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BK’ VS ‘정수’ 무느냐 물리느냐
▲ 한나라당 내 경선레이스가 본격화됨에 따라 이명박 전 시장(왼쪽)과 박근혜 전 대표가 치열한 검증공방을 펼치고 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일요신문>은 현재 지지도에서 부동의 1~2위를 달리고 있는 이 전 시장과 박 전 대표를 비롯, 한나라당의 경선 후보로 나선 홍준표 원희룡 고진화 의원 등 대선주자들을 둘러싼 지상 검증 시리즈를 준비했다. 그 첫 번째로 ‘빅2’ 후보의 최대 ‘아킬레스건’으로 떠오르고 있는 이 전 시장의 ‘BBK 연루설’과 박 전 대표의 ‘정수장학회 의혹’의 실체를 해부해 앞으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검증 대상이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나는 (BBK의) 단 한 주의 주식도 갖고 있지 않다. BBK는 김경준 씨가 나를 만나기 전부터 설립, 운영해오던 회사다. 김 씨와 함께 회사를 설립하려 했지만 도중에 문제를 발견해 회사 창립을 중지했다. BBK와는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전혀 관련이 없고, 그의 범죄 사실에 대해선 검찰과 금융감독위원회 등이 이미 조사한 자료를 갖고 있다.”
6월 7일 이명박 전 시장이 자청한 기자회견에서 밝힌 ‘BBK 연루설’ 의혹에 대한 해명이다. BBK 연루설은 BBK 대표였던 재미동포 사업가 김경준 씨(41)의 횡령 및 사기 사건에 이 전 시장이 관련돼 있다는 의혹이다. 최근 박근혜 캠프 측에서 ‘이명박 X파일’을 본격적으로 거론하면서 다시 불거지고 있다.
이 전 시장과 BBK와의 관계의 실체는 무엇일까. 이 전 시장은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상실한 98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그리고 1년여 만인 99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고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인터넷사업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김 씨 사기 사건에 제일 처음 등장하는 BBK는 99년 4월 설립됐다. 이 회사는 조세 피난처인 버진아일랜드에 소재하고 있는 전형적인 페이퍼컴퍼니다. BBK 한국지사는 99년 8월에 설립됐다. 이 회사는 대표가 김 씨로 되어 있었고 주소는 서울시 중구 태평로 2가 150번지 삼성생명빌딩 17층이었다.
이 회사가 설립된 지 약 1년 만인 2000년 2월 같은 주소지에 ‘LK이뱅크’가 설립됐다. 이 회사는 이 전 시장과 김 씨가 공동출자하는 형식이었다. 회사 이름인 LK도 두 사람의 이니셜을 딴 것으로 알려졌다.
BBK는 본격적으로 국내 기업들과 투자자들을 상대로 투자자금을 끌어들였다. ‘(주)다스’가 190억 원을 투자했고, 벤처기업으로 각광받던 ‘심텍’도 50억 원을 투자했다. 다스는 익히 알려진 대로 이 전 시장의 친형인 이상은 회장이 대표로 있는 회사다. 이밖에도 국내 굴지의 재벌회사와 금융권의 돈도 투자된 것으로 알려졌다. 투자자금이 1000억 원에 이른다는 얘기도 나왔다.
하지만 이 회사는 심각한 문제가 발견돼 2001년 3월 금감원으로부터 등록취소 조치를 당했다. 투자금을 고스란히 날리게 된 심텍은 2001년 10월 BBK 측을 고소했다. 그런데 당시 피고소인은 이 전 시장과 김 씨 두 사람이었다. 검찰이 수사에 나섰으나 심텍 측의 소 취하로 사태는 일단락되는 듯했다.
그런데 이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BBK의 후신 격인 옵셔널벤처스코리아에서도 김 씨의 사기성 행각은 계속됐다. 2002년 3월 옵셔널벤처스코리아에 투자한 한국의 소액주주 27명이 회사가 상장 폐기되는 과정에서 투자금을 잃었다며 김 씨를 검찰에 고소했다. 검찰은 김 씨가 회사자금 384억여 원을 횡령한 혐의를 확인했지만 이미 그는 2001년 12월 미국으로 도피한 뒤였다. 검찰은 2003년 법원으로부터 영장을 발부받았고 법무부는 2004년 1월 미국 사법당국에 김 씨의 인도를 정식 청구했다.
그 와중이던 2003년 5월 다스의 이 회장은 “김 씨에게 거액을 투자했다가 140억 원대의 큰 피해를 당했다”며 김 씨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또한 이 전 시장은 2004년 2월 역시 김 씨를 상대로 100억 원대의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이 전 시장 측은 LK이뱅크의 사업 관여에 대해서만 인정할 뿐, BBK와는 하등 상관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오히려 김 씨에게 피해를 당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면서 김 씨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의혹의 차단에 급급한 양상이다.
BBK 연루설과 관련해 이 전 시장이 검증받아야 할 첫 번째 의혹은 당시 언론사와 가졌던 인터뷰의 내용에서 드러난다.
그는 2000년 가을, 언론사를 상대로 자신의 새로운 사업인 LK이뱅크에 대해서 활발한 홍보 전략을 펼쳤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BBK와 김 씨를 자랑삼아 거론하기도 했다. 특히 2000년 10월 16일자 <동아일보>에서는 이 전 시장이 김 씨와 함께 인터뷰에 응했음을 알 수 있다.
‘이(명박) 대표가 꼽는 흑자비법은 아비트리지(차익) 거래. 미국계 살로먼스미스바니에서 99년 초 연 수익률 120%대를 기록한 김경준(34) BBK 투자자문 사장을 영입했다. 이 대표는 김 사장에 대한 기대가 몹시 큰 눈치다. “김 사장이 지난해 BBK 설립 이후 한국증시의 주가가 60% 빠질 때 아비트리지 거래로 28.8%의 수익률을 냈다”고 소개하면서 연방 김 사장의 어깨를 토닥였다.’
같은 날 <중앙일보>에 보도된 인터뷰에서 그는 “국내 증권사들은 사이버 트레이딩에 몰두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나는 생소한 증권업 투신을 통해 첨단기법의 증권 업무를 보여줄 작정이다. 올 초 이미 새로운 금융상품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LK이뱅크와 자산관리회사인 BBK를 창업한 바 있다. 이뱅크증권중개는 이 두 회사를 이용해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주로 외국인을 큰 고객으로 삼을 작정이다. BBK를 통해 이미 외국인 큰손들을 확보해 둔 상태”라고 언급했다.
당시 이 전 시장은 <일요신문>과도 인터뷰를 가졌는데 그가 “이뱅크를 통해 낙후된 국내 금융시장에 새로운 금융기업을 선보일 것이다. 1년 전 BBK란 투자자문사를 세웠는데 투자자문사에게 증권사는 꼭 필요하다. 이뱅크는 첫해부터 이익을 낼 것이다”라고 말한 내용이 본지 2000년 11월 12일자에 보도됐다.
이 전 시장의 홍보전은 BBK가 금감원으로부터 등록 취소를 당하기 직전인 2001년 2월까지 계속된다. <월간중앙> 2001년 3월호에서 그는 “나는 어차피 정치방학이 2~3년 갈 것으로 보고 그 기간에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심각하게 고민했습니다. 새로운 금융기법을 내가 익혀야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정치를 하더라도 필요하다고 여겼습니다. 이를 경험한 사람으로서 지난해 초에 벌써 BBK라는 투자자문회사를 설립해 펀드를 묻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 자문회사가 필요로 하는 것이 증권회사입니다. 그래서 설립한 것입니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당시의 인터뷰 내용에 대해 이 전 시장 측은 “인터뷰 내용은 잘못 나간 것이며 오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5개월의 시차를 통해 4개의 주요 언론사와 잇따라 가진 인터뷰에서 모두 동일하게 밝힌 내용을 모두 싸잡아 오보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 수긍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많다. 이 전 시장 측이 보다 명확히 밝혀야 할 대목이라는 지적이다.
▲ 정수장학회 | ||
하지만 검찰 수사 과정에서 심텍은 피해금액을 모두 보상받는 조건으로 고소를 취하한 것으로 알려졌다. 소 취하 건이어서 당연히 제대로 된 수사가 이뤄졌겠느냐는 의심이 나오고 있으나 이 전 시장 측은 현재 “당시 검찰 조사 결과 ‘이명박은 BBK 사건과 무관하다’는 결론이 나왔다”는 점을 계속 강조하고 있다. 당초 강경 입장이었던 심텍이 어떤 조건으로 소를 취하했고, 검찰조서에는 왜 굳이 이 전 시장과 BBK의 무관함을 애써 기록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검증이 이뤄져야 할 부분이다. 이에 대해 심텍 측은 기자의 계속된 확인 요청에도 불구하고 끝내 인터뷰에 응하지 않는 등 굳게 입을 닫고 있다.
세 번째 검증 대상은 이 전 시장의 형이 대표로 있는 다스에 대한 의혹이다. 그동안 “다스의 실소유주는 이 전 시장이다”라는 의혹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다스가 2000년 당시 BBK에 190억 원이라는 거액을 투자한 것에 대해서도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다스의 이 회장은 “김 씨가 직접 회사를 방문해 투자를 권유해 투자했다”며 동생과는 무관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김 씨의 사기행각으로 큰 피해를 당한 이 전 시장 측이 막상 김 씨를 상대로 소송을 벌인 것은 이미 검찰 조사가 끝나고 법무부가 미국에 김 씨 송환을 요구하고 나선 이후인 2004년 2월이라는 점도 의문이다. 일각에서는 김 씨의 송환 여부가 향후 대선 쟁점으로 부각될 것에 대비해 미리 차단용으로 소송을 제기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현재 미국에서 구속 수감 중인 김 씨 측은 “다스 측이 회사 투자에서 발생한 손실을 모두 우리에게 떠넘기려 한다. 김 씨는 BBK의 투자 자문 에이전트에 불과하며 실소유주인 이 전 시장이 투자손실액에 대한 책임을 오히려 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 씨는 이 전 시장이 BBK의 실소유주라는 주장을 하고 있는 셈이다. 향후 이 논란은 검증 공방에서 점차 더 가열될 전망이다.
“정수장학회는 공익법인이기 때문에 이미 사회에 환원한 것인데 그것을 또 환원하라는 것은 어폐가 있다. 그 문제와 관련해서는 증거라든가 증인이 있다. 자꾸 틈만 나면 또 하고 또 하고 하는 것은 정치공세일 뿐이다.”
5월 29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부일장학회(정수장학회의 전신)는 5·16 이후 당시 중앙정보부에 의해 강제 헌납당한 것”이라며 “정수장학회는 헌납주식을 국가에 원상회복하는 것이 원칙”이라는 결론을 내리자 그 이튿날 박근혜 전 대표가 강력히 반발하면서 한 말이다.
이에 대해 부일장학회의 원소유주였던 고 김지태 씨의 차남 김영우 씨는 지난 1일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정수장학회의 주인은 이사 및 감사로 이뤄진 임원들이다. 이들이 재단을 좌지우지한다. 따라서 이사장을 비롯한 임원진의 임명권을 행사하고 있는 박 전 대표가 사실상의 주인이다”라고 밝혔다. 그는 “이사진 구성이 보다 더 개방적이어야 하고 그들이 재단을 운영하는 과정이 보다 더 투명하게 공개되어야 진정한 공익법인이다. 하지만 기존의 이사진들이 밀실 회의에서 새로운 이사를 뽑고 그 안에서 모든 결정권이 행사되는 지금의 방식에서 무슨 공익성을 기대할 수 있는가”라고 반문했다.
김 씨는 “나는 처음 박 전 대표가 기자들의 질문에 답할 때 ‘이제 나는 이사장을 물러났으므로 정수장학회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말할 줄 알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는 ‘정수장학회는 이미 공익법인이다’라는 말만 반복하고 있다. 아직도 자신이 정수장학회의 주인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덧붙였다.
김 씨의 주장을 확인하기 위해선 정수장학회의 이사진 구성과 선임 절차에 대해 파악할 필요가 있다. 정수장학회는 이사장을 포함한 이사 5명과 감사 2명 등 모두 7명의 임원으로 구성되고, 재단에 관련한 모든 의결 사항은 바로 이 임원 회의에서 결정되는 것으로 밝혀졌다. <일요신문>이 입수한 2000년 이후의 정수장학회 임원현황표를 살펴보면 임원들의 임기(4년)와 승계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95년 9월 이사장에 취임한 박 전 대표는 두 차례 연임을 했다. 당초 남은 임기는 올해 10월까지였으나, 정치권의 공세로 인해 2005년 2월 이사장직을 자진사퇴한 바 있다. 박 전 대표의 사퇴와 천기흥 이사의 대한변협 회장 취임, 그리고 김광웅 숙대 교수의 임기 만료로 2005년 잇따라 세 명의 이사진이 교체됐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새롭게 입성한 이들은 모두 박정희 정권에서 외교관을 지냈고, 청와대 의전비서관 경력이 있는 ‘친 박근혜’ 인사들로 채워졌다.
박 전 대표의 이사장 자리는 최필립 전 뉴질랜드 대사가 승계했다. 그는 74년부터 박 정권 말까지 청와대 비서관으로 오래 근무했고, 박 전 대표가 한때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창당했던 한국미래연합에서도 함께 한 측근이었다. 2005년 6월과 9월에 각각 이사로 선임된 최성홍 전 외교통상부 장관과 신성오 전 외교안보연구원장도 박정희 정권에서 외교관을 지냈다. 나머지 2명의 이사는 송광용 서울교대 교수와 김덕순 전 한국청소년육성회 총재로 이들은 각각 교사와 경찰 출신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다면 정수장학회를 좌지우지하는 이사 및 감사의 선임 과정은 어떻게 이뤄질까. 본지가 입수한 정수장학회의 일부 임원 회의록을 살펴보면 그 선임 과정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2003년 2월 18일 회의록 가운데 일부 내용이다.
‘의장(박 전 대표) : “네 번째 부의할 안건은 임원선임의 건입니다.”
(최병완 감사 잠시 퇴장)
의장 : “최 감사의 임기가 3월 25일로 끝나게 되었습니다만 장학회에 필요한 분이라 다시 연임할 것을 제안합니다. 의견이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일동 : (만장일치로 찬성하다) (최 감사 다시 입장해서 간단한 인사)
의장 : “본 안건도 만장일치로 의결되었음을 선포합니다.”’
임원 선임 과정이 이사장의 주도로 불과 2~3분 만에 간단히 끝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임원회의의 막강한 권한은 40억~50억 원대에 이르는 막대한 장학회의 예결산 집행이 모두 여기서 결정되고, 또한 장학회 임원 선임은 물론 주식을 100% 소유하고 있는 부산일보의 임원 선임까지 여기서 다 결정된다는 점이다.
정수장학회 자체만을 놓고 볼 때 박 전 대표가 개인적으로 검증을 받을 부분은 이처럼 공익재단의 운영 과정이 사실상 이사장의 독단적인 결정에 의해 이뤄진 것이 아니냐는 의혹과 함께 최 이사장의 선임 등 여전히 장학회 의사결정에 박대표가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가 하는 점, 그리고 그동안 정수장학회의 예산 집행이 얼마나 투명하게 이뤄졌는가 하는 점 등이다.
박 전 대표는 자신의 이사장 재임 시절인 지난 98년과 99년 각각 섭외비로만 한 해 1억 원과 1억 3500만 원을 지급받은 사실이 알려져 구설수에 올랐다. 당시 이사장의 월급이 약 1100만 원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박 전 대표는 정수장학회에서만 한 해 최소 2억~3억 원을 지급받은 셈이기 때문이다.
본지가 입수한 지난 2003년의 정수장학회 수입 지출 집행 내역을 살펴보면 수입은 49억 8400여만 원이고, 지출은 40억 3400여만 원인 것으로 나타났다. 수입의 대부분은 MBC 주식 배당금(17억 원)과 수입이자(8억6800여만 원), 부산일보 주식 배당금(8억 원) 등이었다.
관심을 끌고 있는 지출내역의 경우 장학재단의 주목적이랄 수 있는 장학금 지급이 21억 9900여만 원으로 전체 지출의 약 55%를 차지하고 있었다. ‘목적사업(장학사업)준비비’ 명목으로 10억 4100여만 원이 지출됐고, 운영비는 약 5억 4300여만 원이 사용된 것으로 나와 있다. 이는 통상 6억~7억 원이었던 것이 2003년부터 섭외비가 제외되면서 줄어든 것이었다. 운영비의 대부분은 상여금과 수당을 포함한 급여로 지출됐다. 하지만 잡비 회의비 교통비 통신비 차량유지비 복리후생비 등의 항목으로 많게는 7000만 원에서 적게는 1000만 원까지 다양하게 지출 내역이 기재되어 있었다.
감명국 기자 km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