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가 만사인데 참사 됐다” “국민들도 이제 대통령 중심제 폐해 많이 느낄 것”
지난 2003년 행정자치부 장관 해임건의안으로 자진사퇴했던 김두관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29일 오후 여의도 국회 의원실에서 일요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김재수 장관의 해임건의안 가결 직후 SNS를 통해 남긴 글이 화제다.
“세월 참 빠르다. 내가 해임건의안을 받고 사퇴한 지 벌써 13년이 됐다. 이제 여야의 입장이 서로 바뀌었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새누리당은 변하지 않았다. 13년 전 새누리당(당시 한나라당)은 당시 박관용 의장과 짜 맞춘 시나리오에 따라 제 해임건의안을 통과시켰다. 당시 20분의 여야 대치와 30분의 정회, 그리고 14분만의 표결로 건의안이 통과됐다. 그런데 지금 새누리당은 국무위원들까지 동원해 10시간 넘게 시간을 끄는 구태를 보였다. 국무위원들도 자괴감을 느꼈을 것이고 일선 공무원들은 상처가 클 것이다. 13년 전 새누리당은 ‘대화정치’를 강조하면서 명분 없는 해임건의안을 밀어붙였는데, 지금은 또 ‘협치’를 강조하면서 민심을 막고 있다. 답답한 심정에 글을 올렸다.”
―2003년 행정자치부 장관 재직 당시 통과된 해임건의안 명목은 한총련 학생들의 미군 훈련장 점거였다.
“2003년 8월 7일의 일이다. 당시 한총련 학생들은 한반도 긴장을 고조한다는 이유로 미군 군사훈련을 반대하는 시위를 했다. 경기도 포천의 훈련장이었다. 그런데 이미 미군 스트라이크 부대는 훈련을 마치고 훈련장을 빠져나온 상황이었다. 한총련 학생들이 타이밍을 잘못 잡아 이미 비어있는 훈련장에 들어갔다. 상식적으로 포천경찰서장이나 조금 더 나아간다면 경기경찰청장이 징계 대상이 될 수는 있었다. 아마 지금 정부라면 파출소장도 해임 안 시킬 것이다. 그런데 당시 사건을 이유로 행자부 장관 해임건의안을 제출해 통과시킨 것이다.”
―이면에 이유가 있었다고 보는가.
“당시 한나라당은 대선 패배 후유증이 컸다. 특히 대선 당선무효소송까지 내며 재검까지 간 바 있다. 내부에서는 대선 패배 굴복 분위기가 있었다. 그 쪽에서는 여러 가지 돌파구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홍사덕 당시 원내대표도 그렇고 김무성 의원도 그렇고, 노무현 대통령을 인정하지 않겠다고까지 했다. 그렇다고 당장 노 대통령의 탄핵을 할 수도 없었다. 그 상황에서 ‘리틀 노무현’이라 불리던 저의 해임건의안이 나온 것이다.”
―당시 해임건의안 통과 후 여론과 주변 반응은 어땠나.
“‘집에 인터넷이 느리면 정보통신부 장관 해임하라’ ‘상어가 해녀를 물면 해수부 장관 해임하라’ 등 각종 패러디가 나오기도 했다. 당시 한나라당 내부에서도 김홍신 의원이나 정해걸 당시 의성군수(훗날 18대 국회의원)는 해임건의안을 반대했다. 전국의 이장 통장 분들도 극렬히 반대했을 정도다. 명분이 너무 약했으니까.”
―사실 당시 행자부 장관 임명 자체가 많은 논란 속 화제였다. 비명문대 출신, 재선 군수 출신에 고작 40대였다. 당시 의회에서 하대하는 분위기를 느꼈나.
“당연하다. 군수는 예전으로 치면 총무계장 수준이다. 가진 것 없이 이장으로 시작해 군수를 거쳐 장관이 됐다. 당연히 기존 엘리트들에겐 마뜩치 않은 존재였다. 당시 고건 국무총리도 장관 제청 전 저의 인사에 대해 노 대통령께 우려를 표했을 정도였다. 첫 번째 상임위에서 정창화 당시 한나라당 의원은 제게 장관이라고도 하지 않고 ‘당신 말이요. 시골 이장하다 군수하다 장관 되니 기분 좋은가. 당신은 좋을지 몰라도 수많은 사람들은 절망했다’고 하더라. 박희태 당시 의원은 저를 두고 ‘이장 촌놈이 출세했다’고까지 했다.”
―당시 김 의원은 스스로 사퇴했다. 억울함은 없었나.
“당시 상반기 2월부터 8월까지 중앙부처 평가에서 행자부가 1위를 했다. 답답하고 화가 난 것은 사실이다. 나도 그때 왜 당당히 맞서고 싶지 않았겠나. 장관직이 얼마나 중요한 직책인가. 더군다나 주민투표법, 국가균형발전지방분권특별법, 신행정수도건설특별법 등 3대 특별법을 준비하고 있던 시점이었다. 이것만 하면 참여정부 국정개혁 과제 중 지방분권은 확실히 할 수 있겠다 싶었다. 그럼에도 당시 해임결의안은 국회 다수가 결의한 것이다. 국민 절반 이상이 묻는 것이었다. 정치적 함의가 컸다. 국회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한나라당과 행정 권력을 맡은 대통령이 사사건건 부딪히면 과제 수행이 어렵다고 판단했다.”
―당시 사의를 받아든 노무현 대통령은 어떤 반응이었나.
“처음에는 노발대발하셨다. 왜 한나라당의 부당한 정치공세에 당당히 맞서지 않고 굴복하느냐고. 앞서의 이유로 저의 설득 끝에 나중에서야 저의 사의를 받아들이셨다. 사의를 표한 지 보름만의 일이었다.”
지난 2003년 9월 3일 오후 행자부 장관 해임건의안이 국회에서 가결된 뒤 노무현 대통령(오른쪽)과 김두관 행자부 장관이 어두운 표정으로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 연합뉴스
―현재 김 장관의 해임건의안을 거부하고 있는 정부 여당은 ‘김 장관이 업무를 함에 있어 평가받을 기회조차 못 받았다’는 이유를 들고 있다.
“물론 김재수 장관 스스로 억울함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사청문회 준비 부실이나 과거 구설수 등을 비춰봤을 때 김 장관 본인의 책임도 크다고 본다. 또 부적격 청문회 이후에도 모교 커뮤니티에 ‘흙수저’ 발언 등 부적절한 발언을 남기지 않았나. 내가봤을 때 모교인 경북대는 아주 명문대다.”
―김 장관 스스로 사퇴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는가.
“물론 상식적으로 본다면 김 장관 스스로 사의를 표했어야 한다. 둘 중 하나 같다. 절대 김 장관은 철면피가 아니다. 청와대의 분위기 때문에 스스로 사의를 표하지 못하고 있거나 아니면 본인은 이미 사의를 표했지만 청와대 측에서 받지 않은 것 같다. 다만, 정부 여당이 이번 사태를 두고 버티고 있는 상황의 본질은 다른 데 있다.”
―본질이 뭔가.
“본질은 박근혜 대통령이 4·13 총선 패배 이후 ‘국민의 엄중한 명령’을 무시하고 국정기조를 바꾸지 않는 데 있다. 여소야대를 인정하지 않고 대화와 협치를 무시한다. 인사가 만사인데 참사가 됐다. 야당을 파트너로 인정한다면 기조를 바꿨어야 한다. 세종대왕은 취임 당시 삼정승과 육판서, 특히 이조와 육조의 당상관 이상의 관료에 국정을 위임한다고 했고, 실제 그러했다. 이러한 세종의 리더십을 본받아 인재를 중용했던 이가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그런데 그 딸인 박근혜 대통령은 1979년 퍼스트레이디 시절 사고방식이 여전히 화석처럼 굳어있다. 국민들도 이제 대통령 중심제의 폐해를 많이 느낄 것이다.”
―청와대와 별개로 여당 지도부 역시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입장인데.
“새누리당은 현재 얼마 남지 않은 정권 임기 속에서 ‘여기서 밀리면 끝장’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 생각 저변에는 역시 내년 대선이 있는 것 같다. 내년 권력지형이 바뀔 가능성이 높으니까. 지금 야당과의 기 싸움에서 밀리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거다. 솔직히 저렇게 국감을 거부할 정도의 사안은 아니지 않나.”
―어찌됐든 국민들 입장에선 이번 사태의 출구를 바라고 있다.
“국감은 예산 심의, 입법 활동과 함께 국회 본연의 업무다. 물론 정세균 국회의장께서 품격 없이 얘기한 측면(정세균 의장의 ‘맨입’ 발언)도 있다. 정 의장도 국회의 어른이니까 국민의당의 제안(정세균 의장의 유감표명) 정도를 받아들여 가야 하지 않나 싶다. 물론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도 단식농성 풀고 국감에 복귀해야 한다. 새누리당이 여당 아닌가. 수습은 여당이 해야 한다. 매번 제가 강조하지만 선당후사보다 선민후당이 우선이다. 당보다 국민이 먼저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