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이슈 정잼화 대권접수 장기포석…우병우 이름 소멸 ‘부수효과’도
박근혜 대통령은 “권력 유지를 위해 국제사회와 주변국의 어떠한 이야기도 듣지 않겠다는 김정은의 정신상태는 통제불능이라고 봐야 할 것”이라고 했다. 정치권 역시 여야 할 것 없이 북의 도발에 강경한 대응을 주문하고 있다. 특히 여권 일각에서는 ‘핵무장론’이 재점화하고 있어 관심을 끈다.
정연국 청와대 대변인이 지난 9일 오전(현지시간) 라오스 비엔티안 리버사이드 완사나 호텔에서 북핵 실험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1월 6일 4차 핵실험 직후 새누리당 일각에선 핵무장 필요성이 제기됐다. 당시 원내대표였던 원유철 의원은 “북한이 머리 위에서 핵무기라는 총을 겨누고 있는데 우리는 언제까지 계속 제재라는 칼만 갖고 있어야 하는지 답답하다. 자위권 차원에서 우리도 핵을 가질 때가 됐다”고 했다. 몇몇 의원들도 비슷한 주장을 펴며 원 의원을 지원 사격했다. 이를 두고 정치권에선 4월 총선을 앞둔 새누리당의 보수표 공략 노림수가 숨겨 있을 것이란 평가가 나왔었다.
9일 5차 핵실험 후에도 새누리당 내에선 비슷한 모습이 연출되고 있다. 그런데 이번엔 그 무게감이 남다르다. 당 대표를 필두로 내년 대선에 출마할 것으로 점쳐지는 주요 잠룡들이 핵무장론을 외치고 있는 까닭에서다. 이정현 대표는 “북한의 무모한 도발 시도에 대해 지금보다 훨씬 더 강도 높은 조치를 강구해야 한다”며 핵무장을 시사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김무성 전 대표도 페이스북을 통해 “미국과의 협상을 통해 핵 추진 잠수함 도입이나 미국의 핵무기 배치 등 모든 방안을 동원해야 할 때”라고 주장했다.
이밖에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는 “핵에 대처하는 길은 오직 핵뿐”이라고 했고, 오세훈 전 서울시장 역시 “미국의 전술 핵 재배치를 포함해 모든 선택지를 공론화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원희룡 제주도지사는 “미국의 핵우산 강화, 전술 핵 배치와 같은 핵 무장론을 진지하게 검토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며 가세했다. 핵무장의 현실 가능성을 떠나 여권 차기주자들이 일제히 핵무장론을 언급하고 있는 상황은 정치적으로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특히 이정현 대표를 주목해야한다는 견해가 주를 이룬다. 이 대표는 핵무장 가능성에 대해 “개인적 소신”이라고 했지만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긴 힘들다. ‘박근혜의 입’으로까지 불리는 이 대표가 핵무장과 같은 민감한 사안을 놓고 친박 핵심부와 조율 없이 ‘개인 소신’을 밝혔을 가능성은 낮다는 얘기다. 정부 관계자가 “한반도에 핵이 있어선 안 되며, 핵무기 없는 세상의 비전은 한반도에서 시작돼야 한다”며 비핵화 입장을 확고히 한 것을 두고서 “당과 정부가 투트랙 전략을 쓰는 것 아니냐”는 물음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기술적인 면만 놓고 보면 핵무장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서균렬 서울대학교 원자핵공학과 교수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1년 6개월 안에 핵무장을 끝낼 수 있다. 핵개발과 관련된 모든 기술을 이미 우리는 가지고 있다. 플루토늄을 추출하기만 하면 된다. 기술이나 인력 모두 풍부하다. 결정만 되면 일사천리로 진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양욱 국방안보포럼 연구위원도 “(핵무장은) 어렵지 않다.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준비를 어느 정도 끝낸 상황이었다. 핵융합로(핵융합반응을 이용하여 에너지를 얻는 장치)와 같은 기술을 우리가 갖고 있기 때문에 핵은 물론 수소폭탄까지도 만들 수 있다”고 했었다.
그러나 현실 상황은 그렇지 못하다. 양욱 위원은 “우리는 NPT(핵확산금지조약)에 가입했을 뿐 아니라 핵 문제는 미국과 함께 가고 있다. 미국과의 동맹을 깨지 않는 한 핵무장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핵무장을 하겠다고 하면 일본, 대만도 다 따르는 핵도미노 현상이 나타날 것이다. 우리가 주변국과 등지고 살지 않는 이상 핵무장은 어렵다”고 설명했다. 익명을 요구한 국방과학연구소 관계자도 “(핵개발은) 우리가 독자적으로 결정할 사안은 아니다. 기술은 충분하지만 국제사회라는 측면에서 보면 불가능하다고 본다”고 털어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권에서 핵무장론이 끊이지 않는 것에 대해선 여러 관측이 나오고 있다. 양욱 위원은 “정부 차원에선 핵무장 얘기를 꺼낼 수 없으니 정치인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답답함을 표현하는 것 아니겠느냐. 북한의 위협이 높아지는데 미국 핵우산은 충분하지 않고…. 우리 스스로 무장이라도 해야 한다는 절박함을 반영하는 것으로 봐야할 것”이라고 전했다. 또 북핵 사태에 대한 주도권을 미국과 중국 등에 내준 정부가 ‘우리도 핵을 할 능력이 있다’는 메시지를 우회적으로 국제사회에 보내는 것이란 추측도 나온다.
정치권에선 차기와 연관 지어 바라보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여권의 ‘안보 프레임’과 맞물려 있다는 얘기다. 우병우 수석 거취, 청문회 정국 등 악재가 산적한 박근혜정부로선 북의 핵실험 소식이 그리 싫지만은 않은 기류다. 실제로 하락하기만 하던 박 대통령 지지율은 5차 핵실험 이후 반전, 상승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정현 대표의 핵무장론 역시 그 연장선상에서 풀이되고 있다. 야권이 여권 잠룡들의 핵무장론에 대해 ‘정치 쇼’라고 냉소적 반응을 보이는 것도 비슷한 이유다.
한 친박 의원은 “북한 핵실험 이후 모든 이슈가 함몰됐다. 우 수석 이름이 언론에서 사라졌다. 또 우리 지지 기반인 보수층이 집결하는 기류다. 우리로서는 이러한 상황이 최대한 계속되는 게 좋고, 대선 정국까지 연결되면 바랄 게 없다”면서 “핵실험 이후 핵무장론 같은 주장들이 나오고 있는 것 역시 안보 이슈를 쟁점화시키기 위한 전략의 일환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라고 귀띔했다.
특히 친박이 밀고 있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에게도 북한 핵실험은 임기 만료 전 리더십과 존재감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여권 주변에선 이 대표가 핵무장론을 꺼낸 이후 다른 잠룡들이 경쟁적으로 이와 관련된 발언을 하는 것에 대해 반 총장을 염두에 둔 행보라는 말도 나오고 있다. 권대우 정치평론가는 “안보 위기가 닥치면 새누리당이 상대적으로 야권보단 유리하다. 이러한 정국에서 여권 잠룡들 간 주도권 다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라면서 “북한 핵실험을 정략적 측면에서 봐서는 안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