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가도 돼 VS 그래서 안 돼
▲ 지난 1월 1일 한나라당 단배식에서 제일 앞줄에 선 대권주자들(위), 지난 2002년 12월 대선 직후 패배를 인정하는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후보. | ||
반면 한나라당의 고공행진은 자신들의 동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여권의 추락에 따른 반사이익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하는 이들도 많다. 이는 현재의 한나라당 지지율이 거품이라는 주장을 설득력 있게 뒷받침하는 논거가 된다. 또한 영남 보수세력을 기반으로 하는 지역정당이라는 꼬리표와 중도개혁세력을 대변하지 못하고 수구정당에 머물러 있다는 비판도 따른다. 이런 부정적 요인들 때문에 “한나라당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다. 이번 대선에서 또 다시 참패할 것”이라는 진단도 있다. 한나라당은 과연 10년 ‘야인’ 생활을 접고 비단길을 걷게 될까.
필승론
이번 2007년 대통령 선거를 예측하는 전문가들 사이에 일종의 ‘법칙’처럼 굳어진 예측 가운데 하나가 바로 보수 필승론/진보 필패론이다. 최근 잇단 논쟁으로 시끄러운 진보진영은 이론적인 한계를 노정하면서 지리멸렬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여기에 진보색채를 띤 노무현 정권의 실정으로 국민들 사이에서 “역시 진보진영의 집권은 우리나라 정치 상황에는 이르다”는 공감대도 확산되고 있다.
보수 필승론은 현재의 사회 분위기와 직결된다. 경기가 계속 위축되면서 개혁보다는 경제적 안정을 원하는 층이 늘어나고 있고, 1987년 이후 민주주의는 어느 정도 성숙되었다고 보는 탈 이념화 등의 영향으로 우리 사회가 보수화의 단계로 들어가고 있다는 분석이다. 실제로 동아시아연구원 등이 최근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2년 전과 현 시점을 비교할 때 20대 진보성향은 43.8%에서 24.4%로, 30대 진보성향은 33.5%에서 22%로 크게 줄어든 것으로 조사됐다. 같은 기간 보수성향은 20대가 23.2%에서 29.1%로 늘었고 30대는 27.8%에서 27.2%로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보수세력의 결집도 필승론을 확대시키고 있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 김헌태 소장은 “옛날같으면 선거 날에 골프 치러 갔을 소위 보수라는 사람들이 이제는 노무현 정권의 실정을 심판하기 위해 선거하러 나올 태세다”라고 말한다. 또 다른 한 전문가는 “특히 지난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를 지지하며 분열되었던 영남 유권자들 사이에서 ‘영남 출신 후보로 잃어버린 10년을 되찾자’는 인식이 분위기가 강하게 확산되고 있다. 반면 호남의 경우 역대 선거마다 90% 이상의 압도적 지지를 했던 투표성향에 변화가 오고 있다. 이명박 전 시장이 호남지역에서 20%대의 지지율을 보이며 정동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10% 미만)을 앞서고 있는 것이 좋은 예”라고 분석하고 있다.
이번 대선이 민주화세력 10년 집권에 대한 평가가 될 것이라는 점도 보수진영으로 하여금 미소를 짓게 하고 있다. 진보 담론을 촉발하고 있는 최장집 고려대 교수조차 “참여정부 정책은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심화, 양극화의 심화, 대중생활의 파괴 등 ‘노동 없는 민주주의’를 가져 왔다. 이는 노무현 정부의 실패를 입증하는 중요한 현상”이라고 진단한다. 국민들은 진보진영도 인정한 노무현 정권의 실정을 투표를 통해 심판하게 될 경우 보수세력에게 집권할 기회가 더 커지고 있는 것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한나라당의 지지율이 거품이 아닌 실체가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한나라당에서 오랫동안 여론조사를 연구해온 한 관계자는 이에 대해 “지난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은 공천비리, 박계동 몰카 사태 등 악재가 지속적으로 터져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여론조사 예측대로 압승했다. 또한 한나라당은 웰빙당, 성추행당, 골프당, 영남당 등 온갖 악재를 뒤집어썼지만 지지율은 여전히 40~50%대를 유지하고 있다. 국민들은 겉으로 드러난 이미지보다 한나라당이 뭔가 변화를 가져다 줄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여권 통합신당의 지지도도 바닥을 기고 있고 후보 선정 문제가 국민적 신뢰를 못 얻고 있는 것도 당 지지율을 더욱 굳건하게 지켜주고 있다”라고 밝혔다.
국민 의식의 변화도 눈에 띈다. 과거 역대 대선의 승패를 좌우했던 핵심적인 변수는 개혁-수구의 이념구도, 영남-호남 지역구도, 노-소 간 세대구도를 꼽을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구도들은 민주주의의 성숙과 국민 의식의 변화로 계속 약화돼 왔고 앞으로 그렇게 될 가능성이 크다. 정치학자 A 씨는 이에 대해 “지난 2002년 대선은 개혁과 수구의 이념 구도에 인터넷 지지층으로 대변되는 세대갈등 구도 때문에 노무현 대통령이 승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나라당은 지역주의에 의존해 수구세력으로 몰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런 구도는 점차 허물어지고 있다. 호남지역에서의 한나라당 후보 약진이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이럴 경우 20%의 확실한 지지층을 가지고 있는 한나라당 후보가 기존 대결 구도에서 떨어져 나온 부동층이나 중도세력을 흡수할 공간이 훨씬 커진다. 반면 이념색채가 엷어진 여권 지지자들이 대거 한나라당으로 이동할 가능성이 커진다. 지금처럼 서민생활이 힘들어진 상황에서는 개혁-보수 논쟁이 아닌 실용주의 노선 구도가 빅 이슈가 될 가능성이 크다. 이 경우 한나라당이 외연을 확대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지지율만 보면 ‘태평성대’를 구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한나라당은 과연 대권 점령 8부 능선을 넘었을까. 회의적이다. 이는 한나라당의 내부 사정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의원들을 통해서 먼저 확인된다. 수도권 출신 한나라당 한 의원은 “이번 대선에서도 한나라당은 필패한다”고 말한다. 그가 지적하는 필패론의 요체는 보수중도세력을 아우를 수 있는 역량 부족과 자기 혁신의 부재다.
그는 이에 대해 “한나라당은 대선에서 두 번이나 지고도 백서 하나 내지 않은, 전략도 철학도 없는 당이다. 그저 현실에 안주하다가 문제가 생기면 윤리위 회부나 봉사활동이 전부다. 여당이 지금 지리멸렬해 싸우고 있지만 새로운 정치환경을 위한 산고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하지만 5공 검사 출신인 강재섭 대표가 수장으로 있는 한나라당은 민정당 이래 하나도 변한 게 없는 것 같다. 권력 줄대기, 보신주의, 중상모략, 대안 없는 비판, 자기 개발 없는 지역주의 안주 등 이루 말을 할 수가 없다”고 신랄히 한나라당을 비판하면서 “한나라당은 스스로 뼈를 깎는 자기혁신이 없으면 이번 대선에서도 결코 승리할 수 없다. 여권의 실책으로 계속 점수를 내는 건 의미가 없다. 진정한 중도보수세력으로서 집권할 수 있는 홈런을 때려야만 국민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고 10년 야당의 설움도 씻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밝혔다.
한나라당은 내부적으로 변화하지 못하는 수구적 행태를, 외부적으로도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해 이번 대선에서도 실패할 것이라는 견해도 나온다. 최근 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한 6자 회담이 타결돼 한반도는 한국전쟁 이후 계속돼 온 냉전 체제를 종식시키고 새로운 평화 체제를 구축해야만 한다. 여기에 올해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될 가능성도 매우 높아지고 있다. 이에 따라 현 대선 구도에도 변화가 예상되고 있다.
남북화해국면의 진행과 함께 주시해야 할 포인트는 유권자들의 동향이다. 열린우리당 정책 관련 관계자는 이에 대해 “그동안 노무현 정권의 무능으로 진보 가치가 전면적으로 외면당해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범여권 유권자들이 남북 관계 개선과 평화 체제에 대한 희망을 걸고 서서히 여권 후보 지지쪽으로 돌아설 모멘템이 마련됐다고 볼 수 있다. 특히 한나라당으로 기울었던 진보 또는 중도성향의 유권자들이 제자리로 돌아설 계기가 되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때문에 향후 대권 구도가 여권이 바라는 한나라당 대 반한나라당으로 설정될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여기에 대선을 앞두고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돼 남북 관계에 획기적인 진전이 있을 경우 표심은 크게 요동칠 것이다. 그동안 대북 퍼주기 등으로 공세를 펴온 한나라당으로서는 최악의 시나리오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서는 지난 연말 한 보고서를 통해 “2007년 대선 정국이 평화 대 전쟁 구도로 급변할 가능성이 있다”며 이를 위한 ‘한반도 평화 프로젝트’를 제시한 바 있다. 한나라당은 “큰 의미에서의 포용정책까지 포함한 근본적인 재검토 작업을 할 계획”이라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당 후보들의 대북 스탠스는 여전히 보수적이다. 그동안 남북문제에 대해 가장 보수적인 입장을 고수했던 박근혜 전 대표는 입지는 더 좁아질 가능성이 있고 이 전 시장의 주장도 한나라당의 대북 관계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향후 대북 관계 설정을 더욱 옹색하게 만들 가능성이 있다. 올해 대선의 화두가 경제에서 평화로 급선회할 경우 이 전 시장에게는 악재인 동시에 한나라당의 재집권에도 재앙이 될 가능성이 높다.
셋째는 유권자의 의식이다. 앞서 필승론에서 살펴본 바에 따르면 우리 사회가 대체로 보수화 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느 게 사실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여전히 진보가 강세를 보이고 있다”고 진단한다. 각종 여론조사 결과를 종합해 보면 유권자들의 진보-보수 성향은 거의 백중세를 보이고 있다. 그렇다면 ‘진보적’이라는 응답이 예상외로 많이 나오는 이유는 뭘까. 한 여론조사 전문가는 이에 대해 “무엇보다 상당수 유권자들이 ‘진보’에 대해 막연한 호감을 갖고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거꾸로 말하면 ‘보수’에 대해 막연히 반감을 갖고 있다는 것이 된다. 이는 현 정부 실정에도 불구하고 각종 조사결과 보수층이 급격히 증가하지 않는 점과 맥이 통한다. 보수세력에 대한 일반 유권자들의 불신이 여전하다는 의미다. 때문에 전체 국민들의 이념성향이 보수화 됐다고 보기는 시기상조라는 의견도 설득력이 있다. 마치 집권한 것처럼 큰소리치는 한나라당으로서는 유념해야 할 대목이다”라고 밝혔다.
또한 한 여론조사에서는 차기 대통령의 이념 성향과 관련한 질문에 대해 ‘진보적인 성향이었으면 좋겠다’는 응답이 50.6%에 달한 반면 ‘보수적이었으면’하는 응답이 22.4%에 그친 점도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최근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가 조사한 것도 이와 유사하다. 차기 정부의 이념성향에 대해 진보적이어야 한다는 응답이 39.8%, 보수적이어야 한다는 17.3%에 머물고 있다. 이런 조사결과를 보면 보수 필승론이 아니라 보수 필패론으로 귀결될 수 있는 대목이다.
여기에 한나라당 대선 후보들의 분열 가능성, 영남에 기반한 지역주의 정당의 한계 등도 한나라당 필패론을 더욱 부추기는 적폐다. 한나라당 한 재선 의원은 “부패정당 이미지 탈피를 위해 당내 개혁을 해야하고, 젊은 세대는 언제든 지지를 철회할 수 있는 만큼 젊은 세대 문화와 감성에 대해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당내 문화를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