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도장’ 일본 프로기사들 자식교육 도맡아
그후 10여 년의 세월이 흘러 홍맑은샘은 현재 도쿄에서 본인의 성을 딴 ‘홍도장’(洪道場)을 열어 후진 양성에 힘쓰고 있다. 일본에서 염원하던 입단에도 성공, 작년에는 천원전 본선에도 진출하며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다.
16일 서울 가양동 탐라영재관에서는 ‘제4회 맑은샘배 어린이 바둑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는 전국아마 3단 이상 초등생 총 142명이 참여했는데 전국의 난다 긴다 하는 바둑영재들이 총 출동했다. 그리고 홍맑은샘과 그의 부친 홍시범 씨는 4년째 이 대회를 후원하고 있다.
서울 가양동 탐라영재관에서 열린 제4회 맑은샘배 어린이 바둑대회. 홍맑은샘이 어린이들의 대국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홍시범 씨(58)는 바둑대회장 세팅을 전문으로 하는 업체 ‘클럽 A7’의 대표다. 일반에겐 조금 생소할 수 있는데 이를 테면 ‘바둑대회 디자이너’라고나 할까, 대회장에 바둑판 세트와 테이블, 의자를 배치하고 각종 플래카드와 홍보물 등을 제작, 설치하는 일도 한다. 2003년부터 시작했는데 이제는 그가 없으면 우리나라 바둑대회가 어떻게 치러질지 걱정될 정도다.
아들 맑은샘의 일본 진출도 그가 권했다. “한국에선 입단하더라도 나이가 많아 대성하기 어렵다고 봤습니다. 그럴 바엔 차라리 일본으로 건너가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 생각했지요. 어려움도 많았을 텐데 본인이 열심히 노력해서 자리를 잡은 것 같아 흐뭇합니다.”
맑은샘배는 아버지와 아들의 합작품이다. “저도 어릴 때 힘든 과정을 밟으며 바둑공부를 했기 때문에 후배들의 어려움을 잘 압니다. 시합과 연습은 달라요. 아이들은 시합을 통해 빨리 성장할 수 있습니다. 대회를 통해 ‘이기는 맛’을 알게 되면 성장하기 위해 스스로 더 노력하게 되지요. 그래서 바둑대회를 열게 됐습니다.” 올해는 7명의 일본 제자들을 이끌고 한국에 왔다. 하지만 입상은 바라기엔 아직 실력 차이가 있어서 한 명도 예선을 통과하지 못했다.
홍시범(왼쪽)과 홍맑은샘 부자. 부친 홍 씨는 바둑대회장 세팅 전문 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일본은 기타니 도장 이래 전문적인 도장이 없었는데 홍맑은샘이 수십 년 만에 다시 도장 문화를 만들어냈다. 당연히 일본 최고의 명문도장이다. 지난 10년간 배출한 입단자는 13명. 이 중에는 후지사와 슈코 9단의 손녀 후지사와 리나 3단과 떠오르는 별 이치리키 료 7단 등도 포함돼 있다.
“리나는 여섯 살 때 우리 도장에 처음 왔습니다. 10여 년 같이 공부했으니 제자라기보다 막내 여동생 같고, 딸 같고 그렇습니다. 입단 이후에도 자주 도장을 찾아옵니다. 벌써 여류 타이틀을 따냈으니 가르친 보람이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리나의 아빠, 그러니까 후지사와 슈코 9단의 아들이 되겠죠. 후지사와 가즈나리 9단도 현재 바둑도장을 운영하고 있는데 정작 여식은 제게 보내서 공부를 시켰습니다. 재밌죠. 자식을 본인이 직접 가르치는 것은 정말 어려운 법인가 봅니다.”
4년 전 입단한 이치리키 역시 일본의 신흥강자로 어느덧 타이틀을 엿보고 있는 유망주.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최강전 일본대표로 출전할 정도의 강자다.
하지만 정작 지도자 홍맑은샘이 기대하는 제자는 따로 있단다. 바로 작년에 입단한 시바노 도라마루 2단. “이치리키보다 세 살 어린데(99년생) 재질이 아주 좋습니다. 국내 바둑팬들도 이름을 기억해둘 만한 친구예요. 입단 2년 차에 벌써 본인방전 본선리그를 목전에 두고 있고, 얼마 전 신안에서 열린 국수산맥 국제바둑대회에 일본대표로 출전할 만큼 실력을 인정받고 있습니다. 장래 현 일본 일인자 이야마 유타를 위협할 만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작년에 제가 일본에서 활동한 이래 처음으로 천원전 본선에 진입했는데 하필 첫 상대가 시바노였어요. 결과요? 물론 졌죠. 하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습니다.”(웃음)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일본 제일의 도장으로 평가받고 있기 때문에 일본 프로기사들도 자식 교육은 앞을 다퉈 ‘홍도장’에 맡긴다. 현재 왕년의 일인자 장쉬 9단의 두 딸과 하네 나오키 9단의 남매, 야마시타 게이고 9단의 아들이 모두 ‘홍도장’에서 수학 중이다. 홍맑은샘이 일본에서 어떻게 평가받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한국으로 다시 돌아오고 싶지 않느냐고 묻자 홍맑은샘은 고개를 가로젓는다. “일본에 와서 저는 바둑으로 하고 싶은 모든 일들을 경험했습니다. 대회에도 많이 나가봤고 지금은 제자들을 길러내는 데 보람을 느낍니다. 2000년대 들어 일본바둑이 약해졌는데 다시 한국, 중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제 꿈이자 목표입니다. 일본바둑이 살아야 한국과 중국도 같이 발전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다행히 가능성이 보입니다. 일본 기사들 사이에서도 이래서는 안 된다는 자각이 있어 시스템과 제도를 바꾸고 있고 강한 신예들이 배출되고 있어요. 지켜봐 주십시오.”
유경춘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