땀으로 세운 ‘공든 탑’ 말 한마디에 와르르
#한국 레슬링과 이건희-천신일 라인
레슬링은 한국 스포츠의 효자종목이다. 1976년 몬트리올에서 양정모가 그 유명한 ‘해방 후 첫 올림픽 금메달’을 따낸 것을 필두로 인해 LA(1984), 서울(1988), 바르셀로나(1992), 애틀랜타(1996), 시드니(2000), 아테네(2004)까지 올림픽마다 금메달이 최소 하나 이상 나왔다. 1980년 모스크바올림픽은 한국이 미국의 보이콧 방침에 따라 불참했으니 무려 7연속 금메달 행진이었다. 물론 전통적으로 한국이 경량급 격기종목에 강했고, 또 선수들의 피땀어린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느냐는 의혹이 국내외서 끊임없이 나왔다. 재미있는 것은 이건희 회장이 스스로 IOC 위원 자진자격정지를 신청한 직후 열린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는 한국 레슬링 금메달이 나오지 않았다. 당연히 “이건희 회장이 베이징을 찾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학창시절 레슬링 선수였던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은 1982년 레슬링협회장에 취임했다. 전두환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한 후 재벌들에게 스포츠단체장을 맡으라고 압력을 넣었는데, 삼성은 아마종목 중 오너와 깊은 인연이 있는 레슬링으로 낙점된 것이다. 이후 이건희 대한레슬링협회장은 1997년 초까지 4차례 임기를 계속하며 16년간 한국레슬링을 이끌었다. 삼성은 레슬링팀(삼성생명)을 창단하기도 했다. 그리고 레슬링의 ‘포스트 이건희’는 바로 천신일 회장이었다. 천 회장은 1997년 이건희 전 회장의 뒤를 이어 25대 대한레슬링협회장으로 취임했고, 2000~2002년 레슬링협회 분규로 잠시 자리를 물러나기도 했지만 2002년 이후 지금까지 자리를 지켜왔다.
천신일 회장이 삼성과 특수관계인 것은 당사자들의 함구에도 불구하고 잘 알려진 얘기다. 천 회장은 재계가 다 아는 ‘삼성맨’이다. 이건희 전 회장과 친분이 두터운 것은 물론, 이건희 전 회장의 조카인 이재현 CJ 회장이 천 회장을 “아저씨”라고 부르고, 천 회장은 이병철 고 삼성 창업주(이건희 회장의 부친)를 “아버지”라고 부를 정도다. 객관적으로도 1982년 천 회장이 세운 세중여행사는 지난 28년간 약 20만 명에 달하는 삼성 임직원의 국내외 운송을 독점하고 있다.
특별한 학연이나 지연도 없는 천신일 회장이 삼성가문의 멤버가 된 것에 대해서는 당사자(삼성과 천 회장)들이 철저히 함구하는 가운데 다양한 설이 제기돼 왔다.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의 천거로 이병철 고 삼성 창업주가 천신일 회장을 챙겼다는 설, 천 회장이 자신과 가까운 5공 실세를 삼성에 연결하면서 관계가 돈독해졌다는 분석, 천 회장의 부친이 워낙에 가까웠던 이병철 창업주에게 아들을 부탁했다는 설 등이 있다. 레슬링계에서는 세 번째 설이 유력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어쨌든 재계에서의 이러한 특수관계는 체육계에서는 아예 ‘천신일 회장은 이건희 회장의 대리인’으로 발전했다. 이 전 회장이 1982년 레슬링협회장으로 취임하면서 천 회장은 국제담당이사를 맡았고, 협회장 자리까지 이어받은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체육계인사는 “이건희 회장은 지금도 레슬링협회의 명예회장을 맡으며 자금 지원을 한다. 그리고 이건희 회장이 IOC 위원이 될 때도 천신일 회장이 동분서주했다”고 말했다. 현재 천신일 회장은 체육계에서 대한레슬링협회장, 국제레슬링연맹 집행위원, 대한체육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2009년 대한체육회장 선거 때는 가장 유력한 후보로 꼽혔지만 출마하지 않았다.
▲ 이건희 전 삼성 회장(왼쪽)과 천신일 대한레슬링협회장. | ||
#판도라의 상자에서 흘러나온 말?
이런 분위기 속에서 천신일 회장은 지난 1월 6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 22부 심리로 열린 1심 결심공판에서 ‘2008년 베이징올림픽 당시 중국 베이징 현지에서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받은 중국 돈 15만 위안(한화 2500만 원 상당)의 일부를 올림픽 심판들에게 건넸다’고 진술한 것이다. 이날 피고인 신문 과정에서 천 회장은 “일부 심판들에게 친선 도모를 위해 화장실이나 호텔 복도에서 만나 직접 돈을 줬고, 그렇게 하는 것이 관행이었다”고 말한 것으로 보도됐다. 또 이에 앞서 지난해 10월 증인으로 참석한 대한레슬링협회 관계자도 “국제시합이 있을 때 나가면 심판들에게 밥과 술을 사거나, 선물 현금 등을 줬다”고 진술한 바 있다. 결국 박연차 회장이 건넨 돈의 용처를 밝히는 과정에서 한국레슬링의 심판로비가 만천하에 폭로된 것이다. 아무리 대표선수 격려와 국제심판들과의 친선도모 용이라고 표현해도 ‘심판매수’라는 의혹이 점점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박 회장의 이 발언은 한국에서 먼저 기사화됐고, 이내 일본의 <산케이신문>, 미국의 <스포츠일러스트레이티드(SI)>, <어라운드링스> 등의 외신으로 퍼져나갔다. SI는 이 사건을 보도하면서 “한국의 올림픽운동은 정치적 게임에 능하다(The Korean Olympic movement has been adept at playing the political game)”고 비꼬면서 평창이 동계올림픽 유치에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현재 불구속 상태인 천신일 회장은 재판 중인 사안에 대해서는 입장을 밝힐 수 없다면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 대한레슬링협회 일도 출근을 하지는 않지만 자신의 사무실에서 업무보고를 받으며 정상적으로 회장 일을 수행하고 있다.
단 대한레슬링협회가 이에 대해 ‘억울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대한레슬링협회의 김학렬 사무국장은 <일요신문>과의 통화에서 “공판 때의 녹취록을 다 읽어봤는데 언론보도가 좀 과장된 면이 있다. (천신일) 회장님이 그렇게 직접적으로 말한 것이 아니고, 돈의 사용처에 대한 검찰의 포괄적인 질문에 시인을 했을 뿐이다. 이것이 마치 한국레슬링의 심판로비로 파문이 확산돼 당혹스럽다”고 말했다. 그는 천신일 회장의 거취에 대해서도 “아직 (죄가 있다고) 확정판결이 난 것도 아니고, 또 우리 레슬링협회는 무죄판결이 나올 것으로 확신한다. 이미 레슬링 가족 명의로 법원에 탄원서도 제출했다”라며 회장이 바뀌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답했다.
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전 국가대표 선수 중 한 명은 “심판의 주관이 강하게 작용하는 종목에서는 솔직히 선수의 경기력 외에 해당국가의 외교력도 중요한 요소가 될 수밖에 없다. 그 점에서 한국 레슬링은 이건희, 천신일 회장의 덕을 본 것은 사실이다. 상황에 따라서 심판에게 작은 선물이나, 현금을 줬을 수도 있다.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우리 선수들이 피해를 보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렇게 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심판들에게 선물이나 촌지를 건네는 것보다 각종 레슬링대회를 직간접적으로 후원하며 더 큰 돈을 쓰는 것이 효과적이다. 한국레슬링이 삼성의 후광을 보며 많이 발전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영광이 심판에 대한 뒷돈거래를 통해 이뤄졌다고 확대해석해서는 결코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상황이 이렇게 국익에 반하는 방향으로 흐르자 검찰 내부도 다소 긴장했다는 후문이다. 국내보도에 이어 외신들이 크게 보도하며 국가망신으로 이어지고, 또 김진선 강원도지사가 “평창유치에 큰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고 우려를 표하자 ‘아차’하며 말을 아끼고 있는 눈치가 역력하다.
다행히도 현재까지는 IOC나 국제레슬링연맹 등에서 ‘천신일 발언’에 대해 어떤 반응도 보이고 있지 않다(IOC는 진상조사 소문만 있다). 하지만 향후 이건희 회장의 IOC 활동재개, 국가적인 평창유치 활동,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국제대회에서 한국 레슬링의 역차별 등을 고려하면 이미 말 한마디로 인해 많은 것을 잃어버린 셈이다. 그냥 무시하기에는 그동안의 한국 레슬링과 이건희-천신일 라인이 보여준 정황이 너무 그럴싸하기 때문이다.
유병철 스포츠전문위원 einer@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