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 표심 잡기 나서…“마이너 잠룡들 주목해 달라 몸부림”
남경필 경기지사는 “국회와 청와대를 세종시로 이전하는 방안이 논의될 시점”이라며 수도 이전 이슈를 띄웠다. 사진은 5월 12일 국회에서 열린 경기도 여야정책협의회에 참석한 남 지사.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6월 15일 남경필 경기지사는 경기도 양주에서 열린 시장·군수 간담회에서 이같이 말했다. 그는 최근 <일요신문>과의 인터뷰에서도 “서울과 수도권이 이대로 가면 안 된다는 사람이 크게 늘었다. 2020년이 되면 경기도 인구가 1700만 명이다. 전셋값 폭등, 출퇴근 전쟁 등 삶의 질이 매우 나빠지고 있다. 서울·수도권에 권력과 돈이 몰려 생긴 문제다”고 강조했다.
박원순 서울시장과 안희정 충남도지사도 수도이전론에 불을 지폈다. 박 시장은 7월 5일 서울시청에서 열린 취임 2주년 간담회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 때 행정수도를 이전했다고 서울시가 경제적 활력을 잃었나”고 반문했다. 안 지사도 7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행정 중심의 수도 개념에 대해 시민들 상식이 바뀌고 있다면 헌재 결정도 바뀔 여지가 있다”고 호응했다.
여야의 대권잠룡 단체장들이 수도이전론에 대해 한 목소리를 내고 있는 상황인데, 그 ‘타이밍’이 의미심장하다. 수도이전론은 노 전 대통령 대선공약이었다. 2002년 9월 30일 노무현 당시 민주당 대선 후보는 국토균형발전론을 내걸고 충청권 행정수도 공약을 발표했다. 노 전 대통령의 구상은 ‘신행정수도법’에 담겼고 청와대와 국회의 세종시 이전을 포함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듬해 10월 21일 헌법재판소는 신행정수도법에 대해 위헌 판결을 내렸다.
당시 헌재는 “관습헌법에 따르면 서울이 수도다. 서울에 청와대와 국회·대법원이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결국 청와대·국회는 서울에 남고 일부 정부 부처의 세종시 이전을 포함한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 특별법’이 오늘의 ‘세종특별자치시’로 구체화됐다. 헌법재판소의 결정 후 수도이전 문제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런데 대권 잠룡단체장들이 다시 꺼내든 것이다.
세종시 분위기는 들썩이고 있다. 세종참여자치실천연대 관계자는 “세 사람이 동의를 해주니 우리 입장에선 적극 환영이다. 남 지사가 여러 가지 수도권 규제 대책을 강구했지만 전부 실패로 끝났다. 수도권 과밀화 해법은 결국 수도 이전뿐이다. 청와대 국회의 세종시 이전이 바람직하다. 2020년 경기도 예상인구가 1700만 인구를 넘는데 너무 기형적이다. 대한민국의 개조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세종시 공무원도 “사무관 이상만 돼도 국회가 서울에 있어 많이 불편하다. 대정부질문이랑 업무보고 끝나고 지금은 결산시기다. 국장급 이상은 일주일 내내 세종에서 얼굴을 보기 힘들다. 지금처럼 청와대·국회와 세종시가 분할된 상황은 비효율적이다”고 보탰다.
수도 이전은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 헌법이 개정된다면 가능한 시나리오다. 2004년 헌재는 “대한민국의 수도가 서울이라는 사실은 관습헌법이다. 관습헌법은 성문헌법과 동일한 효력을 지니기 때문에 헌법 제130조에 의한 헌법 개정에 의하여만 개정될 수 있다”고 밝혔다. 헌법 제130조에 따르면 국회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에 의한 국회 의결과 국민투표에 붙여 국회의원 선거권자 과반수의 투표와 투표자 과반수의 찬성을 얻으면 된다. 익명을 요구한 한 변호사는 “관습헌법도 헌법이다. 엄격한 개정 요건을 갖춰 의원들이 개헌을 추진할 경우 수도를 옮길 수 있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현실론’이다. 노 전 대통령이 수도 이전을 추진했을 당시 극심한 국론분열이 초래됐다. 당시 한나라당(새누리당 전신)은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행정수도 이전은 사실상 천도계획이다. 천문학적인 비용은 물론 국민 동의도 거치지 않았다”며 정부에 공세를 폈다. 참여정부는 “야당이 여론을 호도하고 있다. 행정수도를 옮기자는 것일 뿐이다”고 맞섰다. 학계와 시민사회 역시 절반으로 갈렸다. 헌재의 위헌판결 뒤에도 논쟁은 잦아들지 않았다. 이명박 정부는 정부청사의 세종시 이전을 추진하기 직전, 세종시 건설을 재검토하겠다고 천명했다. 한나라당을 폭풍속으로 몰아넣었던 ‘세종시 수정안’ 논쟁의 발단이었다.
비극의 역사는 언제든 반복될 수 있다. ‘국론분열’의 조짐이 또 다시 똬리를 틀고 있기 때문이다. 벌써부터 수도이전에 대한 여론이 찬반으로 나뉘고 있다. 리얼미터가 <CBS> 의뢰를 받아 지난 6월 18~19일 19세 이상 남녀 1006명을 대상으로 유·무선 전화로 조사한 결과, “국토 균형 발전과 수도권 주민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 국회와 청와대 등 정치, 행정 관련 국가기관을 세종시로 이전하자는 주장”에 대해 50.1%가 ‘공감한다’고 대답했다. ‘공감하지 않는다’, ‘잘 모름’은 각각 38.6%, 11.3%였다.
앞서의 변호사는 “기존의 법을 뛰어넘은 수도 이전 관련 법은 반드시 국민투표 절차를 거쳐야 한다. 관습헌법을 깨기 위해 어쩔 수 없다. 법률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이미 헌재 판결로 결론이 난 사안을 두고 다시 국민 동의를 얻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얘기다”라고 덧붙였다.
안희정 충남지사.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더민주당 내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더민주 핵심 당직자는 “완전히 포퓰리즘이다. 국토균형발전은 거대한 사상과 철학이 들어있는 계획이다. 수도이전론이 정치 공학식의 ‘아이템’처럼 돼선 안 된다. 솔직히 남 지사가 분권에 대해 무엇을 아나. 충청 한 번 잡아보겠다고 난리 치는 것 아닌가. 안 지사도 콧노래를 부를 수밖에 없다. 마치 중원의 봉건 영주로 군림하고 있다. 갑자기 여당 정치인이 선물을 주겠다는데 당연히 찬성할 수밖에 없다. 수도를 이전하면 안 지사는 마치 자신이 이뤄낸 것처럼 공적을 가져갈 수 있고 노무현 정신과도 연결시킬 수도 있다. 박 시장도 서울의 집중보단 재생을 이야기하는 사람이다. 세 사람이 수도이전을 얘기할 때는 아니다. 우리 국민만 불쌍하다”고 주장했다.
지난 20대 총선 직전 더민주는 총선 공약집에 국회의 세종시 이전을 넣었지만 이틀 만에 백지화했다. 당시 총선공약을 총괄했던 이용섭 전 의원은 기자와의 통화에서 “당시 우리는 1단계로 세종시에 국회 분원을 두고 분원의 성과를 보고 2단계로 국회를 세종시로 이전하자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실무자들이 공약집에 1단계를 누락해서 나온 오해였다. 다만 서울에 국회가 있고 국회가 옮기게 되면 행정수도를 옮겨야 한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김 대표와 총선 공약을 논의할 당시 논란의 여지가 있어 단계별 구상을 짰었다”고 설명했다. 총선 당시에도 더민주 지도부가 ‘수도이전론’ 공론화에 적잖은 부담을 느꼈던 것이다.
새누리당 사정도 다르지 않다. 김성태 새누리당 의원은 7일 “지난 2002년 당시 남 지사는 한나라당의 대변인으로서 ‘충청인을 현혹하는 공약’이라 혹평했다. 어떤 연유로 입장이 뒤바뀌었는지 의문이다. 안 지사는 대한민국과 대권욕을 맞바꾸지 말라”며 직격탄을 날렸다. 당직자들 사이에서도 당황한 분위기가 역력했다. 새누리당의 한 보좌관은 “남 지사가 원내 세력이 없다보니까 무리수를 뒀다. 수도이전론이 국민들의 공감 얻겠나. 안 그래도 세종시 자체도 비효율적이라고 한다. 세종시 이전도 얼마나 우여곡절이 많았나. 세종시 경제가 활성화될 것이라고 했는데 부동산값만 폭등했다. 허허벌판에 정부청사가 들어섰는데 경제활성화가 되겠나”고 반문했다.
정치권에선 잠룡들의 수도 이전 주장에 대해 표를 의식한 행보라며 평가절하하는 기류가 우세하다. 대선에서 캐스팅 보트 역할을 해온 충청권 표심을 잡기 위한 일종의 포퓰리즘(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정치)이라는 것이다. 더민주 다른 보좌관은 “우리나라처럼 지역구도가 분명한 상황에서 특정지역의 힘을 얻지 않고선 대권을 잡을 수 없다. 그곳이 어디겠나. 바로 중원이다. 중원으로 수도를 이전하면 충청표를 잡을 수 있다. 청와대와 국회가 내려온다고 하면 지역 표심이 들썩일 것이다. 이만큼 좋은 아이템이 어디있을까”라고 전했다.
정치권 일각에선 “수도이전론은 대권잠룡 단체장들의 한계를 드러낸 것”이라는 분석도 들린다. 앞서의 새누리당 보좌관은 “국회에서 거리가 멀수록 대권꿈은 멀어진다. 수도이전론은 ‘나를 주목해주시오’라고 몸부림치는 대권 행보의 하나“라고 말했다. 전계완 정치평론가도 “일단 ‘남안박’은 마이너리그 소속이다. 메이저리그 대선주자는 반기문 김무성 문재인라고 할 수 있다. 상대적으로 존재감이 약한 단체장들이 휘발성이 있는 주제로 폭탄 선언을 하듯이 수도이전론을 던졌다. 거물급 주자들이 받으면 화력은 배가가 될 것이다. 사실 마이너리그 주자들은 문제제기만으로도 이익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최선재 기자 s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