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납’을 피우십니까
납 같은 유해 중금속은 일단 몸 안에 쌓이면 좀처럼 나가지 않는다는 게 문제. 몸속에 들어온 납은 대변과 소변을 통해 어느 정도는 배설된다. 하지만 납은 적혈구와 친화성이 매우 커서 체내 순환하는 납량의 95% 이상이 적혈구와 결합하고, 혈류를 따라 인체의 각 기관으로 운반된다. 인체의 각 기관에 있는 총 납량을 체내부담(Body Burden)이라고 하는데, 체내부담의 약 90%가 뼈에 축적된다.
차곡차곡 쌓인 납은 주로 어떤 영향을 줄까. “주로 조혈기계나 신경계, 신장, 위장관계, 순환기계, 임신 독성, 생식기계 등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문제혁 을지대학병원 산업의학과 교수의 설명이다.
납에 많이 노출되었을 때 나타나는 첫 증상은 피로감이다. 전보다 불안감이 심하고 잠이 잘 오지 않을 수도 있다. 더 심해지면 우울해지고 변비, 체중감소를 보인다.
이번에 납 관련 연구를 내놓은 곳은 캐나다 몬트리올대 연구진으로, 지난해 말 한 학회지에 연구 결과가 소개됐다. 연구진은 1999~2004년 사이에 국가 건강과 영양실태 조사에 참여한 20~39세 성인 1987명의 자료를 분석, 이들의 혈중 납 농도를 확인하고 우울증이나 공황장애, 불안장애 등 정신과 질환의 유무를 조사했다. 그 결과 우울증 진단을 받은 사람이 134명, 공황장애가 44명, 불안장애가 47명이었다고 한다.
조사 대상의 평균 납 농도는 1데시리터(㎗;10분의 1ℓ)당 1.61마이크로그램(㎍. 100만분의 1.61g). 혈중 납 농도가 높은 상위 20%(㎗당 2.11㎍ 정도)는 하위 20%(㎗당 0.7㎍ 정도)보다 우울증 증세가 2.3배, 공황장애 증세가 5배 정도 많았다.
이처럼 혈중 납은 적은 양으로도 정신 건강에 영향을 미친다. 특히 혈중 납 농도는 담배를 피우면 더 상승하는 경향이 있다. 흡연자 628명을 제외하고 비흡연자만을 대상으로 분석한 결과도 비슷했다. 비흡연자라도 가장 높은 납 수치와 가장 낮은 납수치를 가진 사람 그룹 사이에는 우울증 위험은 2.5배, 공황장애 위험은 무려 8.2배나 차이가 났다. 연구진은 “납에 노출되면 소량이라도 뇌 활동에 나쁜 영향을 미쳐 우울증 같은 정신장애도 만들 수 있다”고 밝혔다.
국내에서도 흡연을 하면 납을 비롯한 혈중 중금속 농도가 높아진다는 연구 결과가 나와 있다. 환경부와 국립환경연구원은 지난해 9월, 공주대 연구팀에 의뢰해 전국의 20세 이상 남녀 5129명을 상대로 혈중 중금속(납, 수은, 망간), 요중(소변 내) 중금속(카드뮴, 비소) 등 13종의 유해화학물질을 측정한 ‘제3차 국민 생체시료 중 유해물질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 자료에 따르면 혈중 납과 수은 농도는 흡연자가 가장 높았다. 문제는 간접흡연의 피해도 심각해 혈중 수은, 망간 농도는 간접흡연자가 최고치였다.
그렇다면 몸속에 납이 쌓이면 어떤 문제를 일으킬까. 납 중독 단계에 이르는 수준이 아니더라도 건강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 납이 쌓일수록 노화가 촉진되고 인지력, 언어구사 능력이 떨어지며 치매, 고혈압, 신장병 같은 만성질환의 원인이 된다.
실제로 미국 존스홉킨스대와 미시간대 등의 연구진은 각각 뼈에 쌓인 납이 성인에게 어떤 영향을 일으키는지를 조사했다. 존스홉킨스 연구진이 50~70세 성인 1000명의 정강이뼈에 있는 납을 측정하고 이들의 인지능력을 체크해봤다. 그 결과 납이 많이 쌓일수록 사고, 학습, 기억, 표현 등의 능력이 떨어지고 납이 많이 쌓인 사람은 적게 쌓인 사람보다 6년 이상 노화가 빨리 찾아온 것으로 드러났다. 미시간대는 노인을 몇 년 간격으로 여러 번 체크한 결과, 중금속이 노화를 5년 앞당긴다고 밝혔다.
▲ 칼슘이 많은 두부나 철분이 많은 달걀 노른자를 먹으면 체내 납 축적을 줄일 수 있다. | ||
참고로 임신부가 흡연을 해서 태아 때 흡연에 노출되면, 그렇지 않은 어린이보다 ADHD 위험이 2.4배 높다. 담배와 납에 동시에 노출되면 ADHD 위험은 8배로 높아진다.
현재 어린이에 대한 납 중독 허용기준은 혈액 1㎗당 10㎍(미국 질병통제센터가 1991년에 정한 기준). 하지만 이 기준의 절반 이상만 납에 노출된 어린이도 심한 학습·행동 장애를 보인다는 보고가 있다.
이에 전문가들은 “납 허용기준이나 관련 제품 등에 관한 규정 등을 점검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1978년부터 1986년까지 납 성분 페인트의 판매와 사용을 금지하자, 혈액 ㎗당 10㎍ 이상의 납 농도를 보인 어린이가 1978년 135만 명에서 2002년 31만 명으로 크게 감소했다.
몸속에 납이 쌓이는 것을 예방하려면 칼슘이 많은 식사를 하는 것이 좋다. 우리의 몸은 칼슘이 부족할 경우 칼슘과 화학적 성질이 비슷한 납으로 대체해서 체내에 축적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영양만점의 두부에도 칼슘이 풍부한데, 납 중독을 치료하는 효과가 있는 피트산까지 많이 들어 있어 더욱 효과적이다. 실제로 두부 소비량이 많은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조사했더니, 두부 섭취량이 많은 그룹은 적은 그룹보다 납 축적량이 더 적었다.
멸치를 먹을 때는 임신부나 신생아라면 내장을 빼고 조리하는 것이 좋다. 식약청이 얼마 전에 발표한 바에 따르면 국제적인 섭취 허용 기준을 넘지는 않았지만 납이 가장 많이 든 식품 1위가 멸치였다.
이와 함께 비타민 C가 풍부한 채소나 과일은 매일 충분히 먹는 것이 좋다. 미국에서 혈액 내에 비타민 C 수치가 낮을수록 납 수치가 높을 가능성이 크다는 연구가 나온 바 있다. 채소, 과일 속의 섬유소는 납 배설을 촉진시킨다.
철분 섭취도 늘린다. 중금속 오염이 심한 지역에 거주하는 초등학생의 철분의 양과 체내 납 축적 정도를 조사한 결과, 철이 부족한 어린이들에서 납 축적이 훨씬 많았다. 장 점막에서 흡수될 때 철과 납이 서로 경쟁적으로 흡수되기 때문에 철의 섭취가 부족하면 납 흡수가 더 촉진된다.
철분은 육류나 어패류에 많고 특히 달걀노른자, 동물의 간에 많다. 이들 식품과 함께 비타민 C 함량이 높은 신선한 채소, 과일을 같이 먹으면 철분 흡수율이 더 높다.
또한 황이 많이 들어 있는 식품도 가까이하면 좋다. 황 성분은 간에서 여러 가지 중금속과 결합해 소변으로 배설된다. 콩이나 마늘 양파 양배추 브로콜리 부추 파 돼지고기 쇠고기 달걀 등이 그것이다. 된장이나 녹차 도토리 알로에 클로렐라 등도 중금속 배출을 돕는다.
직업이나 취미 때문에 납에 자주 노출되는 경우에는 1년에 한두 번은 혈액검사로 납 노출 정도를 검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평소 납 가루나 증기가 발생하지 않도록 작업환경을 개선하고, 적절한 마스크나 장갑 등과 같은 개인 보호장구를 반드시 착용하도록 한다. 작업 후에는 샤워를 하고, 어렵다면 손을 잘 씻고 양치질이라도 자주 한다. 작업복은 작업장에서만 입고, 자주 세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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