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소장 접수되자마자 해외도주 준비 착착…경찰 ‘뒷북 수사’ 논란
한 투자자가 보관하고 있던 조 씨 부부 사진.
사기 혐의로 피소된 부부는 지난 2006년부터 강남 영동시장 일대를 중심으로 ‘투자자’들을 모았다. 자신을 한 투자개발회사의 대표라고 소개한 조 아무개 씨는 부인 김 아무개 씨와 함께 투자자들과 친분을 쌓으며 돈을 맡길 것을 권유했다.
부부는 돈의 운용 방식을 투자자들마다 각각 다르게 설명했다. 평소 친분이 있었음에도 의심하며 선뜻 돈을 맡기지 않는 투자자에게는 제1금융권 및 잘 알려진 대부업체 등 기관에 투자해 “월 1~2% 이익금을 배분하겠다”고 설명했고, 별다른 친분 없이 소개를 받아 알게 된 투자자에게는 “거액의 투자금을 운용 중이다. 매달 28%의 이자를 지급하겠다”고 말하는 식이다.
피해를 당했다고 주장하는 투자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이들은 부부에게 주택 담보 대출, 카드론부터 가족과 친지, 지인들의 돈까지 끌어 모아 돈을 맡겼다. <일요신문> 첫 보도 당시 확인된 투자자는 12명, 투자금만 51억 8600만 원이었다. 이후 부부에게 돈을 맡겼던 투자자들이 추가로 나타났고 금액은 100억 원을 훌쩍 넘겼다.
부부가 여러 개의 차명계좌를 사용해 왔기 때문에 전체 투자자와 투자금 총액은 아직도 확인이 어렵다. 대부분의 피해 투자자들은 부부에게 전 재산을 맡긴 데다 대출까지 받은 상태다. 일부 투자자는 당장 이번 달부터 수백만 원에서 수천만 원에 이르는 대출 이자를 내야 한다. 한 투자자는 사건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져 병원 치료를 받고 있다.
# 한 통의 전화
그런데 지난 8월 2일, 한 가족이 모인 자리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앞서의 사기 혐의로 피소된 조 씨였다. 한 달 전인 지난 7월 8일, 베트남으로 출국한 뒤 행방이 묘연했던 조 씨가 자신의 모친 생일을 앞두고 평소 가깝게 지내던 친척에게 몰래 전화를 걸어온 것. 그는 “연락은 자주할 수 없다. (한국에) 남아있는 가족을 잘 부탁한다”고 말했다.
이들 가족들은 조 씨의 전화가 달갑지 않았다. 가족들 중 일부가 투자금 명목으로 조 씨에게 돈을 맡겼다가 돌려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조 씨는 전화로 해외에 있다는 사실만을 알렸고 구체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조 씨와의 통화 내용은 금방 피해 주장 투자자들에게 전달됐다. 곧 한 투자자가 발신 번호를 통해 조 씨가 캄보디아에서 전화를 걸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부부가 캄보디아로 이동했다는 것은 피해 투자자들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라고 한다. 베트남의 경우, 앞서 조 씨가 친분을 쌓은 투자자들에게 베트남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했기 때문에 도주지로 선택할 것으로 예상은 했지만, 캄보디아에 대한 이야기는 처음 들었다는 것. 조 씨는 그동안 “베트남에 일부 투자를 하고 있다” “하노이에 한인들이 거주하는 곳이 있는데, 이곳에서 한 사업체를 꾸리고 있다” 등의 얘길 하곤 했다고 한다. 심지어 일부 투자자들에게는 베트남에 주택을 구입했다고 자랑을 하기도 했다.
# 계획적 도주?
반면 조 씨 가족과 지인 등에 따르면, 조 씨는 약 두 달 동안 계획을 세우고 캄보디아 행을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관련 정황이 최근 입수한 자료와 지인들의 증언을 통해 속속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조 씨에 대한 고소장은 지난 5월 23일 처음 접수됐다. 10억여 원을 맡긴 한 투자자가 올해 초부터 원금 반환을 요구했으나 조 씨 부부가 차일피일 미뤘고, 사기를 의심해 서울중앙지검에 고소장을 제출한 것.
그런데 최근 조 씨 가족이 입수한 조 씨의 5월 휴대전화 통화 내역을 보면, 그는 지난 5월 31일부터 6월 1일 사이 캄보디아로 전화를 수차례 걸었다. 통화 내역서에 나타난 전화번호는 일부가 ‘*’로 표시돼 있었지만 나머지 숫자는 모두 같았다. 통화 시간은 1분에서 10여 분까지 다양했다.
조 씨가 캄보디아에 전화를 걸었던 시기는 고소장을 접수한 앞서의 투자자가 조 씨 부부를 상대로 항의와 회유를 하던 시기와 겹친다. 또한 조 씨가 운영하던 사업체와 주택 일부의 월세가 지급되지 않기 시작한 때이기도 하다. 지난 7월 8일 베트남 출국 전부터 미리 계획을 했다는 의혹이 불거지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 도박
조 씨 지인들의 증언도 이를 뒷받침한다. 이들에 따르면 조 씨는 최근까지 서울 강북을 기반으로 활동하던 한 조직폭력단의 조직원이었다. 그런데 최근 조 씨가 베트남으로 출국한 당일 조직원 4명이 동반 출국한 사실이 밝혀졌다. 조 씨의 한 지인은 “조 씨와 가까웠던 일부 조직원이 미리 베트남과 캄보디아에 ‘자리’를 잡아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지인이 언급한 ‘자리’는 불법 온라인 도박 사이트라고 한다. 조 씨와 함께 사라진 조직원 중 한 명이 도박 사이트를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
조 씨 역시 도박에 관심이 높았다고 한다. 그는 과거 ‘바다 이야기’ 사업장을 차려 운영하다 적발되기도 했고, 경마에 심취했다는 증언도 있다. 앞서의 조 씨 지인은 “해외에 서버를 두고 개설한 불법 도박 사이트는 적발 위험도 낮고, 큰돈을 벌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며 “조 씨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조 씨와 친분을 쌓았던 일부 투자자들의 증언과 일치한다. 그동안 조 씨는 투자자들에게도 도박을 한다는 이야기를 종종 하면서 “잘 아는 곳이 있다”며 함께할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
# 경찰 수사는 진전 없어
시간이 지나면서 피해를 주장하는 투자자들이 지속적으로 등장하고, 투자금의 행방도 묘연해지고 있지만 경찰 수사는 더디기만 하다. 특히 한 투자자가 이 사건과 관련, 국가를 상대로 5억 원대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수사는 진전되지 않고 있다.
지난 7월 11일 앞서의 피해 주장 투자자는 서울중앙지법에 국가를 상대로 “출국금지 신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피해가 발생했다”며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이 투자자는 지난 5월 23일 서울중앙지검에 조 씨에 대한 고소장을 접수하면서 “해외 도주 우려가 있다”며 출국금지 의뢰신청서를 제출했다.
수사는 서울 강남경찰서가 맡게 됐는데, 출국금지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때부터 지난 7월까지 경찰에 총 6차례 출국금지 의뢰신청서를 제출했지만 모두 허사였다. 조 씨는 경찰 조사가 예정된 지난 7월 8일 베트남으로 출국했고, 이 사실을 확인한 경찰은 뒤늦게 이들 부부에 대해 체포영장을 청구했다. 앞서의 투자자는 “조 씨 부부가 베트남으로 출국하기 하루 전인 지난 7월 7일, 이들이 베트남으로 출국한다는 사실까지 알리며 마지막 출국금지 요청을 했지만 경찰이 무시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처음 사건을 접수했던 강남경찰서 관계자는 “최초 고소 내용과 김 씨 부부 명의의 통장을 확인한 결과 내용이 일부 달랐다. 출국금지는 강제 조치라 최소화하는 게 원칙이다. 피소된 부부가 소환 조사에 응하지 않으면 출국금지를 요청할 계획이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조 씨 부부 출국 이후 강남경찰서는 담당 수사팀을 교체했다.
현재 또 다른 투자자들이 차례로 고소장을 접수하고 있다. 캄보디아에서 걸려온 조 씨의 전화와 불법 온라인 도박 사이트 관련 제보도 이어지고 있지만, 아직 고소인 조사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다.
현재 앞서의 수사팀에서 사건을 이첩받아 담당하고 있는 강남경찰서 관계자는 “이전 수사팀에서 사법공조 등 필요한 절차에 대한 업무를 해놓은 것으로 알고 있다”며 “수사는 진행할 것”이라고 짧게 답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