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기 정부의 초대 대통령 비서실장에 내정된 문 희상 의원 | ||
지난해 10월 국회도서관에서 있었던 문희상 의원 후원회에서 노무현 당선자가 했던 축사 중 일부다. 대선을 이틀 앞두고 있던 지난해 12월17일, 의정부 중앙로에서 있었던 거리유세에서 노무현 당시 후보는 문희상 의원을 단상에 올린 뒤
“낡은 정치를 말하니, 오래된 정치인으로 오해하시는 분이 있다. 오래되어 못쓰게 되는 건 고물이라 하고, 오래될수록 반짝반짝 빛을 더해가는 것은 보석이라 한다. 여기 문희상 의원은 보석과 같은 분이다”고 한껏 치켜세웠다.
2003년 2월25일 ‘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고 출범할 노무현호의 첫 조타수는 문희상 의원이 맡게 됐다. 노무현 당선자가 삼국지 세 영웅과 ‘보석’에 비유하면서까지 극찬한 문희상 비서실장 내정자는 어떤 인물일까.
경복고, 서울대 법대 졸업, 재선 국회의원(14대, 16대), JC중앙회장, 연청 중앙회장, 청와대 정무수석, 국정원 기조실장. 간단히 꼽아보아도 비서실장으로 손색이 없는 이력이다. 그러나 문희상 의원의 비서실장 발탁을 정치이력만으로 해석하는 것은 부족하다는 게 중론이다.
문희상 의원은 정치권에서 한마디로 ‘교차로와 같은 사람’으로 통한다. 영남/호남으로 갈라져 있는 정치 현실 속에서 경기출신이라는 점이 그렇고, 노•장•청 세대 가운데 노년층과 청년층을 매개할 장년층이라는 점도 그렇다.
또 DJ정부에서 정무수석과 국정원 기조실장을 지낸 이력에는 DJ정권과 곧 출범할 노무현 정권 사이에 가교역할을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인물이란 평가가 뒤따른다.
이밖에 경복고, 서울법대의 학력은 연거푸 상고출신 대통령의 출현으로 거부감을 갖고 있는 엘리트계층의 불만을 다소 누그러뜨릴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또 한화갑 대표와 가깝다는 점에서 노무현 당선자 취임 이후 청와대와 민주당의 상호보완적 관계설정은 물론, 정치권에 ‘적이 별로 없다’는 점에서 향후 노무현 정권 국정운영에 필수적인 거대야당 한나라당의 협조를 이끌어내는 데에도 일익을 담당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이 때문에 문희상 비서실장 내정에는 ‘교차로’적 성격이 강한 문희상 개인의 독특한 캐릭터를 노무현 당선자가 높이 산 것 아니냐는 해석이 덧붙여진다. 다시 말해 ‘개혁’ 이미지가 강한 노무현 당선자가 통합과 조정이라는 보완적 역할을 문희상 내정자에게 주문하고 있다는 얘기다.
‘교차로’적 성격과 더불어 문희상 의원에 대한 정치권의 또 다른 평가는 ‘의리와 소신’의 정치인이란 점이다. 92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가 패하고 영국으로 유학을 떠난 뒤의 일이다.
김대중 후보가 떠난 민주당에서 대표로 선출된 이기택 대표는 당시 당내 주류를 차지하고 있던 동교동계 출신 문희상 의원을 대표 비서실장으로 발탁했다. 당시 동교동계에서는 비서실장 수락을 ‘배신’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적지 않아 서로가 꺼리던 시점이었다.
문희상 의원은 이기택 대표에게 다음 두 가지 조건을 전제로 비서실장 제의를 수락했다. 첫째는 김대중 총재가 정치에 복귀하면 다시 김대중 총재에게 돌아간다는 것. 둘째는 사무실에서건 회의실에서건 담배를 피우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골초였다.
▲ 지난 8일 북핵사태를 논의하는 자리에 노무현 당선자의 정치적 의사결정을 앞뒤에서 보좌하는 문희상 내정자와 김원기 고문이 함께 했다. | ||
‘소신’을 굽히지 않는 일화는 97년 대선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선을 코앞에 둔 시점에 김홍일, 김홍업 두 아들의 거취문제가 선대위에서 ‘뜨거운 감자’로 부상했다. 당시 선대위 관계자들이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겠느냐’며 서로 눈치만 살피고 있던 상황에서 특보단장을 맡고 있던 문희상 의원은 ‘할 말은 해야 한다’며 총대를 메고 직설을 했다.
또 초대 정무수석에 임명된 이후에는 김중권 비서실장이 주창한 ‘동진정책’에 맞서 ‘김영삼 정권을 아우르는 민주대연합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결국 미운털이 박힌 문 의원은 DJ정부 초대 정무수석에 임명된 지 4개월 만에 물러나야 했다.
김대중 정권에서 크게 중용되지는 못했지만, 문희상 의원의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애정과 존경은 그 누구보다 강하다고 주변인사들은 입을 모은다. 1997년 12월19일. 김대중 대통령 당선이 확정되던 날 새벽, 문희상 의원은 환호하는 지지자들을 뒤로하고 조용히 선친의 묘소로 향했다.
큰절을 올리고 난 문 의원은 “아버지! 내말이 맞았지요? 정권교체가 되었지요?”라고 외치며 대성통곡을 했다고 한다. 그날 문희상 의원은 비로소 돌아가신 아버님과 마음으로 화해를 했다고 회고했다.
문 의원의 부친은 아들의 권유에 못이겨 김대중 대통령을 지지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빨갱이’라는 의심을 거두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돌아가시는 날까지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았다는 것.
정권교체로 아버지와 마음의 화해를 이룬 문희상 의원은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 정무수석, 기조실장을 역임하는 동안 ‘성공한 대통령’을 만들기 위해 전념했고, 16대 국회에 등원한 이후에도 조용히 김대중 정권의 개혁성과를 알리는 데 열성적으로 나섰다는 안팎의 평가를 받았다.
문희상 의원은 정치부 기자들 사이에서 ‘개혁의 전도사’ 또는 ‘이데올로그’(대표적인 이론가)란 닉네임으로 불리곤 한다. 실제 정치 현안이 발생하면, 그의 의원회관 사무실에는 ‘문희상 버전’의 정치 해설과 분석을 듣기 위해 많은 정치부 기자들이 찾아오곤 한다.
다양한 정보와 지식을 바탕으로 시대 흐름과 변화를 정확히 들여다보고, 또 앞도 헤아릴 수 있는 사람으로 여기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문희상 의원이 자신의 정견을 가감없이 피력하다보니 종종 ‘설화’에 휘말리는 경우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난 15일 ‘대북 4천억원 지원설에 대해 현 정부에서 매듭을 지어야 한다’며 ‘통치행위였다면 문제삼지 않아야 한다’고 언급해 야당의 공세를 산 것도 한 예. 또 지난해 국무총리 인선과 관련, ‘70여명의 예비후보 중 예선을 통과한 사람이 단 한명이었다’며 ‘노무현 정부 초대 총리 임명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언급함으로써 예심을 통과한 사람이 누구냐에 대한 구구한 억측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비서실장에 내정된 이후 문희상 의원 측근들은 “너무 많은 얘기를 쏟아내는 문 의원이 불안해 보인다”며 우려하고 있다. 노무현 정권 초대 비서실장으로 막중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말 그대로 ‘비서실장’역할에 충실해야 한다는 고언을 하고 있는 것.
‘비서는 입이 없다’던 박지원 실장의 청와대 복귀 일성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의견도 적지 않다. 비서실장의 한마디는 당선자 곧 대통령의 뜻으로 해석돼, 파문이 일기 쉽다는 점을 되새겨야 한다는 얘기다.
아무튼 ‘이데올로그’로서 문희상 의원은 노무현 당선자 탄생 과정에서 그 나름대로의 역사인식을 바탕으로 노무현 당선을 미리 가늠하기도 했다. ‘노풍’이 가라앉아 최저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을 때에는 대선기획단장을 맡아 묵묵히 역할을 수행했고, 후보 단일화를 앞두고 민주당 의원들의 탈당러시가 이어졌을 때에는 동료 의원들을 규합해 ‘노무현 지지선언’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 지난해 6•13지방선거전 당시 노 당선자와 함께 경기도 군 포 정당연설회에 참석한 문희상 의원. 노 당선자는 문의 원에 대해 “보석과 같은 정치인”이라는 등의 찬사를 보내 며 높은 신뢰를 나타내기도. | ||
학계, 재계 등 각계 전문가들이 자문위원과 운영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연구소는 김대중 정권 초기에는 ‘싱크탱크’ 역할을 하기도 했고, 김대중 정권 내내 40여회 이상의 초청 강연을 개최, 21세기 한국의 발전모델을 모색하기도 했다.
문희상 의원은 설화에 자주 휩쓸린다는 점 외에도 ‘체인스모커’라는 점과 ‘엉덩이가 무겁다’는 점이 단점으로 종종 거론된다. 그러나 ‘체인스모커’라는 얘기는 이제 옛말이 되었다.
지난해 1월, 전격적으로 금연을 단행했기 때문. 정치권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애연가였던 문희상 의원은 하루 3~4갑을 피워대는 체인스모커였다. 그것도 한자리에서 열 개비 이상을 뚝딱 해치우기 일쑤였다. 그런 그가 금연을 결심한 데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김대중 대통령이 민주당 총재직을 버리면서 정권재창출 가능성이 희박해 보였던 시점이었고, 개인적으로는 50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건강에 신경을 쓰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금연 초기 문희상 의원의 담배와의 전쟁은 처절한 인내의 과정이었다.
1만원대의 담배값보다 훨씬 많은 돈이 사탕값과 껌값으로 들어갔고, 비서들은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동나는 사탕을 조달하기에 바빴다. 석 달 동안 사탕과 껌에 의지하며 금단현상을 극복한 이후로는 점차 안정을 찾았고, 6개월이 지나면서부터는 더 이상 보조제가 필요없게 됐다.
문희상 의원이 금연을 하면서 달라진 점은 한자리에 오래 앉아 있는 시간이 단축됐다는 점이다. 자연스럽게 이동하는 시간이 늘어나, 만나는 사람과 횟수도 많아졌다. 금연으로 엉덩이까지 가볍게 만든 셈이다.
문희상 의원의 정치 지도자론은 ‘덕장론’으로 요약될 수 있다. ‘용맹한 장수는 지혜로운 장수를 당하지 못하고, 지혜로운 장수는 덕을 쌓은 장수를 당하지 못한다.’ 정치 지도자의 덕목으로 ‘덕’을 으뜸으로 삼는 그는 평소 스스로 ‘덕’을 쌓는 데에도 남다른 공을 들인다.
이런 일화도 있었다. 그가 해군장교로 군 복무를 하던 때의 일이다. 자신의 부하 가운데 나이가 들어 입대한 사병이 있었는데,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예식도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왔다는 딱한 사정을 전해들은 것. 문 의원은 그 자신이 20대였지만 직접 주례를 맡아 결혼식을 올려줬다.
이후 그 사병은 세월이 10여년 이상 흐른 뒤 문희상 의원이 국회의원에 출마한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선거를 돕겠다고 찾아와 주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고 한다.
또 민주당 대표 비서실장 시절, 빚보증을 잘못 서 수많은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상속받은 집마저 날릴 상황에 몰리자, 당시 민주당을 출입했던 기자들이 자발적으로 성금을 모아 급한 빚을 갚게 했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97년 대선기간 두 아들에 대한 직언으로 김대중 대통령이 탐탁치않아 했음에도 그가 초대 정무수석에 임명된 것도 한화갑 대표 등 당시 동교동계를 비롯, 주변에서 많은 사람들이 적극 천거했기에 가능했다.
이번 비서실장 내정 배경도 노무현 당선자가 정치현실을 고려했을 뿐 아니라, 주변의 호평들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는 후문이다. 5년 일정의 항해를 앞두고 있는 ‘노무현호’의 첫 조타수를 맡은 문희상 의원. 그러나 주변 상황은 그리 녹록지 않다.
대선 이후 민주당이 신주류와 구주류로 나뉘어 ‘당권투쟁’을 벌이고 있고, 원내 과반의석을 확보하고 있는 야당이 강력하게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대선으로 상처받은 유권자와 당권투쟁 과정에 사분오열된 당심을 치유해야 할 책무도 그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
여기에 북한의 핵문제 등 국내외적인 요인도 적지 않은 부담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리더십이란 강제에 의하지 않고 사람이 사람을 스스로 따라오게 하고 움직이게 하고 이끄는 힘이다.” 문희상 의원은 99년 JC중앙회 강연을 통해 리더십에 대해 이렇게 정의한 바 있다.
‘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고 출범할 노무현 정권은 한껏 기대도 받고 있지만, 동시에 우려 또한 만만치 않다. 때문에 초대 비서실장으로 내정된 문희상 의원이 노무현 당선자를 어떻게 보좌하느냐에 5년 임기의 ‘노무현 정권’의 미래가 달라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대와 우려가 교차하고 있는 노무현 차기 정권에서 문희상 내정자가 노 당선자의 기대처럼 유비, 관우, 장비 세 사람의 몫을 톡톡히 해내, ‘보석’과 같은 존재로 빛을 발할 수 있을지 향후 그의 역할이 자못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