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4일 현대아산병원에 마련한 빈소에 비치 된 고 정몽헌 회장의 영정. 그가 선친과 자신 의 2대에 걸친 소망이 이뤄지는 모습을 하늘에 서라도 보게 되기를 기도해본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그리고 꼬박 6개월 만인 8월4일 새벽 그는 “어리석은 저를 용서해주기 바랍니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허공으로 뛰어내렸다.
가족과 임직원에게 못다한 사랑과 못다한 대북 경협사업에 대한 부탁을 급하게 흘려쓴 그는 ‘먼저 가는 사람’으로서 남겨진 사람에게 ‘용서’를 구한 것이다.
사실 그는 김대중 정부의 퇴진 이후 대북 경협사업과 관련 “죄송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지난 2월16일 인터뷰에서 그는 대북송금과 관련한 질문을 받고 5억달러를 북한에 송금한 사실을 시인하며 “한반도 주변상황이 어려운데 이같은 문제로 심려를 끼쳐드려 (국민들께)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유서에서도 그는 “모든 것은 나의 잘못, 어리석은 아빠를 용서해달라”고 부인과 자녀들에게 말을 높였다. 김윤규 사장에게 보내는 유서를 통해서도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저를 용서해달라”고 말을 높이며 자신을 낮췄다.
연이은 검찰 수사와 대북사업 난항, 계열사 자금난 등으로 시달렸을 그가 떠나는 순간까지 미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는 얘기다.
실제로 대북송금 문제를 수사하던 특검 주변에선 정몽헌 회장이 “섬세하고 샌님 스타일”이란 얘기가 나왔다. 재벌회장치고는 의외였다는 것.
그에 대해서는 주로 ‘소박하고 꼼꼼한 인물’이라는 평이 따른다. 정 회장의 동창 사이에선 그가 남 앞에 나서기를 싫어해 ‘촌색시’‘촌닭’이라고 불렸을 정도였다.
정씨 일가 사이에서도 정 회장은 차분한 성품으로 통했다. 정씨 일문에선 정몽구 회장이 부친을 닮은 화끈한 성격으로 ‘재미있는 사람’으로 통했지만 정몽헌 회장은 ‘재미는 덜하고 빈틈없는 사람’으로 통한 것. 물론 불같은 성미만은 부친을 빼다박은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그는 연세대 국문과를 수석으로 졸업할 만큼 학업도 열심이었고 생활 습관도 ‘또박또박했다’는 게 현대 주변의 평가다.
그의 공식적인 현대 경력은 지난 75년 현대중공업 사원 입사로 시작한다. 그의 사업 경력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현대상선을 맡았던 시기, 현대전자 설립, 그리고 현대그룹 회장을 맡았던 마지막 시기로 나눌 수 있다.
▲ 수차례 방북 만남을 통해 현대가와 친분이 두터운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조문단을 파견할 것으로 알려졌다. | ||
정몽헌 회장이 주체가 되어 벌인 사업은 현대전자(현 하이닉스반도체)의 반도체 사업이다. 그는 지난 84년 현대전자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중후장대 산업에만 치우쳤던 현대그룹의 차세대 수익원으로 경박단소형 산업인 반도체 사업을 선정하고 과감한 현대식 드라이브를 걸었다.
현대는 빠른 속도로 선발업체인 삼성전자와의 차이를 줄여나가는 등 일부 성과를 보이기도 했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현대그룹의 후계자군으로 도약했다. 특히 현대전자 아메리카 법인은 정몽헌 인맥의 산실 노릇을 하는 등 그가 경영자로서 크는 데 바탕이 됐다.
마지막으로 그가 현대그룹 회장에 오를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는 지난 96년 그가 현대건설 회장 자리에 취임한 것을 꼽을 수 있다.
현대그룹은 모태인 현대건설이 기반이 됐고 현대그룹 구조조정본부는 현대건설 인맥이 쥐고 있었다. 그는 현대건설 회장으로 일하면서 정주영 명예회장의 가신인 이익치 회장이나 김윤규 사장 등을 자신의 캠프에 합류시킬 수 있었다.
98년부터 그의 경영인생은 전성기를 누렸다. 97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가 당선된 뒤 부친인 정주영 회장이 대북사업을 본격화한 것.
그때 그는 형인 정몽구 회장을 제치고 대북사업 루트를 독점했다. 그러면서 그는 98년 1월 현대그룹 대외업무 총괄 회장으로 승진해 사실상 형을 제치고 현대그룹의 후계자가 됐음을 공식화했다.
이어 98년 6월 부친과 함께 소떼 5백마리를 끌고 판문점을 통해 방북하고 이어 11월에는 금강산 관광 유람선의 첫배를 띄우면서 그는 사업 인생의 절정을 맛봤다.
2000년 당시 김대중 대통령의 평양방문으로 현대의 대북 사업은 1단계 결실을 맺은 듯했지만 오히려 그때부터 현대그룹의 자금 사정은 급격하게 악화됐다.
남북정상회담 즈음 대북경협사업에 따른 사업권 보장을 받는 조건으로 엄청난 돈이 북으로 건네졌고 ‘아웃풋(output)’없는 엄청난 ‘인풋(input)’은 현대를 자금난에 빠뜨렸다. 결과적으로 현대그룹의 자금 보충을 위해 현대자동차 경영권을 가져오려고 했지만 이것이 오히려 왕자의 난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됐을 뿐이다.
▲ 지난 2000년 5월 왕자의 난 당시 동시퇴진을 선언한 3부자 가 사옥을 나서고 있다(위쪽). 고 정몽헌 회장은 그해 6월 판문점을 통한 부친의 방북길에 함께 나섰다. 그의 후계 승리를 확인할 수 있었던 순간. | ||
이미 건네진 엄청난 규모의 남북경협사업 자금, 금강산 관광 사업 적자 누적과 이로 인한 계열사 부실화, 이어 남북 경협 사업의 버팀목이었던 부친 정주영 회장의 사망과 김대중 정부의 임기만료, 그리고 곧이어 닥친 검찰 수사.
그는 지난해 말부터 최근까지 언론에 등장할 때마다 검찰 수사와 출국 금지라는 수식어가 따라 다녔다.
정주영 회장의 여동생이자 정몽헌 회장의 큰고모인 정희영씨는 지난 2월 금강산 육로관광 시범 때쯤 “조카(몽헌)가 마음의 상처를 많이 받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어느 것이 결정적으로 그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줬는지는 알 수 없게 됐다.
유족들이 경찰 조사에서 ‘검찰 수사로 힘들어 했다’고 말했지만 지난 2~3년간 그에게 기쁜 일이 별로 없었다는 점에 비추어보면 꼭 그것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가 지난 4일 새벽 사무실 창문을 통과해 허공을 가르기 직전의 순간, 어떤 것이 그의 인내를 임계치 바깥으로 떠밀었는지 헤아리기 어렵다.
어쨌든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현대그룹 회장의 자격으로 대북사업을 진행하면서 받았던 ‘마음의 상처’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컸음을 고백한 셈이다. “용서를 해달라”는 그의 유서가 역설적으로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