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원부터 입시경쟁…가혹한 노동환경…노인 빈곤 급상승…여러분 행복하십니까?
SDSN은 지난 2012년부터 세계 157개 나라를 상대로 국내총생산(GDP), 건강 수명, 정부와 기업 투명성 등을 종합적으로 따져 행복도를 산출하고 있다. 힘들 때 의지할 사람이 있는지 등 정서적인 항목도 평가에 반영된다. ‘한강의 기적’을 일으키며 한때 전 세계인들의 부러움을 샀던 대한민국 국민들은 왜 행복하지 않은 것일까. ‘헬조선’ 대한민국 국민들의 삶을 생애주기별로 살펴봤다.
청소년들은 이미 유치원 때부터 입시경쟁에 시달린다. 노인 빈곤율 상승 속도는 OECD 국가 중 1위다. 사진은 수능시험을 보는 수험생(위)과 서울 파고다공원의 노인. 일요신문DB
대한민국 국민은 태어나자마자 ‘헬조선’을 실감하게 된다. 아니 태어나기조차 힘들다. 지난 2011년 작성된 통계를 보면 신생아 수는 47만 명인데 낙태아 수는 16만 9000명이었다. 통계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음성적인 낙태아까지 계산에 넣으면 더 많은 생명이 낙태로 죽어가고 있는 셈이다.
대한민국 낙태율은 OECD국가 중 1위다. 낙태를 선택하는 사람들은 의외로 미혼모보다 기혼자들이 더 많다. 정부에서 여러 가지 출산장려정책을 시행하고 있지만 헬조선에서 2명 이상의 자녀를 키우는 일은 쉽지 않다. 과도한 양육비와 사교육비, 일과 가정생활을 병행하기 어려운 노동 구조 등이 많은 생명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다는 분석이다.
어렵게 태어난 아이들은 유치원 때부터 치열한 입시전쟁에 시달리게 된다. 입시와 관련해 성적을 비관한 일부 학생들의 자살 소식은 어느새 익숙해졌다. 학교에서 각자 자신의 적성에 맞는 기술을 습득하기보단 모든 학생들이 대학입시에만 매달리는 기형적인 구조 때문에 나타나는 사회적 현상이다.
선진국들과는 달리 기술자를 천대하는 사회적 풍토도 입시전쟁의 한 원인이 되고 있다. 학창시절을 무사히 보내고 취업에 성공한다고 해도 ‘헬조선’은 계속된다. 국민들의 행복지수를 낮추는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는 열악한 노동환경이다. 지난 5월 구의역에서 발생한 19살 지하철 하청업체 노동자의 죽음에 많은 사람들이 슬퍼했던 이유는 ‘남일 같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대부분 국민들은 잠을 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직장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다. 따라서 직장에서의 생활이 행복하지 못하다면 삶의 질이 크게 나빠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대한민국 노동 구조를 살펴보면 매년 비정규직 비율이 늘어나고 있다. 대부분의 비정규직 근로자들은 적은 임금을 받으면서도 위험한 노동환경에 내몰리고 있다.
일례로 지난해 30대 근로자가 지게차에 치이는 사고가 발생했는데 회사 측이 구급차를 돌려보내는 바람에 사망하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 사건을 회사 대표의 도덕적 문제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하청업체에서 산재가 발생하면 원청업체에서 계약을 해지해버린다. 하청업체 입장에서는 산재가 발생해도 숨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하청 근로자들은 일을 하다 다쳐도 보상받을 길이 막막하다. 회사 방침을 어기고 산재 보상을 받은 근로자는 기록이 남아 하청업체들이 고용을 꺼린다.
정규직 근로자들도 마냥 행복한 것은 아니다. 대부분 과도한 업무와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취준생들이 선망하는 대기업에 취업한 신입사원들조차 1년 내 퇴사율이 10%에 달한다. 이렇게 일해도 40세만 넘으면 명예퇴직 압박에 시달린다. 아무리 노력해도 계층이동이 쉽지 않은 현실도 문제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지난해에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저소득층이 중산층 이상으로 올라선 비율은 지난 2014년 22.6%로 역대 최저 수준을 기록했다.
계층 이동의 사다리 역할을 했던 교육도 부모의 경제력에 의해 좌우되게 되면서 개천에서 용이 나는 일은 좀처럼 볼 수 없게 됐다. 경쟁에서 밀려난 이들을 위한 사회안전망이 매우 미비한 것도 심각한 문제다. 이는 ‘묻지마 살인’ 등 이상 범죄 증가의 한 원인이 되고 있다.
지난 2012년 발생한 ‘여의도 칼부림 사건’의 가해자는 8년간 비정규직으로 일했지만 생활고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결국 가해자는 대낮 여의도 노상에서 전 직장 직원 2명을 칼로 찔렀다. 전문가들은 지금의 묻지마 범죄는 대부분 범행하기 쉬운 사회적 약자를 대상으로 발생하고 있지만 조만간 부유층을 상대로 한 범죄나 테러가 발생할 개연성도 충분하다고 경고한다.
사회 도처에 만연한 뿌리 깊은 부정부패도 국민들의 삶을 피폐하게 하고 있다. 국제투명성기구의 부패인식지수(CPI)에 따르면 대한민국부패인식지수는 지난 2008년부터 지난해까지 7년 연속 100점 만점에 54~56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도층의 부정부패는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일반 국민들을 허탈하게 한다.
최근에는 진경준 검사장이 넥슨 주식 거래 의혹으로 구속됐다. 현역 검사장이 구속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진 검사장과 관련한 의혹이 처음 제기됐을 때 검찰은 별 성과 없이 100일 가까운 시간을 허비했다. 제 식구 감싸기라는 질타가 쏟아진 다음에야 특임검사 카드를 빼들었고 수사팀이 꾸려진 지 11일 만에 진 검사장은 구속됐다.
고위 공직자들이 각종 비리에 연루돼도 국민들의 눈높이에서는 솜방망이 처벌에 그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특히 재벌들이나 권력형 비리에 연루된 인사들의 경우는 대통령의 특별사면으로 처벌을 면하는 경우도 많았다. 우리나라 사면제도의 최대 수혜자는 늘 부와 명예를 가진 이들이었다.
고위공직자들에게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사회적 신분에 맞는 도덕적 자세)를 기대하기도 힘든 실정이다. 지난해 백군기 전 의원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아들이 한국 국적을 포기해 병역의무를 면한 고위 공직자가 26명이나 됐다. 무책임한 정부부처의 태도도 헬조선을 만드는 데 일조하고 있다. 가습기 살균제로 수백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지만 본격적인 진실규명이 시작될 때까지 5년이 걸렸다. 살균제의 유해성을 입증하는 연구 결과를 도출하고도 질병관리본부, 식품의약품안전처, 보건복지부 등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아 사태를 키웠지만 책임지는 사람은 없었다.
대한민국 국민이 장년층이 되면 자녀 문제로 골치가 아프다. 취업이 어려워지자 마흔이 넘도록 직업도 없이 부모에게 얹혀살면서 생활비를 타서 쓰는 이른바 ‘캥거루족’이 등장했다. 자녀를 결혼시키는 일도 만만치 않다. ‘2016 결혼비용 실태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신혼부부의 평균 결혼 비용은 2억 7400만 원으로 나타났다. 자녀의 결혼비용을 대려고 노후자금을 모두 탕진해 빈곤층으로 전락하는 경우까지 있다.
인생의 막바지에 이른 노인이 되면 한국인의 삶은 더욱 비참해진다. 대한민국 노인 빈곤율 상승 속도는 OECD 1위다. 대검찰청이 지난해 발표한 ‘2015년 범죄분석’ 자료에 따르면 2014년 처벌된 전체 범죄자 중 8.9%(16만 5400명)가 61세 이상이었다. 10년 전인 2005년 3.9%(6만 6850명)에서 두 배 이상 늘어난 것이다. 2011년 이후 노인범죄 발생 건수는 10대 청소년 범죄 발생 건수를 앞질렀다.
마지막으로 한 전문가는 “역대 정부는 경제발전에만 치중하는 정책 기조를 유지해왔다. 하지만 아무리 국가가 부유해져도 국민이 행복하지 않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라며 “이제부터라도 헬조선을 벗어날 수 있는 생애주기별 맞춤 정책마련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김명일 기자 mi73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