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판 한번 벌여보자’ 다 모여!
▲ 지난 3일 노무현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열린 신년인사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노 대통령은 작심한 듯 새해 벽두부터 ‘폭탄발언’을 쏟아내고 있어 그의 개각 구상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
노 대통령은 지난 연말 총리공관을 직접 방문해 한명숙 총리와 비공개 송년회동을 갖기도 했으며 연초에는 오랜만에 과천 정부청사를 찾기도 했다. 정치권은 노 대통령의 심상치 않은 일련의 행보 이면에는 마지막 남은 임기 1년 정국 및 퇴임 후 미래구상이 투영돼 있는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노 대통령 특유의 스타일이나 완고한 정치 이념에 비춰볼 때 노 대통령이 또다시 정치권 전체를 확 뒤집어 놓을 수 있는 깜짝 승부수를 준비하고 있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 임기 1년을 앞둔 시점에서 스스로 정치권 논쟁의 중심에 선 노 대통령의 노림수와 수면 아래서 꿈틀거리고 있는 깜짝 승부수를 진단해 봤다.
지난해 12월 중순 ‘고건 전 총리 인사 실패론’을 언급해 고 전 총리 측과 날카로운 신경전을 주고받았던 노 대통령은 12월 28일 GT와 DY가 신당창당에 합의하면서 당 사수파를 수세로 몰아넣었지만 맞대응을 자제하는 듯했다. 연말연시에는 특별한 일정 없이 청와대에서 향후 정국구상에 몰두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제 임기가 1년 남짓밖에 남지 않은 만큼 안정적인 국정운영 플랜을 짜고 있을 것이란 분석이 많았다.
하지만 이러한 분석은 결코 오래가지 않았다. 노 대통령이 연초 일정이 재개되자 또다시 ‘폭탄’으로 비유될 정도의 발언을 잇달아 쏟아냈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은 3일 오후 청와대에서 열린 신년인사회에서 작심한 듯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노 대통령은 이날 “국민들 평가는 잘 받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작년에 완전히 포기해 버렸다. 2007년에는 신경 쓰지 않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발언하는가 하면 “자꾸 ‘레임덕’, 심하면 ‘식물대통령’ 얘기하는데 내가 가진 합법적 권력을 마지막까지 행사할 것”이라는 강한 의지를 보이기도 했다.
앞서 열린 새해 첫 국무회의에서는 “앞으로 국무회의에 매주 참석할 것이다. 국정 마무리와 평가 작업을 본격적으로 했으면 좋겠다”며 행정수반으로서 주어진 모든 역할과 권한을 행사할 것임을 강조하기도 했다.
노 대통령의 폭탄 발언은 여기에 멈추지 않았다. 폭격 대상도 언론과 한나라당을 겨냥한 뉘앙스가 강해 참여정부와 자신에 대해 부정적인 집단에 대해서는 전면전도 불사하겠다는 결의가 묻어 있었다.
4일 과천종합청사에서 열린 경제상황 점검회의에 참석한 노 대통령은 “참여정부의 언론정책이 괘씸죄에 걸렸다. 부실한 상품이 돌아다니는 영역이 미디어 세계다. 이런 불량한 상품은 가차 없이 고발해야 한다”며 대언론을 상대로 융단포격을 가했다.
대신 자리를 함께한 공무원들은 한껏 추켜세우며 “기죽지는 말고 공직 사회가 이 언론 집단에 절대 무릎 꿇어서는 안 된다”며 언론의 보도에 보다 적극적으로 대응할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노 대통령은 또 박정희 전 대통령 시대의 경제성장 업적과 관련해 “박정희 대통령이 아니었더라도 5·16이 없었더라도 공무원들이 우수해 한국 경제가 여기까지 발전했을 것”이라고 발언해 한나라당과 박근혜 전 대표를 자극했다.
특히 노 대통령은 이날 “대통령께서 말 좀 아껴달라”는 이용득 한국노총 위원장의 진언에 벌컥 화를 내며 “공개적인 자리에서 (대통령에게) 모욕을 주는 것이냐”고 곧바로 받아쳐 여론의 향배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비록 임기는 1년밖에 남지 않았지만 레임덕에 신경 쓰지 않고 꿋꿋하게 ‘마이웨이’를 걷겠다는 강한 의지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발언 내용을 잘 들여다보면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나름대로 남은 집권기간을 이끌어 갈 틀과 함께 분당위기에 처한 어려운 여권 상황과 불안한 대선정국을 돌파할 묘수를 가지고 있다는 자신감이 묻어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정치권 관계자들은 노 대통령의 잇따른 폭탄 발언 배경에는 정치적 노림수 내지는 깜짝 승부수가 내포돼 있을 것이란 의혹을 감추지 않고 있다. 언론과 한나라당을 공격 대상으로 삼은 것도 승부카드와 무관치 않을 것이란 관측이다. 즉 노 대통령이 준비하고 있는 승부수는 정치권 전체를 혼란에 빠뜨릴 수 있는 가공할 폭발력을 지니고 있는 만큼 승부카드가 수면위로 부상했을 경우 집중 공세가 예상되는 언론과 한나라당의 예봉을 미리 꺾어 놓겠다는 복심이 깔려 있을 것이란 분석에 힘이 실리고 있다.
▲ (왼쪽부터) 김혁규 의원,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 문재인 청와대 정무특보 | ||
그렇다면 노 대통령이 준비하고 있는 정치적 노림수와 깜짝 승부수는 무엇일까. 정치권 일각에서는 ‘재신임 투표’ ‘하야 가능성’ 등 메가톤급 카드를 모두 소진한 노 대통령 입장에서 더 이상 가용할 수 있는 승부카드가 남아 있겠느냐며 다소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노 대통령 특유의 승부사 기질과 아무도 예상치 못한 기발한 행보에 익숙해져 있는 정치권 관계자들은 노 대통령이 쓸 수 있는 승부카드는 아직도 적지 않을 것이라는데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다만 이전의 노 대통령 승부수가 협박 수준의 충격 발언 내지는 실행에 옮기기 쉽지 않은 추상적인 압박에 불과했다면 앞으로 꺼내들 승부수는 구체적이고 행동으로 옮기는 카드가 될 것으로 이들 관계자들은 관측하고 있다.
청와대 소식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4일 기자와 만나 “노 대통령이 준비하고 있는 승부수는 고유권한인 인사권이 될 것”이라며 “노 대통령은 마지막 총리인선 카드로 정치권을 한바탕 뒤흔들어 놓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지난 연말 노 대통령이 총리공간을 직접 방문해 한명숙 총리와 비공개 회동을 갖는 자리에서 마지막 국정운영 구상과 맞물린 총리 교체 문제를 조율했을 가능성이 높다”며 “한 총리가 당으로 복귀할 경우 후임 총리는 노 대통령이 가장 신뢰하는 인물인 동시에 후계자로 낙점할 인사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 후계자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 관계자는 “김혁규 의원과 유시민 장관이 1순위이고 천정배 의원도 하마평에 오르고 있는 걸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새해 들어 총리를 비롯한 청와대 일부 참모진의 교체설이 나돌면서 일부 언론이 전윤철 감사원장과 한덕수 한·미 FTA체결지원위원장 등 유력인사 몇 명을 후임 총리 후보로 거론하긴 했지만 김혁규 유시민 천정배 등 친노인사들을 총리 후보로 거론한 언론은 거의 없었다.
세 사람 모두 노 대통령이 의중에 두고 있는 차기주자 후보임에는 틀림없지만 총리로 지명하기에는 여권은 물론 한나라당의 집단 반발을 감내해야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 2004년 6월 노 대통령은 지역구도 타파와 최고경영자형 총리론을 주장하며 김혁규 의원을 참여정부 2대 총리로 지명할 뜻을 내비쳤으나 한나라당이 집단적으로 반발할 움직임을 보이자 끝내 김혁규 카드를 접은 바 있다. 또 지난해 2월에는 유시민 의원의 복지부 장관 발탁 과정에서 적잖은 당내 진통을 겪었지만 노 대통령은 강한 의지로 유시민 카드를 밀어붙인 전례가 있다. 노 대통령이 차기 총리로 김혁규 의원이나 유시민 장관의 카드를 꺼내들 경우 여권은 물론 정치권은 전체가 또다시 격랑에 휩싸일 것이란 관측도 이러한 과거 사례에서 기인한다.
▲ 천정배 의원 | ||
여기에 열린우리당 분열이 초읽기에 돌입한 만큼 노 대통령이 친노그룹을 대표하는 차기주자를 확실하게 밀어주는 차원에서 의중에 두고 있는 후계자를 후임 총리로 낙점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게 정치권 관계자들의 시각이다.
천정배 총리 카드는 김혁규 유시민 카드가 여의치 않을 경우 또는 호남민심과 개혁세력 결집이라는 노 대통령의 대권 방정식과 맞물려 현실화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분석이다.
노 대통령은 일단 당은 정세균 의원의 복귀, 당의장 추대로 친노그룹을 다시 하나로 묶어 신당파와 대결시킨다는 복안을 실행에 옮기고 있다. 노 대통령은 이와 함께 행정부는 후임 총리카드와 함께 일부 청와대 핵심 비서진 교체로 새로운 진용을 갖추려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비서진 교체와 관련해 가장 관심을 끄는 인사는 단연 문재인 정무특보다. 문 특보는 잘 알려진 대로 PK(부산 경남)사단을 대표하는 노 대통령의 핵심 측근이다. 문 특보는 참여정부 초대 민정수석-시민사회수석-민정수석-정무특보 등을 거치며 노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해 왔다. ‘왕 수석’으로 통할 정도로 참여정부 실세로 자리매김했고 노 대통령은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아니라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이라며 문 특보를 극찬했다. “DJ(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박지원이 있었다면 노 대통령에게는 문재인이 있다”는 말이 나돌 정도다. 두 사람의 이러한 관계에 비춰볼 때 노 대통령의 퇴임 후 미래구상까지 설계해야 하는 마지막 비서실장 자리는 문 특보가 예약한 거나 마찬가지다.
따라서 노 대통령은 문 특보를 비서실장에 기용하는 등 청와대 비서진도 막강 친정체제로 재정비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노 대통령이 적지 않은 정치적 논란을 예고하고 있는 김혁규 혹은 유시민 총리 카드와 친정체제 구축이라는 비판을 감내하면서까지 문재인 카드를 꺼내들지 여부는 아직 속단할 수 없다. 다만 새해 벽두부터 언론과 한나라당을 상대로 거침없는 폭탄 발언을 쏟아내고 있는 노 대통령의 복심과 자칫하면 조기 레임덕에 빠져 식물 대통령으로 남은 임기를 보내야 하는 절박한 정치적 입지를 감안하면 노 대통령이 고유 권한인 인사권을 담보로 깜짝 승부수를 던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통합신당의 정책노선과 정체성 등을 둘러싼 열린우리당 제 계파 간 갈등이 갈수록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여권은 물론 정치권 전체를 뒤흔들 수 있는 충격 승부수는 무엇일지 또 그 카드를 던지는 시점은 언제일지 정치권의 시선이 노 대통령의 개각 구상에 쏠리고 있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