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으로 오세요” 남의 집 앞서 호객행위
지난해 초 메리츠화재의 지휘봉을 넘겨받은 김용범 사장은 취임하자마자 전례 없는 대규모 구조조정에 나서며 임직원들을 긴장시켰다. 경영진단과 컨설팅 등을 통해 임원과 지점을 절반으로 줄이는 인력감축을 단행한 것.
메리츠화재가 팀 단위로 인력을 빼가는 등 파격적 설계사 영입 전략으로 경쟁사들의 원성을 사고 있다. 사진은 서울 역삼동 메리츠타워. 일요신문DB.
김 사장은 취임 직후인 지난해 3월에만 40개의 지역단을 폐지한 데 이어 최근에는 지역본부 12곳, 영업지점 119개를 없애는 등 1년 6개월간 조직슬림화에 총력을 쏟았다. 그 결과 영업지점은 기존 221개에서 102개 초대형 점포(본부)로 통폐합됐고, 최근의 지역본부 폐쇄로 메리츠화재는 현재 본사와 영업지점만 남은 구조로 운영되고 있다.
영업조직이 축소되면서 메리츠화재는 보험법인대리점(GA)에 보험판매의 상당 부분을 의존하는 구조로 변했다. GA를 통한 매출이 메리츠화재 전속 설계사의 매출보다 10배나 많아졌고, 이로 인해 전속 설계사들의 사기가 떨어지는 부작용을 낳았다.
지난 여름 발생한 메리츠화재와 GA 간의 갈등은 여기서 비롯했다. 김용범 사장이 전속 설계사의 이탈을 막기 위해 수수료를 최고 1000% 인상하는 파격적인 조치를 단행했다. 이렇게 되자 이번에는 GA들이 역으로 자신들의 설계사 이탈이 우려된다며 반발했고, 메리츠화재 상품 판매를 보이콧하는 상황으로 번졌다.
당시 갈등은 양측의 연이은 담판을 통해 어렵사리 봉합됐는데, 문제는 메리츠화재가 영업조직 재건을 위해 다른 보험사 설계사들로 눈길을 돌리면서 업계 내부 갈등이 일고 있다는 점이다.
보험업계에 따르면 메리츠화재는 최근 능력 있는 보험 설계사들을 스카우트하기 위해 다른 보험사 소속 인력들에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메리츠는 파격적인 수수료와 인센티브 등을 앞세워 경쟁사 우수 인력들과 잇달아 접촉해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메리츠화재는 최근 다른 보험사 소속 설계사를 무려 700여 명이나 영입한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지점장급을 많이 스카우트했는데, 팀 단위로 영업을 하는 보험업의 특성상 지점장이 회사를 옮기면 그 밑에서 일하던 설계사들이 대거 함께 이직하는 연쇄 효과를 일으킨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
보험사 관계자들은 이 정도 대규모 인력 이동은 보험업계에서 처음 있는 일이라고 입을 모은다. 한 대형 보험사 관계자는 “보험업계에서 일부 설계사들을 소위 ‘철새’라고 부를 정도로 이직이 잦은 업종인 것은 맞지만 단기간에 이렇게 많은 인력이 특정 보험사로 몰린 사례는 처음인 것으로 안다”면서 “다만 경쟁사들의 불만이 고조되고 있는 상황이라 메리츠화재의 스카우트 전략이 ‘상도의’에 맞는 것인지는 의문스럽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가 말한 ‘상도의’는 무엇일까? 최근 메리츠화재가 밀어붙이는 설계사 영입 방식을 보면 보험업계에서 볼멘소리가 나오는 이유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보험사 관계자들에 따르면 메리츠화재는 지난 7월 내놓은 설계사 수수료 1000% 인상 외에도 다양한 인센티브를 통해 업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수당을 지급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또 조직 통폐합으로 간부자리가 대거 공석이 되면서 파격적인 승진 기회가 제공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여기까지는 회사 내부적으로 제공하는 일종의 동기 부여 방식이니만큼 경쟁사들과 마찰을 일으킬 소지가 별로 없다. 문제는 다른 회사 인력에 대한 구애작전이 지나치게(?) 적극적이라는 점이다.
보험업계에 따르면 메리츠화재는 현재 다른 회사 설계사 2명을 영입하면 팀장으로 승진시키고, 팀원을 10명 영입하면 지점장직을 주고 있다. 또 40명 이상이면 본부장으로 곧바로 승진시켜주는 조건을 내걸고 있다. 직급이 높을수록 거느리는 인력이 많아져 수입도 늘어나는 일종의 사다리 구조인 보험영업조직의 특성상 이는 무리한 스카우트 행태로 이어지는 원인이 되고 있다.
메리츠화재 일부 직원들은 경쟁사 인력을 접촉하기 위해 해당 회사 사무실 앞에 진을 치고 있는 진풍경까지 연출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남의 회사 대문 앞에서 일종의 호객행위를 하는 셈인데, 이로 인해 실제로 인력이 유출되는 현상까지 나타나자 해당 회사들은 발끈하고 나섰다.
업계 상위권인 A 보험사의 경우 메리츠화재 소속 직원들이 사무실 건물 앞에서 대기하다 자사 설계사들을 접촉하는 장면을 동영상으로 촬영해 본사에 강력히 항의했고, B 사는 아예 금융당국에 민원을 제기해 공식적으로 문제제기를 하고 나섰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협회들이 나서 중재하는 자리를 마련했지만 꼬인 실타래는 쉽게 풀리지 않고 있다. 생명보험협회와 손해보험협회, 보험대리점협회는 지난 9월 ‘모집질서 개선 운영협의회’를 개최해 보험사 관계자들을 불러 모았다. 이날 협의회의 공식적인 의제는 보험업계가 공정경쟁을 위해 노력한다는 내용을 담은 자율협약이 제대로 지켜지고 있는지 점검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실제 내용은 메리츠화재의 무리한 설계사 스카우트 행태를 성토하는 자리였다는 것이 보험업계의 전언이다. 참석자들은 메리츠화재가 높은 수수료와 각종 인센티브, 파격 승진 등을 앞세워 경쟁사 영업조직을 초토화시키고 있다는 불만을 토로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에 따라 협의회는 이날 기준이 모호한 부당스카우트 제한 조항을 개선한다는 데 합의한 것으로 파악된다. 현행 자율협약 중 부당스카우트 제한에 관한 조항은 “모집조직을 부당하게 대량 이동시키거나 과도한 성과급 지급을 금지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하지만 부당한 대량 이동이나 과도한 성과급이 어느 정도인지 정해놓지 않아 사실상 부당스카우트를 막지 못한다는 것이 보험사들의 지적이다.
이와 관련해 당사자인 메리츠화재는 회사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일부 영업조직의 과욕으로 불거진 일일 뿐 큰 문제는 없다는 입장이다. 회사 관계자는 “수수료나 인센티브, 승진제도 등은 신규 영입 인력뿐 아니라 기존 영업조직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제도”라며 “일종의 자영업자인 설계사들이 많은 수입과 더 나은 근무환경을 위해 자발적으로 이직을 선택하는 것일 뿐”이라고 반박했다. 그는 이어 “영입된 설계사 중 일부는 현재 다른 회사 소속이 아니라 설계사를 그만둔 사람들이 다시 일을 하기 시작한 것”이라면서 “사실관계가 과장된 측면이 꽤 있다”고 설명했다.
이영복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