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엽(26·삼성 라이온즈) | ||
어린 나이의 아내와 결혼하면서 ‘도둑놈(?)’ 소리를 들었지만 결혼 초반의 사소한 말다툼 이외엔 잡음 없이 신혼 생활을 이끌었다. 시즌중보다 시즌후 몸살을 앓을 만큼 바쁜 스케줄을 소화하면서도 얼굴엔 찡그린 기색조차 없다.
때론 너무 반듯한 이미지 때문에 자연스럽고 인간적인 매력이 덜 느껴지는 단점도 있지만 아무리 트집을 잡으려고 해도 별다른 흠을 찾을 수 없는 남자가 프로야구에서 인정하는 ‘국민타자’ 이승엽(26·삼성 라이온즈)이다.
나이는 그리 많지 않아도 이승엽은 세상 살아가는, 야구세계에서 욕먹지 않고 좋은 성적 내는 노하우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듯하다. 누구 하나 이승엽을 향해 손가락질하거나 비난의 목소리를 퍼붓는 걸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올 한해 한국시리즈 우승과 골든글러브 수상 등 어느 해보다 알짜배기 수확을 거둬들여 비록 몸은 지쳤어도 마음만큼은 풍요롭다 못해 터질 지경이라는 이승엽. 재미없는 것 같으면서도 말 한마디 한마디에 재치와 ‘국민타자’의 철학이 고스란히 배어나오는 이승엽과의 인터뷰를 담는다.
몇 년 동안 이승엽은 겨울철 각종 시상식장의 단골 손님이었다. 손님도 그냥 손님이 아니라 VIP였다. 하도 많은 시상식장에 여러 해 동안 나타나 솔직히 가끔은 ‘지겨울 때’도 있었다. 그 흔한 슬럼프 한 번 겪지 않고 줄기차게 남들은 한 번 손에 쥘까말까 하는 상들을 독식하다보니 선수들 입장에선 은근히 배알이 꼴릴 수도 있다. 그래도 이승엽은 굳건히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하나하나 따지고 돌아보면 왜 슬럼프가 없었을까. 뜻대로 방망이가 돌아가지 않아 밤잠 설쳐가며 ‘달밤에 체조하는 일’도 많았고 내색할 수 없는 집안 일에다 어머니의 병환으로 마음의 근심이 깊기도 했었다. 그래도 종합적인 결과는 ‘이승엽’이란 이름을 ‘톱스타’라는 타이틀을 붙여 만방에 알리는 일이었다.
더 이상 오를 데가 없어 국내 무대가 비좁기만 해 보인다는 질문에 이승엽은 “아직도 배가 고프다”는 유행어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직 멀었어요. 사람 욕심이란 게 한도 끝도 없는 거잖아요. 여전히 타석에 들어서면 상대방 선수들이 모두 적으로 보이는 걸요. 투수 상대하기가 너무 힘들어요. 기 싸움에서 지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를 쓰거든요. 난 ‘머신’이 아니잖아요. 사람이기 때문에 언젠가 성적이 떨어질 수 있고 늪을 헤맬 수도 있죠. 잠시도 딴 생각하기 어려워요.”
‘국민타자’라는 수식어가 부담스러울 것 같았다. 홈런 신기록을 경신한 이후 ‘이승엽=국민타자’라는 등식이 성립된 터라 해마다 ‘국민타자’에 흠이 되지 않는 성적과 생활 태도를 보여야 한다는 사실로 인해 어깨가 무겁지는 않았을까.
“부담스러운 게 당연한 거죠. 국민을 대표하는 타자인데. 걸맞은 선수가 되려고 노력해요. 그래도 기분 좋은데요. 아무한테나 붙여지는 타이틀이 아니잖아요.”
▲ 지난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그는 9회말 극적인 동점홈런으로 자신의 갈망을 마침내 채웠다. 골 든글러브 6연속 수상(작은 사진)은 당연한 전리 품이었다. | ||
원래 붙임성 있는 성격이 아니라 프로 입단후 대인관계에서 고민이 많았는데 나이가 어리다 보니 인사하는 게 몸에 밴 것 같다고 한다.
어느 시상식장 입구에서 이승엽은 절친하게 지내는 두산의 박명환에게 계속 같이 들어가자고 조르고 있었다. 취재진의 인터뷰 공세 때문에 식장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되자 나중에 혼자 가려면 ‘뻘줌하니까’ 기다렸다 같이 들어가자는 부탁이었다.
수많은 스포트라이트에 노출된 이승엽이 시상식장에 혼자 들어가는 걸 부끄러워한다는 게 새로운 느낌을 전해줬다. 그때 왜 그랬냐고 묻자 “창피하잖아요”라며 웃음을 터트린다. 정작 겉으로 드러난 엄청난 타이틀에 비해 이승엽 자신은 평범한 남자라는 걸 보여주는 사례였다.
이승엽의 또다른 면모를 느낄 수 있는 대답이 필요했다. 모범답안만을 내놓는 바람에 인터뷰에 다소 맥이 빠진 것도 사실이었다. 학창시절 사고친 기억조차 없고 감독이 운동하라면 운동하고 기합주면 묵묵히 받고 운동선수들의 필수 관문인 숙소 탈출조차 감행해본 적이 없다는 데 힘이 빠졌다. 정말 ‘범생이’였던 것이다.
“용기가 없어서 못했어요. 숙소 탈출,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에요. 만약 그럴 경우 부모님께 걱정 끼쳐드릴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감히 할 수가 없더라구요. 술도 즐기지 않은 편이라 술 때문에 속썩여 드린 적도 없는 것 같은데. 정말 재미없게 살았나봐요.”
야구인생의 최대 슬럼프는 고3때 허리를 다쳐 3개월 동안 꼼짝없이 누워 있을 때였다. 야구를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가장 오랫동안 쉬면서 과연 다시 운동을 할 수 있을까 하는 노심초사로 인해 무척 긴 시간을 병상에서 보낸 기억을 담고 있었다. 그때 야구가 너무 좋은 운동이라는 것, 이승엽의 운명을 책임질 만한 가치가 있는 직업이라는 걸 절감하게 됐다고 한다.
이승엽은 또래 친구들이 별로 없다. 대부분 선배 아니면 후배다. 또래 선수들에 비해 획기적인 신분상승을 이루다보니 이승엽은 괜찮지만 상대방에서 이승엽과 동기나 친구라는 사실에 대해 부담스러워한다고.
친한 사람을 꼽아달라는 주문에 3년 연상의 사회 선배와 야구계의 한 후배의 이름을 거론한다. <윤도현의 러브레터>라는 TV 프로그램에서 녹화전 방청객을 상대로 분위기를 업그레이드시키는 ‘바람잡이’ 역할을 하는 김재동씨와는 친형처럼 지낸다. 야구장에서 행사를 진행하는 김씨를 우연히 만나 의형제를 맺게 됐다는 이승엽은 어려운 문제가 생길 때마다 김씨를 만나 상담을 청할 만큼 믿고 의지하는 관계라고.
박명환과는 야구계에선 인정하는 ‘닭살 커플’이다. 비록 운동 선후배 사이지만 결혼 전 이승엽이 서울 올라오면 숙소를 박명환의 집으로 정해놓고 일을 보러 다녔고 박명환도 대구 원정경기 갈 때마다 이승엽의 신세를 졌다.
이승엽처럼 한 분야에서 독보적인 존재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야구를 위해서 다른 걸 포기할 줄 알아야 해요. 가족만 빼놓고. 때론 술도, 친구와도 잠시 끈을 놔야 할 때가 있어요. 인생의 전부가 야구라면 말이죠. 그런 열정과 노력이 있어야 이 바닥에서 살아남을 수 있고 돈도 많이 벌 수 있어요. 대충해서 되지 않거든요. 나라고 왜 바른 길만 가고 싶겠어요. 때론 옆길이 궁금하기도 하고 발을 들여놓고 싶을 때가 있어요. 참는 거죠. 꾹 눈감고 가는 거죠. 내가 좋아하는 야구를 위해서….”
▲ 이승엽이 꿈꾸는 선수로서의 이상형은 의외로 축구의 홍명보였다. | ||
“내가 만약 서울팀에 있었다면 야구와 관련없는 여러 사람들과 어울렸을 거예요. 그들과 만나 시간을 가졌다면 지금의 이승엽이 있었을까 싶어요.”
드디어 이승엽의 입에서 결혼 얘기가 흘러 나왔다. 만나는 사람마다 스물한 살 어린 아내 자랑을 하도 해대서 ‘팔불출’이란 소리를 달고 있는데도 이승엽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눈치다.
“결혼의 장점이요? 흔히 하는 얘기지만 안정적이라는 거죠. 오로지 야구에만 전념할 수 있어 만족해요. 결혼 전에는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해 돌아다니다 보면 몸 관리에 소홀할 수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쉬는 날도 가족과 함께 있기 때문에 절로 몸 관리가 돼요.”
올 들어 여섯 번째 골든글러브 수상에 홈런, 타점, 장타율, 득점 등 타격부문 4관왕을 휩쓸며 삼성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끈 장본인으로 꼽혔으니 어찌 흥이 나지 않을까. 골든글러브 수상 소감으로 “결혼 후 성적이 나쁘면 아내가 욕먹을 것 같아 더 열심히 운동했다”고 말할 만큼 이승엽의 아내사랑은 끔찍하다.
어린 나이에 정상에 오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고민과 외로움도 만만치 않았다. 가장 큰 문제가 입단동기나 또래 친구들과 가까이 지낼 수 없다는 사실. 연봉만 4억원을 받는 선수와 1억원도 채 되지 못하는 선수들과는 아무리 나이가 같다 해도 쉽게 친해지기 어려운 부분이다.
“난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데 그 친구들이 나와 가까이 지내는 걸 꺼려하더라구요. 가슴이 아팠어요. 이해가 되면서도. 어떤 말과 행동을 보여줘도 ‘있는 자의 여유’로 받아들이면 크게 오해할 수 있는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거든요.”
이승엽이 꿈꾸는 선수로서의 이상형은 의외로 축구의 홍명보였다. 최고의 축구선수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티가 나지 않는다는 것, 묵묵히 자기 일을 하는데도 카리스마가 발휘된다는 점, 존재 자체가 큰 힘이 된다는 사실 등을 이유로 들었다.
월드컵 동안 축구 열기 때문에 야구의 인기가 시들해져 축구를 싫어했는데 홍명보의 플레이를 보고 반한 나머지 열심히 응원하게 됐다고. “한번 만날 수 있다면 정말 영광일 것 같아요. 곧 미국으로 떠나신다면서요? 팬으로서 잘하고 돌아오시길 바랄게요.”
다른 팀이지만 같은 팀이길 바라는 투수가 있다면? 두산의 박명환과 이혜천이라고 한다. 공이 까다롭기 때문이다. 타자로는 기아의 장성호가 같은 팀이 된다면 내년 삼성의 2연패는 따놓은 당상이라고.
더 이상 야구 잘하는 걸 숨기고 싶지 않다는 이승엽. 따라서 내년 시즌 ‘연봉킹’이 돼야 하는 이유에 대해 주저함 없이 말하는 이승엽, 몸값으로 최고 선수라는 인증서를 받은 뒤, 일년 동안 ‘꼬라지’ 있는 야구를 확실하게 선보인 뒤, 태평양을 헤엄쳐가든, 날아가든 일단 ‘튈’ 거라고 말하는 이승엽이지만 생활로 돌아가선 뒤늦게 대학에 복학한 아내의 기말 고사 뒷바라지에 정신이 없었다.
“그래도 ‘국민타자’ 아내인데 학점이 펑크나면 안되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