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 젖은 야구가 날 웃게 하네요”
▲ 홍순국 메이저리그 사진전문기자 | ||
―살이 진짜 많이 빠졌다. 운동을 열심히 한 모양이다.
▲한 20파운드 정도를 뺐다. 2001년 미국 진출한 이래 가장 열심히 운동을 한 것 같다. 야구가 아니면 류제국이란 사람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마치 벼랑 끝에 서 있는 심정으로 훈련에 매달렸다. 비록 마이너리그지만 원하던 팀이 생겼고 그 팀에서 훈련을 하며 새삼 야구가 고맙고 감사했다. 한 시즌 동안 팀이 없는 상태에서 훈련을 하며 소속팀에 목말랐던 경험 때문에 일단 내가 뛸 수 있는 팀이 생겼다는 사실이 너무 고마웠다.
―지난 연말부터 5개 팀에서 공개 테스트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 테스트에서 합격하지 못할 경우 또 다시 1년을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잠을 못 이룰 정도로 긴장했다고 들었다.
▲마치 월드시리즈 마지막 경기에 투입된 심정이었다(웃음). 에이전트가 각 팀의 스카우터를 애리조나로 불러 실전 투구 모습을 보여주는 형식이었는데 테스트가 있기 전날에는 하루 종일 불안 초조 긴장의 연속이었다. 애리조나, LA다저스, 세인트루이스, 시애틀, 그리고 텍사스까지 총 5개 팀을 상대로 테스트를 받았다. 솔직히 텍사스를 제외한 4개 팀은 에이전트의 부탁에 마지못해 온 것 같았고(웃음), 그나마 텍사스 레인저스 스카우터가 가장 높은 관심을 나타내서 내심 기대는 하고 있었다. 그런데 테스트받고 2주가 지나도 연락이 오지 않아 얼마나 괴로웠는지 모른다. 나중에 알고보니 텍사스 구단주가 바뀌는 등 팀 사정 때문에 결정이 늦어졌던 것이다.
―지난해 에이전트(추신수 에이전트인 앨런 네로)를 교체하면서 복잡한 심정이었을 것 같다. 팀도 없는 상태에서 에이전트를 구하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사실 에이전트가 내 손을 잡아준 것 자체가 감사할 일이었다. 수술로 인해 3개월 동안 세 차례나 팀을 옮겨 다니다 결국 방출당한 선수를 맡는다는 게 어렵지 않았겠나. 신수 형도 도와줬고 앨런 네로가 나에 대해 좋은 기억을 갖고 있었다. 시카고 컵스와 탬파베이에서 활약했던 기록을 정확히 꿰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재활 훈련을 하고 공개 테스트를 받는 시점이 되자 에이전트도 자신이 없었던 모양이다. 나한테 독립리그에서 뛰어볼 생각은 없느냐고 묻기도 하더라. 독립리그밖에 뛸 수 없는 상황이라면 야구 그만두고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그만큼 나한테 주어진 환경이 좋지 않았다.
―텍사스 레인저스와 마이너리그 계약을 맺을 당시의 심경이 어땠나.
▲욕심 같아선 메이저리그 스프링캠프 초청선수 신분으로 계약을 맺고 싶었다. 그러나 2년 넘게 마운드에 오르지 못한 나한테 팀에서 그런 제안을 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처음엔 마이너리그 계약에 약간 실망을 하기도 했지만 트리플A든, 싱글A든 유니폼을 입고 뛸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아들 교빈이가 애리조나에서 태어났다. 교빈이한테 아빠가 야구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아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교빈이가 뱃속에 있을 때부터 아빠가 ‘백수’였기 때문에 아빠는 항상 집에만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할까봐 걱정이 됐다(웃음).
▲ 류제국 가족. | ||
―혼자서 재활훈련을 하기가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중간 중간에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많았다고 했는데.
▲만약 통장 잔고가 바닥을 드러냈더라면 지금까지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신수 형이 아들 무빈이를 낳을 때 통장에 100달러밖에 없었다고 하더라. 그래도 난 그때의 신수 형에 비해 나은 편이라고 위로하면서 마음을 다잡았다. 팀이 없다 보니까 애리조나의 재활센터에 하루 100달러 정도의 돈을 지불하고 이용해야 했다. 그 돈이 시간이 갈수록 엄청나게 쌓여갔다. 돈보다도 날 더 힘들게 한 건 불투명한 미래였다. 다시 마운드에 서리란 보장이 없는 상태에서 아내와 아이까지 괜한 고생을 하는 것 같아 미치겠더라.
―김병현도 샌프란시스코 마이너리그 계약을 맺었다. 두 사람 모두 2년 넘게 쉬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는데, 물론 김병현은 수술은 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병현이 형의 몸이 더 좋아졌을 것 같다. 몸을 다쳐서 쉰 게 아니기 때문에 2년여의 공백이 앞으로 운동하는 데 더 좋은 영향을 미치지 않겠나. 가끔씩 병현이 형의 애리조나 시절 투구폼을 비디오로 감상할 때가 있다. 같은 투수가 봐도 정말 감탄사가 절로 나올 정도로 환상적인 피칭 장면이 많았다. 한마디로 야구보단 ‘아트’에 가깝다. 그런 형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애리조나로 돌아가면 만날 수 있을 것 같은데, 서로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 다음, 빅리그 마운드에서 만났으면 좋겠다.
―스프링캠프가 시작되지 않았는데도 귀국하기 전에 텍사스 훈련장에 나가 선수들과 단체훈련에 참가했다는 얘길 들었다. 이전과는 사뭇 달라졌는데.
▲에이전트가 비록 캠프는 시작되지 않았지만 일찌감치 훈련장에 나가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주라고 부탁하더라. 사실 시카고 컵스 시절의 내 모습은 불성실로 대변됐었다. 훈련 시간의 지각은 늘 내 몫이었고 감독도 아닌, 단장실에 불려 들어가 혼난 것도 내가 유일했다. 한 번은 낮 12시에 경기를 시작하는데 11시 50분에 운동장에 나간 적도 있었다. 메이저리그였고, 팀에서도 대우받고 있는 탓에 눈에 뵈는 게 없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어이가 없는 선수 생활이었다.
▲ 한국에 오면 곱창이 너무 먹고 싶었다는 류제국. 막상 음식 앞에선 굴곡 많았던 이야기 보따리를 푸느라 식사는 뒷전이었다. | ||
―처음 텍사스 레인저스 훈련장을 찾았을 때 기분은 어땠나.
▲이전의 류제국을 버리고 완전히 낮은 자세로 임했다. 훈련도 가장 성실히 소화해냈고 야구장에도 제일 일찍 도착해서 웨이트트레이닝을 시작했다. 재미있는 것은 처음에 텍사스 훈련장을 찾아갔더니 구단 관계자는 내가 텍사스랑 계약했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결국 그날 유니폼이 없어 운동장만 쳐다보다가 집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처음에 선수들은 내 존재를 잘 몰랐다. 마사지를 받을 때도 맨 뒷 순서로 밀리거나 레벨이 낮은 물리치료사가 날 담당했다. 그러다 내 커리어가 알려지고 메이저리그 출신이라는 걸 눈치 챈 뒤론 대우가 달라지더라.
―유니폼을 입고 운동하는 일상이 무척 행복했겠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훈련 프로그램이 무지 고달펐는데도 힘들다는 생각보다는 자꾸 더 하고 싶은 마음만 들었다. 훈련하면서도 입가에 미소가 떠나질 않으니까 선수들이 왜 자꾸 웃느냐고, 훈련이 힘들지 않느냐고 물어보더라. 그래서 난 연습하는 게 너무 즐겁다고 말해줬다. 내가 돈을 안 내고 운동장을, 웨이트트레이닝장을 사용할 수 있는 것도 신난다고 얘기했다. 나와 같은 경험을 한 선수들은 이해를 했고 아닌 선수들은 무슨 말인가 싶었을 것이다.
―시카고 컵스에선 최희섭과, 탬파베이에선 서재응과 한 팀에 있었다. 여러 가지 추억거리들이 많았을 것 같다.
▲희섭이 형은 잔소리 대마왕이었다. 나한테 가장 심하게 쓴소리를 했던 형이다. 워낙 모범적인 생활을 하는 스타일라 내 생활 태도를 이해하지 못했다. 혼도 많이 났는데, 그래도 그런 형이 싫지 않았다. 재응이 형은 의리와 남성으로 대변되는 타입이라 동생 이상으로 나한테 잘해줬다. 서로 힘들 때 맥주를 마시며 많은 얘기들을 주고받았고, 메이저리그에서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도 많이 했다. 물론 형은 한국으로, 난 마이너리그에 머물게 됐지만, 지금의 모습이 끝이 아니기 때문에 서로 좋은 모습으로 마무리할 것이라고 믿는다.
한국에 들어가면 꼭 소곱창을 많이 먹겠다며 ‘곱창 노래’를 불렀던 류제국은 정작 곱창을 앞에 두고선 제대로 먹지를 못했다. 짧은 시간 동안 야구 인생의 나락까지 떨어져봤던 경험들을 곱씹으며 마음이 벅차올랐던 탓이다. 한국에 온 지 하루도 안 지났는데 류제국은 벌써부터 한국이 불편해졌다고 한다. 비자 문제로 잠시 들어왔지만 지금 그가 있을 곳은 한국이 아닌 애리조나 훈련장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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