작아 보여.”
“아하~ 이창호가 왜 그런 실수를 했을까.”
“모르긴 몰라도, 그때 갑자기 두기가 싫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 아닐까. 연구생 소년하고, 타이틀 매치도 아니고, 64강전을, 그것도 흑을 들고 두는데, 바둑은 의외로 만만치 않으니, 그런 것들이 자괴감 비슷한 걸로 이어지고, 그러다 어느 순간 그걸 견딜 수 없었을 거야.”
“흠~ 일리가 있네.”
“어쨌든 주최 측은 좋아하겠지. 흥행이 되니까. 연구생들 입단을 많이 시키라고 주장하는 쪽도 연구생들의 실력이 증명되지 않았느냐고 좋아하겠지.”
“주최 측은 좋아하지만은 않을 걸. 당황스러운 면도 있을 걸. 이창호 이세돌은 흥행에서도 키 역할을 하잖아.”
“뭘 그래. 그냥 승부로 보면 되지. 승부사가 상대를 가리고 때와 장소를 가리나. 또 요즘 세태의 흐름도 그렇잖아. 아니 그리고 어제 연구생 나현이 위빈 9단에게 이겼을 때는 다들 좋아했잖아. 나현이 위빈을 이긴 것과 이창호가 돌을 던진 것하고 뭐가 달라?”
“그건 그런데…. 두 경우가 똑같지는 않고 조금 다르지. 평상시대로 두다가 승패가 갈리는 건 이해는 되지만, 100수도 안 돼 돌을 던졌다는 건 어쨌든 자연스럽지는 않아. 이세돌도 연구생한테 시종 고전했지만 결국은 이겼잖아.”
“이창호가 장난기가 발동한 건 아닐까. 아니면 자라나는 대견한 후배에게 길을 한번 틔워줘 보자, 그런 건 아니었을까.”
“그건 아니라고 봐.”
“이건 어때? 이세돌은 불만이 있으면 즉각 행동으로 나타내고, 이창호는 참는 스타일인 걸로 알고들 있는데, 이창호가 뭔가 항의를 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가능성이 5%쯤은 되는 것 같군. 아무튼 불가사의해.”
“그나저나 나는 좀 쓸쓸하다는 느낌이 들더군. 일찌감치 대국장을 나서는 이창호 뒷모습도 그렇고, 그걸 화제로 삼는 우리들도 그렇고. 상금제도 좋고, 오픈도 좋고, 다 좋은데, 아무리 승부라고 하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틀이나 격(格)은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을 떨칠 수 없어.”
“연구생들을 포함한 젊은 기사들은 총기 있고 체력 좋은 나이겠다, 온갖 바둑 수에 대한 정보 다 입력되어 있겠다, 한두 시간 착착 두어 이겨가는 건데, 그게 바둑의 전부라면 이제는 바둑이 도(道)다, 예술이다 하는 말은 하지 말아야겠어.”
“서양 친구들은 오히려 바둑을 진지하게 대하는 것 같던데 말이야. 유럽 바둑대회는 참가자들이 전부 아마추어들인데도 제한시간이 각자 2시간, 2시간 반 그렇잖아. 상수 하수 가릴 것 없이 자세들은 참 진지해.”
“그러게. 바둑이란 게 사실은 누가 빨리 잘 두냐 하는 것보다는 오래 생각하면서 두는 것이 더 재미있는 건데 말이야.”
“골치 아프게 따지긴 뭘 따져. 그냥 체육으로 가자구. 게임으로 가든지.”
“어쨌든 승부는 결과론이야. 세상도 사실은 결과론이고. 한태희가 어디까지 올라가나 지켜보자구. 16강, 8강 막 올라가면 이번 일이 우연이 아닌 실력이었음을 인정받을 테코 그렇지 않으면 뭔가 하나의 화두가 등장할지도 몰라.”
“무슨 화두?”
“나중에. 지금은 말할 때가 아냐…^^”
이광구 바둑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