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눈치보기 급급해 ‘리더십’ 약화…초·재선 의원 중심 비토 확산
특히 새누리당에 대한 비난 여론이 거세다. 국정을 풀어나가기 위한 야권과의 파트너십보다는 청와대 눈치 보기에 급급하다는 지적이 끊이질 않고 있다. 당 내부에서조차 이정현 대표에 대한 비토 기류가 급격히 확산되는 것도 이런 까닭에서다. 정치권에선 박근혜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친박 핵심부가 고립될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9월 28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본청 앞 계단에서 정진석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정세균 국회의장 사퇴 촉구 결의대회’에 참석해 규탄 발언을 하고 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역대 최악’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19대 국회는 개원 후 넉 달 동안 3건의 법안만을 통과시켰다. 그런데 같은 기간 20대 국회의 법안 통과 수는 전무하다. 2000여 건이 넘는 법안이 발의됐지만 대부분 재탕이거나 급조된 법안이었고, 그나마 괜찮은 법안들은 정국이 얼어붙은 탓에 처리되지 못하고 있다.
이에 대해 여야 모두 책임을 면하긴 어렵다. 권대우 정치평론가는 “주요 3당이 정치적 이해득실에 따라 움직이다 보니 협상이 잘 안 된다. 새누리당은 ‘청와대 거수기’ 역할만 하고 있고, 야권은 ‘여소야대’ 하에서 힘의 논리를 펴고 있다. 결국 정치는 실종돼 버렸다. 내년 대선이 치러진다는 점을 감안하면 당분간 지속될 것이 불가피하고, 이는 결국 국민들에게 고스란히 피해가 돌아갈 것”이라고 꼬집었다.
이런 가운데 정세균 국회의장을 겨냥한 새누리당 공세의 수위는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새누리당은 정 의장이 김재수 장관 해임 건의안을 날짜를 바꿔 강행처리하고, 정진석 원내대표와 협의했다는 허위 자료를 냈다며 직권 남용 혐의 등으로 고발했다. 현역 국회의장이 형사고발된 것은 헌정 사상 처음이다. 또 새누리당 의원들은 국회의장 공관을 항의 방문하고 있고, 국회에서 피켓 시위도 진행 중이다.
새누리당은 정 의장의 개인비리 의혹까지 제기하며 초강경 대응을 이어 나갔다. 9월 29일 친박 핵심 조원진 의원은 정 의장이 선거법 위반 혐의를 받고 있다며 공개수사를 촉구했다. 또 조 의원은 정 의장이 미국을 방문할 때 사적으로 자녀를 만나고 왔다고도 주장했다. 그는 “정 의장에 대한 여러 제보가 있다. 많은 제보를 받고 있는데 정말 그분이 의장으로서 자격이 있는지 하나하나 파헤치겠다”고 밝혔다.
새누리당이 이처럼 정 의장을 향해 화력을 모으고 있는 것에 대해 정치권에선 여러 포석이 담겨 있을 것이란 관측이다. 우선 정 의장을 바라보는 친박 핵심부의 싸늘한 시선이다. 정 의장이 9월 1일 국회 개회사에서 사드 배치와 우병우 민정수석 등에 대해 언급한 이후 친박 인사들은 공공연히 정 의장에 대해 ‘막말’을 해왔다. 당시 본회의장에서 중도 퇴장했던 새누리당 의원들은 정 의장을 가리켜 ‘테러균’ ‘악성균’ 등이라고 부른 바 있다.
정 의장이 우 수석과 사드 배치를 거론한 것에 대해 친박 진영에선 불쾌함을 감추지 않았다. 한 친박 중진 의원은 “국회의장이 현 정권의 가장 민감한 사안들을 얘기해 여야 분란을 초래했다. 우리가 무조건 잘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국회의장이 할 만한 발언은 아니다. 본인의 대권욕심이 빚어낸 결과라고밖엔 보지 않는다. 새누리당으로선 이렇게 한 쪽으로 치우친 국회의장이 이끄는 국회엔 참여할 수 없다는 입장”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선 새누리당의 국정 주도권 싸움 노림수가 담겨 있을 것이란 관측도 내놓고 있다. 여소야대 정국에서 야당 출신 국회의장에 대해 기선을 제압, 향후 국회 운영에 있어서 유리한 고지를 다지고자 하는 전략이 깔려 있다는 얘기다. 새누리당의 한 전략통 보좌관은 “박 대통령 임기 후반기 처리해야 할 법안이 산더미다. 그런데 야당이 머릿수로 밀어붙이고 정 의장이 이를 받아준다면 아무것도 못하게 생겼다. 그래서 일단 정 의장을 상대로 ‘세게’ 시위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나중에 정 의장도 정치적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고 귀띔했다.
야권은 새누리당의 정 의장 때리기 배후에 청와대가 있다고 의심한다. 더민주의 한 의원은 “우병우 민정수석 거취, 미르·케이스포츠재단 과정에서 불거진 최순실 의혹, 고 백남기 씨 사망 등에 대해 야권이 벼르고 있는 상황에서 청와대가 국면 전환용으로 정 의장을 타깃으로 삼았을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새누리당이 정 의장을 빌미로 국감에도 빠지는 등 아무것도 논의가 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이슈가 새누리당과 정 의장 간 대립으로 모아졌다. 새누리당으로선 괜찮은 결과”라고 했다.
그러나 새누리당 내부에선 지금의 스탠스에 대해 강한 반발기류가 형성되고 있다. 특히 단식 투쟁까지 하며 강경 대응을 이끌고 있는 이정현 대표에 대한 불만이 쌓이고 있다는 전언이다. 새누리당의 한 친박 초선 의원은 “아무리 여당이라고는 하지만 청와대에 이렇게까지 끌려 다니는 게 말이 되느냐. 청와대 이중대 수준이 아니라 박근혜 호위대다. 친박 의원들끼리도 문제가 많다는 얘기를 한다. 이 대표가 전혀 이런 여론을 듣지 않고, 박 대통령만 바라보고 정치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특히 상당수 초·재선 의원들은 이 대표와 강성 친박 의원들을 향해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고 있는 모습이다. 또 다른 비박 재선 의원은 “이 대표가 취임하고 강성 친박들이 최고위원을 차지할 때 예견됐던 일이다. 이들은 맹목적으로 박 대통령을 비호하는 데 목소리를 높인다. 이러면 대선에서 무조건 진다. 자중해야 한다. 결국 박 대통령을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초·재선 의원들 사이에선 박 대통령 탈당 등 친박 핵심부와 선을 긋기 위한 다양한 방안들이 거론되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정현 대표가 국감 복귀를 호소했지만 소속 의원들이 거부한 것이나 의원총회에서 ‘막말’이 오갔던 것 역시 이러한 새누리당 내부의 뒤숭숭한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그러자 친박 핵심부 일각에선 출구전략 일환으로 이정현 대표의 사퇴 가능성이 나오고 있어 관심을 끈다. 박 대통령 대선캠프 출신의 한 원로 인사의 말이다.
“솔직히 지금의 여야 상황은 박 대통령에게 나쁘지 않다. 그런데 정작 당이 문제인 것 같다. 이 대표의 ‘령’이 잘 안서는 것 같다. 의원들이 이 대표 리더십에 의문을 품고 있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이 대표의 충성심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앞으로 박 대통령 국정 운영에 도움이 될지는 별개다. 이 대표를 향한 비토 화살이 박 대통령에게로까지 날아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대표 중도사퇴도) 한 번쯤 고민해야봐야 할 카드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