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때 유가공업계의 신화적 존재였던 최명재 파스퇴르유업 전 회장이 지난 6월 창업 17년 만에 파스퇴르를 한국야구르트에 매각했다. | ||
파스퇴르유업 창업자 최명재 전 회장에게 붙어 있는 별칭이다. 그는 지난 87년 서울우유, 남양유업, 매입유업 등 쟁쟁한 유가공업체들이 버티고 있는 유가공시장에 파스퇴르라는 이름을 들고 바람처럼 등장했다.
당시 그의 등장은 이래저래 화제였다. 유가공업계에 전혀 알려져 있지 않던 최명재라는 인물. 중동을 떠돌며 장사를 하던 그가 어느날 우유시장에 뛰어들었으니 그럴 법도 했다. 더욱이 최 전 회장은 저온살균방식이라는 새로운 유제품 제조법을 갖고 등장, 경쟁자들의 거센 저항을 받았다.
때문에 이를 두고 파스퇴르와 경쟁자들은 기나긴 소송전을 벌였다. 최 전 회장은 당시로선 파격적인 문구를 앞세워 광고전을 벌였고, 이에 맞서 경쟁자들은 사사건건 파스퇴르를 물고 늘어졌다.
어쨌든 파스퇴르는 창업 5년 만에 유가공시장의 기린아로 자리잡았다. 고가를 앞세운 그의 판매전략은 파스퇴르 브랜드를 고급으로 인식시키면서 급성장했다. 당시 압구정동을 비롯한 세칭 부촌지역에서는 파스퇴르 제품의 인기가 높았다.
그러나 파스퇴르 신화는 창업 17년 만에 끝났다. 지난 6월21일 파스퇴르는 한국야쿠르트로 매각되고 말았다. 거칠 것 없이 달리던 파스퇴르의 갑작스런 매각은 그래서 많은 의문을 남기고 있다.
어쨌든 파스퇴르가 매각되면서 세인들의 또다른 관심은 파스퇴르가 100% 투자해 설립한 특수목적고인 민족사관고(민사고)의 향방에 쏠리고 있다. 고교평준화가 된 지금 민사고는 가장 각광받는 명문고로 자리잡아 왔기 때문이다.
민사고는 파스퇴르유업의 창업자인 최 전 회장이 강원도 횡성 파스퇴르유업 공장 바로 옆에 세운 특수목적고다. ‘장사 중에 사람 장사가 가장 큰 장사’라며 영재교육에 투자했던 최 전 회장의 마지막 사업이 바로 이 민사고였던 것이다.
96년 3월 30명의 첫 입학생을 받은 이래 민사고는 국내의 대표적인 영재교육기관으로 통했다. 물론 민사고가 자리를 잡기까지는 파스퇴르유업의 기부금이 큰 몫을 했다. 때문에 파스퇴르유업 매각과 동시에 민사고의 향후 진로가 이슈가 되고 있는 것이다.
▲ 파스퇴르유업 건물. | ||
파스퇴르 매각 뒤에도 최 회장은 여전히 민사고에 머무르고 있다. 민사고 생활관의 10층이 최 회장이 거처하고 있는 곳. 형식적으로 최 전 회장은 민사고나 파스퇴르유업에 아무런 직함도 없다. 파스퇴르유업은 최 전 회장의 부인인 정금화씨가 사장으로 있었고, 민사고의 재단인 민족사관학원 이사장은 최 전 회장의 아들인 최경종씨다.
최 전 회장은 회사를 한국야쿠르트에 넘기기로 확정한 뒤 벌어진 마지막 조회에서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부인이자 사장인 정금화씨가 이임사를 낭독하고 곧바로 자리를 떴다는 것.
최 전 회장은 지난 2000년 7월 제주도 롯데호텔 사우나에서 화상을 당한 뒤 한때 위독한 지경까지 갔다가 기사회생했으나, 아직도 몸이 안좋아 직접적으로 회사 경영이나 학교경영에는 나서지 않고 있다.
실제로 유가공업계에선 파스퇴르유업이 2~3년 전부터 매물로 나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한국야쿠르트유업쪽에서도 “우리와 얘기하기 전 이미 다른 업체와도 인수합병 협상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지난해 10월엔 교육부 장관을 지낸 이돈희씨를 민사고 교장으로 영입했다. 이에 대해 최 전 회장은 “이 분이라면 민사고를 맡겨도 좋을 것, 민사고의 항해에 새로운 추진력을 얻은 것”이라고 밝혔다. 지난 2월엔 <20년 후 너희들이 말하라>(아침나라)라는 내용의 회고록을 내기도 했다.
그리고 파스퇴르유업을 매각했다. 파스퇴르유업의 대주주는 최 전 회장과 부인 정금화씨였지만, 사실상 최 전 회장의 작품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최 전 회장이 자신이 벌인 일을 ‘정리’하고 있다는 생각을 들게하는 행보다.
최 전 회장은 사고를 당한 이후로 민족사관학원 이사장직도 아들인 경종씨에게 맡겼다. 최 전 회장은 파스퇴르의 매각이 임박한 지난 4월 민사고 재단인 민족사관학원을 파스퇴르와는 무관한 완전히 별도의 재단으로 독립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문제는 파스퇴르유업이라는 재정후원자가 없는 상황에서 민사고가 버텨줄 수 있느냐의 문제다. 지난 95년 인가받아 96년 첫 신입생을 받은 민사고는 건물 공사비에만 5백억원가량이 들었다.
▲ 최명재 전 회장의 회고록 | ||
지방에 있다는 핸디캡에도 민사고가 국내 최고 수준의 영재교육기관으로 올라설 수 있었던 까닭은 파스퇴르 최 전 회장의 재정 후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점에서 이는 최대 위기라 부를 수 있는 상황이다. 이미 지난 4월부터 파스퇴르의 후원금은 끊어졌다. 최 전 회장이나 민사고쪽에서도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준비를 해왔던 것으로 전해진다.
자립기반을 다지기 위해 현재 2백80명 수준인 학생 수를 학년당 정원인 1백50명씩을 모두 뽑아, 정원을 4백50명까지 늘여 등록금 수입을 최대한으로 늘인다는 복안을 세우고 있다.
물론 입학기준도 과거보다는 완화될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과거 최 전 회장이 입학 자격을 못갖추면 정원을 안채워도 좋다고 했던 점에 비추어 보면 파격적인 변신인 셈이다.
또 영어캠프나 방학캠프 등 자체 수익사업도 벌이기로 하고 일부는 이미 시행에 들어갔다. 일각에서 ‘너무 비싼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았던 초중학생 대상 영어캠프도 그런 고육지책이었던 셈이다.
4주과정의 이 프로그램은 교육비와 기숙사비 등을 포함해 모두 3백90만원선으로 웬만한 단기 외국 어학연수와 맞먹는 비용이 든다. 그럼에도 3백 명 모집에 4백 명 이상의 지원자가 몰려 민사고에서 입학전형을 실시할 만큼 성황을 이뤘다.
산술적으로 계산하면 이 캠프로 민사고는 12억원의 운영자금을 확보한 셈이 된다. 앞으로 이런 식의 교육 인프라를 활용해 끊어진 재단전입금을 확보하겠다는 계획인 셈이다. 하지만 재정이 부족할 경우 그동안 해왔던 교육의 질을 유지할 수 있다는 보장이 불확실해진다.
반면 이런 위기 국면이 민사고 입장에선 ‘파스퇴르=민사고’라는 등식이 이번 파스퇴르 매각으로 깨어진 이상 보다 많은 기업을 새로운 후원자로 영입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민사고 출범 20년 뒤에는 노벨상 수상자가 나올 것이라 기대하며 15개의 예비 좌대를 마련해 둔 민사고가 당장은 설립 뒤 20년까지 설립이념이 지속될 수 있을지를 걱정해야 하는 형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