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조직 이미 물밑서 ‘가동’
▲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의 대망론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정 전 총장의 측근에 따르면 그는 5월 중 대선베이스캠프 성격의 개인사무실을 열 예정이라고 한다. | ||
정치권의 끊임없는 구애전에도 불구하고 정작 영입 당사자인 정 전 총장은 별다른 표면적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자칫 그들만의 영입 경쟁에 그칠 것이라고 보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정 전 총장을 잘 아는 지인들은 ‘정운찬 대망론’이 현실화될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고건 전 총리의 학습 효과를 간접 체험한 정 전 총장이 서둘지 않고 정치권 입문을 위한 명분 쌓기와 대권행 열차에 올라 탈 타이밍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고 일부 지인들은 전하고 있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정 전 총장의 비밀조직이 이미 물밑에서 움직이고 있고 5월 중에 대권 베이스캠프 성격의 개인사무실을 오픈할 것이란 보다 구체화된 플랜까지 나돌고 있다. 노 대통령 탈당 이후 다시 꿈틀거리고 있는 ‘정운찬 대망론’의 실체 및 정 전 총장의 대권 본심을 들여다 봤다.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은 이미 오래 전부터 범여권 예비 잠룡으로 분류돼 왔다. 범여권발 정계개편 움직임이 가시화되는 과정에서 범여권 차기주자들의 바닥권 지지율과 맞물려 그 대안세력으로 꼽혀 왔던 것. 하지만 정작 정 전 총장은 “정치에 생각이 없다”며 정치권 입문 가능성을 일축해 왔다. 그럴 때마다 정가에서는 때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란 관측이 우세했다.
그런 그가 지난해 12월 중순을 전후해 대권 속내를 살짝 드러내는 듯한 행보를 보이면서 이른바 ‘정운찬 대망론’이 연말 정국을 뜨겁게 달구기 시작했다. 지난해 12월 20일 정 전 총장은 한 방송과의 인터뷰에서는 “정치를 하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 없다”고 발언해 정치 입문 가능성을 열어 놨다. 한 발 더 나아가 12월 26일 재경 공주 향우회 송년 모임에서는 ‘충청 중심론’을 강조해 대권 경쟁에 뛰어드는 것 아니냐는 관측을 낳기도 했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당시 열린우리당 당의장이었던 김근태 전 의장과 정 전 총장이 비밀회동을 가졌다는 얘기가 나돌면서 ‘정운찬 대망론’은 더욱 탄력을 받을 듯한 기세였다.
하지만 올해 들어 정 전 총장은 “대권에 관심이 없다”는 입장을 피력하는 등 다시 신중 모드로 전환했다. 그는 1월 4일 고려대 특강에서 “대통령에 관심이 없으며 후보로 나설 생각이 없다”며 “여권에서는 불이 꺼져가니까 나를 불쏘시개로 이용하려 하고 있고 언론은 한나라당 독주에 맞설 상대로 나를 흥행카드로 이용하고 있지만 관심이 없다”며 정치권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정 전 총장의 이같은 발언은 활활 타오를 듯했던 ‘정운찬 대망론’을 다시 수면 아래로 잠복시키는 계기가 됐다.
그렇다면 정 전 총장은 정말로 대망론 꿈을 접은 것일까. 정치권 관계자들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에 힘을 싣고 있다. 범여권의 유력한 대권주자였던 고건 전 총리의 갑작스런 퇴장에 이은 노 대통령과 열린우리당 일부 의원들의 탈당 사태, 여전히 안개 속을 걷고 있는 범여권 통합신당 움직임 등 급변하고 있는 정국상황을 감안해 신중에 신중을 기하고 있는 것으로 이들 관계자들은 관측하고 있다. 또 정치적 기반이 전무한 정 전 총장이 기존 대권주자들과 공정한 경쟁을 펼치기 위해서는 이들의 기득권 포기가 선행돼야 하는데 그 누구 한 사람도 아직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는 현실도 정 전 총장의 결심을 주저하게 하는 요인이 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정 전 총장과 가까운 지인들은 최근 들어 부쩍 ‘정운찬 대망론’이 현실화될 가능성에 무게감을 싣고 있다. 정 전 총장은 현역 정치인이 아닌 비 정치인 지인들을 주로 만나고 있는 걸로 알려졌다. 현역 의원 중에는 오랫 동안 친분을 쌓아온 김종인 민주당 의원을 자주 만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정운찬 대망론’이 재부상하면서 정 전 총장의 ‘정치적 멘토’인 김 의원의 주가도 동반 상승하고 있다. 정 전 총장의 정치 대리인으로 주목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김 의원도 최근 각종 언론 매체에 출연해 정 전 총장의 대리인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지난달 27일 한 라디오 시사프로에 출연한 김 의원은 범여권의 정 전 총장 영입 경쟁과 관련해 “정 전 총장 본인의 결정이 가장 중요한 것이지만 본인이 판단하기 전에 좋은 ‘조건’을 만들어줘야 한다”며 “정 전 총장이 만약 나선다면 열린우리당은 아닐 것이며 새로운 정치세력이 생겨나는 곳일 수 있다”고 강조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김 의원은 또 같은 날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를 통해 “그 사람(정운찬)을 단순히 성공한 경제학 교수, 서울대 총장 정도로만 봐서는 안 된다. 최소한 지금 나와있거나 언급되는 다른 대선 후보보다 훨씬 낫다”며 정 전 총장의 경쟁력을 높게 평가하기도 했다.
정 전 총장의 스승인 조순 전 부총리도 정 전 총장의 정치 참여를 권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교수나 공부는 그만큼 하면 됐으니 나라를 위해 일하는 기회를 가져봐라”고 조언하고 있다는 후문이다.
김종인 의원 외에도 계파와는 관계없이 열린우리당 민병두 우상호 의원과 탈당그룹의 우윤근 이계안 의원 등 일부 통합세력들이 ‘정운찬 영입 모임’을 만들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도 정 전 총장의 마음을 흔들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정 전 총장은 얼마 전 경기고 선후배 사이로 야권 예비 잠룡으로 분류되고 있는 A 의원과 전화통화에서 “연말 대선에서 같이 붙어보자”며 농담을 건넨 것으로 알려져 심경에 변화가 일고 있는 게 아니냐는 관측이 설득력 있게 제기되고 있다.
지난 28일 기자와 만난 정 전 총장의 측근 B 씨는 익명을 전제로 ‘정운찬 대망론’의 실체를 한마디로 말한다. “정 전 총장은 반드시 이번 대선에 나올 것이고 그가 범여권 단일후보가 돼 한나라당 후보와 맞대결을 펼칠 경우 필승할 것”이라는 것이다. ‘정 전 총장은 여전히 대권 출마에 부정적이지 않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B 씨는 “아직은 시기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있는 것 같다. 일부 핵심 측근들은 비밀리에 조직을 결성하고 활발히 움직이고 있다.”며 “4월 재보선 이후 5월 중 대권 베이스캠프 성격의 개인사무실을 오픈할 계획인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B 씨는 또 정 전 총장의 4월 재보선 출마설과 관련해서는 “전혀 뜻이 없고 충청권 민심을 끌어안기 위해 심대평(국민중심당) 대표가 출마할 경우 그를 직간접적으로 지원할 방침을 세워 놓고 있는 걸로 안다”고 전했다.
고공행진을 이어가고 있는 한나라당 주자들의 지지율에 비춰볼 때 ‘정운찬 카드’ 필승론은 너무 자의적인 판단이 아니냐고 반문하자 “충청 출신인 정 전 총장은 ‘충청 대망론’으로 대국민 통합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유일한 후보이고 차기 대권 최대 이슈는 ‘경제’가 될 것이란 관측에 비춰볼 때 경제 전문가로서 손색이 없고 검증 논란에 휩싸인 한나라당 후보들에 비해 깨끗한 이미지를 갖추고 있어 어떤 후보와 상대해도 반드시 이길 것”이라는 논리를 폈다.
B 씨의 주장대로 정 전 총장이 이번 대선에 도전장을 내밀지 또 그가 출마할 경우 범여권의 필승카드가 될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그러나 끊임없이 대두되는 대망론이 무엇인가를 말해 주고 있다는 것이 정치권의 시각이다. ‘정치는 생물’이라 했듯이 범여권 내 통합세력들의 기득권 포기 등 정 전 총장이 대권 경쟁에 뛰어들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된다면 그의 마음도 언제든 바뀔 여지가 충분하다고 보는 듯하다.
정 전 총장이 한동안의 부인과 침묵 끝에 지난 23일 모처럼 그리고 하필이면 고향의 공주대 특강에 나서 “차기 대통령 후보는 기초가 튼튼하고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인물이어야 한다”며 대권 관련 발언을 한 배경에는 그의 심경 변화 가능성과 함께 꺼지지 않은 ‘대망론’이 자리 잡고 있을 것이란 관측에 힘이 실리고 있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