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보하는 모양새 취하며 명분 쌓기
▲ 이명박 전 서울시장 | ||
양측의 전쟁은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사실 강재섭 대표가 ‘박심’을 등에 업고 있다고 생각해온 이 전 시장 측은 호시탐탐 당권을 노려왔다. 이번에 터져 나온 재보선 참패의 책임 소재 공방도 따지고 보면 당권 투쟁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봐야 한다. 이 전 시장 측은 이번 국지전에서 물러나는 모양새를 취했지만 언제라도 다시 당권 투쟁에 나설 것이다. 그리고 그 지루한 전쟁의 끝은 분당이라는 최악의 결말로 이어질 가능성도 낮지는 않다는 것이 당 안팎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정운찬 변수’가 빠지면서 정치권에서는 한나라당의 분당이 대선 가도의 최대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과연 한나라당은 두 동강이 날까.
이명박 전 서울시장은 차기 집권 가능성이 가장 높은 지지율 1위 후보다. 민심의 압도적 지지를 받고 있는 이 전 시장이 당심에 밀려 경선에서 패배하는 경우를 상상할 수 있을까. 대권 8부 능선에서 당심의 우물에 막혀 도약을 할 수 없다면 이 전 시장은 차라리 다른 가능성을 택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이 전 시장이 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무엇일까. 최근 이 전 시장 주변에서는 그가 모종의 중대 결심을 할 것이란 얘기가 퍼지기도 했다. 이 전 시장 캠프 사람들은 극구 부인하고 있다. 하지만 이 전 시장의 사정을 잘 아는 한 인사는 이에 대해 “최근 고려대 장외 조직 등 이 전 시장의 일부 핵심 비선 라인이 요 며칠 새 그와의 소통이 완전히 끊어졌다고 들었다. 주변에서는 이 전 시장이 모종의 결단을 앞두고 보안 유지에 들어간 것이 아니냐는 말들도 나왔다”라고 밝히면서 “현재 이 전 시장이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지만 당은 여전히 강재섭 대표 체제로 된 ‘친박’ 그룹이다. 이렇게 가다간 예선에서 탈락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깊어간다고 들었다. 여기에 이 전 시장이 취할 수 있는 옵션은 크게 두 가지로 유추해볼 수 있다. 박근혜 전 대표와 전면전을 벌여 당권을 확실히 장악하는 것과 현재의 조직을 기반으로 신당을 창당하는 것을 들 수 있다. 현재 캠프 내에서도 강경파와 온건파가 맞서서 계속 논쟁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안다”라고 밝혔다.
이번 재보선 참패 국면에서 불거져 나온 강재섭 체제의 퇴진 공방도 따지고 보면 이 전 시장 측의 첫 번째 옵션이었던 당권 장악 시도의 연장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이 전 시장 캠프에서는 경선에서 승리한다면 박 전 대표 측과 같이 갈 수 없다는 전제 아래 대대적인 물갈이를 할 계획도 세우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당권 장악 프로그램인 셈이다. 이 전 시장 주변에서는 “경선이 끝나면 당의 체질을 확 바꾸어야 할 것이다. 당 밖의 중도 개혁적 인사들을 대거 수혈해야 한다. 이는 본선 경쟁력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부분이다. 외연 확대는 이 전 시장의 지지도를 유지하고 그의 정체성을 지키는 유일한 길이다. 이 과정에서 당의 보수색 짙은 인사들과의 갈등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극복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기류는 지난달 30일 강재섭 대표가 당 쇄신안을 발표한 직후 그대로 폭발했다. 이 전 시장 캠프는 이재오 최고위원의 거취를 놓고 이틀 동안 말 그대로 격론을 벌였다. 당 쇄신을 통한 ‘뉴 한나라당’을 만들자는 수도권 의원들(공성진 이윤성 진수희 의원 등)과 ‘분당’ 가능성을 우려한 영남권 의원들(이상득 이방호 정의화 의원 등)의 생각이 팽팽히 맞섰다.
▲ 지난 4일 한나라당 박근혜 이명박 두 예비주자와 강재섭 대표가 만났지만 이 자리에서도 이-박 두 주자가 신경전을 벌여 한나라당의 위기감은 더해가고 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하지만 최종적으로는 아직 칼을 뺄 상황은 아니라는 판단을 했다는 후문이다. 캠프 내 온건론자들의 손을 들어준 셈이다. 이상득 국회부의장과 박희태 전 국회부의장, 이방호 정종복 의원 등 영남권 의원들은 “지지율 1위 후보가 현재의 판을 굳이 흔들 필요가 뭐 있느냐”는 지적을 많이 했다고 한다. 특히 강재섭 체제가 무너진다고 해도 이후의 당권 레이스에서 안정적인 승리를 거둘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계산도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또한 비대위 체제로 가닥을 잡는다고 해도 당이 항로를 잃고 표류할 경우 ‘강재섭 흔들어 당을 쪼갰다’는 비판을 고스란히 떠안게 될 판이었다.
이 전 시장이 강재섭 체제를 유임시켰다고 해서 당권 경쟁을 포기한 것으로 볼 근거는 전혀 없다. 오히려 적절한 타이밍과 명분을 찾고 있다고 봐야 한다. 최근 이 전 시장 캠프 사람으로 오인 받고 있는 전여옥 전 최고위원은 “(과태료 대납사건 등으로 지도력에 상처를 입고 있는) 강 대표 체제는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5월 안에 위기가 올 가능성이 크다”고 밝힌 바 있다. 전 전 최고위원이 비록 이 전 시장을 대변하는 인물은 아니지만 당내의 이러한 강 대표 비토 기류를 이 전 시장 측이 당권 쟁취의 구실로 활용할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정치권 일각에서는 이 전 시장 측이 ‘변심한’ 전여옥 전 최고위원을 내세워 재보선 참패를 구실로 당권 장악을 위한 1차 전투를 벌였다는 분석도 내놓고 있다. 만약 이 ‘거사’가 성공했다면 당권 장악을 통한 18대 총선 준비는 물론 본선을 대비한 당 체질 개선의 두 가지 효과를 거둘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전 시장 측이 캠프 내 영남권 의원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이번은 치고 빠지는 정도로 하자’며 봉합 수순에 들어갔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이 전 시장의 ‘복심’은 여전히 당내 체질 개선을 위한 물갈이에 더 큰 유혹을 느끼고 있다는 후문이다.
그런데 앞으로 재보선 후유증보다 훨씬 심각한 2차 지진이 올 것이라고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다. 소장파의 리더격인 남경필 의원은 이에 대해 “지금은 화해 국면 같지만 근본 위기가 해소되지 않았다. 현 지도부는 ‘빅 2’가 용인해준 성격밖에 안되므로 빅2를 제어할 권위와 힘이 없지 않느냐. 지진도 2차 지진이 더 무섭듯 두 번째 분란이 온다면 그때는 당이 쪼개질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당의 지도력이 더 약화되고 양대 주자의 강한 영향력만 확인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주장이다. 이를 근거로 양대 주자 사이에 더욱 강력한 ‘2차 충돌’이 생길 것이라는 우려도 감추지 않고 있다.
그리고 그 분열의 진앙지는 경선 룰이 될 가능성이 높다. 사실 경선 룰은 양측이 양보하려야 양보할 수 없는 마지막 보루다. 민심에서 이기고 당심에서 질 것을 우려하는 이 전 시장. 민심보다 당심의 확실한 지지를 기대하는 박 전 대표. 서로의 지지층이 확연하게 상반되는 두 사람이 접점을 찾을 여지는 거의 없어 보인다. 양측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마주 달리는 기차와도 같다. 현재 경선 선거인단 20만 명(대의원 4만 명:책임당원 6만 명:일반국민 6만 명:여론조사 4만 명, 2:3:3:2)의 20%를 차지하는 여론조사 반영 방식과 관련해 박 전 대표 측은 ‘20%’라는 비율을, 이 전 시장 측은 ‘4만 명’이라는 숫자를 각각 기준으로 삼아야한다는 주장을 꺾지 않고 있다. 이 전 시장 측으로서는 “8월에 경선을 치르면 투표율 높은 당원 대의원과 달리 일반 국민선거인단은 최악의 경우 20~30% 밖에 투표장에 안 나올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민심이 50%가 아닌 20~30% 정도밖에 반영되지 않는다”라고 주장한다. 민심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이 전 시장 측으로서는 민심의 실질적 반영을 주장하고 있다.
▲ 지난해 11월 9일 뉴라이트연합 결성 1주년 기념식에서 깃발을 들고 있는 김진홍 목사. 일각에선 김 목사가 신당을 만들고 이명박 전 시장이 합류할 가능성도 거론하고 있다. | ||
그렇다면 여기에서 이 전 시장 측이 검토하고 있는 두 번째 옵션, 신당 창당에 대해 검토해보자.
먼저 여론은 이 전 시장이 이 옵션을 택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최근 YTN이 글로벌리서치에 의뢰한 자료에 따르면 한나라당의 분당 가능성은 59%로 나타났고, 한나라당이 분당한다면 탈당할 사람으로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56.2%로 나타났다(박 전 대표의 21.5%보다 두 배 정도 높다).
여기에 이 전 시장은 한나라당 127명 의원 가운데 58명의 지지 의원을 확보하고 있고, 당원협의회위원장도 이미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있다. 박 전 대표 지지가 강한 지역에도 ‘사설 위원장’을 두고 철저하게 관리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자금이다. 정치권에서는 “비용이 수백억 원 소요될 텐데 이게 이 전 시장에게 매우 부담스러운 지점이 될 것이다. 하지만 가장 집권 가능성이 높은 쪽으로 자금이 모이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라며 긍정적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 전 시장의 정치적 우군으로 평가받고 있는 김진홍 목사의 행보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뉴라이트전국연합을 이끌고 있는 김 목사는 강재섭 대표의 재보선 책임론을 내세우며 사퇴를 강하게 주장했다. 하지만 이 전 시장이 강 대표 체제를 용인하는 쪽으로 기울어지자 기존 주장을 번복했다. 정치권에서는 김 목사의 정치적 동선이 이 전 시장과 일치하는 게 예사롭지 않다고 보고 있다. 그가 외곽에서 뉴라이트 중심의 중도개혁 세력 신당을 창당한 뒤 이 전 시장이 한나라당의 분열 상황을 지켜보며 전격적인 합류를 결행할 가능성도 있다. 이 전 시장으로서는 상당한 모험이지만 박 전 대표 세력을 수구보수세력으로 몰면서 새로운 정치 패러다임을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전 시장이 평소에 바라는 그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한나라당 화합의 둑은 이미 터진 것과 다름없다. 정운찬 변수가 빠지면서 더욱 집권 가능성이 높아진 두 사람은 점차 사생결단식 결투의 장으로 내몰리고 있는 형국이다. 그 무너진 둑을 강재섭 대표가 8월 경선 때까지 막아줄 것으로 예상하는 국민들은 그리 많지 않다는 데 한나라당의 불행이 있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