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장 임기 늘리기, 없던 자리 만들기…‘꼼수가 기막혀’
관료와 정치권 출신이 주류인 이들 낙하산은 금융 공기업은 물론 일부 시중은행과 각종 금융단체, 금융유관기관 등 종류를 가리지 않고 투하되는 중이다. 특히 몇몇 민간기구에서는 관료 출신들에게 자리를 만들어주기 위해 존재하지도 않는 새로운 직급을 만들거나 수장의 임기를 늘리는 등 꼼수가 등장하는 촌극도 벌어지고 있다.
요즘 보험개발원에서는 오는 11월 임기가 만료되는 김수봉 원장의 임기 연장 여부를 놓고 내부 논의가 한창이다. 관례대로라면 지금쯤 원장후보추천위원회가 구성돼 후임자 선별 작업이 시작돼야 하지만, 올해는 어찌된 일인지 김수봉 현 원장의 임기를 1년 늘릴지 말지 갑론을박을 벌이는 중이다.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 등 금융당국 관료 출신 인사들이 대거 금융사 빈 자리를 찾아 갈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일요신문DB.
지난 9월까지만 해도 차기 보험개발원장에는 금융위원회 국장 출신 S 씨가 내정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금융감독원 쪽에서 볼멘소리가 나오면서 선임이 미뤄지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역대 보험개발원장은 금융감독원 부원장보 출신이 계속 맡아온 자리이니만큼 금융위 출신이 맡는 것은 일종의 영역침범이라는 논리다. 실제로 김수봉 현 원장은 물론 강영구 전 원장 등이 모두 금감원 부원장보를 지내다 보험개발원장에 취임한 인물들이다.
문제는 현직과 전직 금감원 부원장보 중에서 당장 보험개발원으로 자리를 옮길 만한 사람이 마땅치 않다는 점이다. 특히 금융위원회 출신 S 전 국장의 경우 보험 관련 책을 낼 정도로 해박한 지식을 쌓은 인물이어서 그에 맞설 만한 자질을 갖춘 인물을 찾기는 더욱 어려운 실정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보험개발원은 아예 김수봉 현 원장의 임기를 1년 늘려 시간을 버는, 일종의 ‘꼼수’를 검토하고 있다. 금융위나 금감원 어느 한 쪽에 서기 힘든 입장인 데다 연장된 임기 동안 적당한 후임자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반영된 결과로 해석된다.
보험권에서는 일부 인사들에게 금융당국 출신의 취업 제한 기간인 3년을 채울 시간을 주기 위한 노림수 아니냐는 의심을 하기도 한다. 금융당국 출신도 퇴직 후 3년이 지나면 유관기관에 재취업할 수 있다는 점에 비춰볼 때 누군가를 염두에 둔 행보일 수 있다는 해석이다.
보험개발원의 이 같은 행보를 두고 금융권에서는 금융당국과 개발원을 동시에 비판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한 금융사 고위 관계자는 “엄연한 민간기구의 수장 자리를 마치 자신들이 맡아놓은 자리인 양 취급하는 금융당국도 문제고, 이를 당연한 일인 듯 받아들이는 보험개발원의 행태도 납득할 수 없다”면서 “국정감사에서 이 일이 다뤄질까 인사를 미루고 있다는 소문이 있는 것을 보니 잘못된 일인 줄은 아는 모양”이라고 꼬집었다.
보험권의 또 다른 민간단체인 손해보험협회에서도 웃지 못할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손해보험협회는 당초 생명보험협회와 함께 ‘관피아(관료+마피아)’ 출신 인물을 부회장으로 뽑을 예정이었다. 손보협회는 지난해 2월 장상용 전 손보협회 부회장 퇴임 후 서경환 전 금감원 국장을, 생보협회는 같은 해 9월 오수상 전 생보협회 부회장이 물러난 뒤 송재근 전 금융위 과장을 각각 부회장으로 내정했다.
하지만 정부가 관피아 척결 방침을 발표하면서 인선이 1년 이상 미뤄지자 부회장을 없애는 대신 전무자리를 신설하는 방안을 내놨다. 문제는 올해 국감에서 금융권 낙하산이 쟁점으로 떠오르면서 이마저도 쉽지 않아졌다는 점. 생보협회의 경우 국감 전인 지난 8월 송재근 전 과장이 전무직에 취임하면서 소나기를 피했지만 손보협회는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이렇게 되자 손보협회는 전무자리를 하나 더 만들어 내부 출신과 금융당국 출신에게 한 자리씩 나눠주는 묘수(?)를 짜냈다. 협회 출신 인사 한 명을 전무자리에 앉혀 논란을 피하면서 당국에 ‘내줄 것은 내주는’ 방안이다. 보험업계에 따르면 손보협회는 이 방식을 국감이 끝난 뒤인 11월 초 단행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외에도 금융권에는 여러 곳의 CEO자리가 낙하산 후보들을 기다리며 아이디어 짜내기에 한창인 것으로 전해진다. 금융권에 따르면 올해 말이나 내년 초 임기가 만료되는 금융권 수장은 10여 곳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증권가에서는 조만간 출범할 통합 KB증권 사장에 낙하산 경계령이 내려졌다. 현대증권과 KB투자증권이 합병해 탄생한 통합 KB증권은 최근 윤종규 KB금융 회장이 직접 CEO 물색에 나선 상황. 윤 회장은 자신의 인맥을 통해 통합증권사 사장을 추천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금융권에 따르면 윤 회장은 외부 출신 인사를 CEO로 영입하는 방안을 고려 중인데, 이 과정에 낙하산이 끼어들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금융권 다른 관계자는 “외부 출신 중에 CEO를 찾고 있다는 소문이 정치권과 관가에 파다한 상황인 것으로 안다”면서 “국민은행장 자리도 낙하산 인사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마당에 계열 증권사 CEO를 윤 회장 뜻대로 뽑도록 내버려 둘지 의문”이라고 우려했다.
현기환 전 청와대 정무수석이 시중은행 은행장 물망에 오르고 있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예탁결제원은 유재훈 사장 후임으로 금융위 1급 관료들이 대거 후보로 올라 있다. 김용범 사무처장, 유광열 FIU 원장, 이병래 증권선물위원회 상임위원 등이 하마평에 오른 인물들이다. 또 내년 3월 임기가 만료되는 수출입은행장 자리에는 최상목 기획재정부 차관이 거론되고 있다.
은행권에서는 기업은행이 낙하산 투하 예상지로 떠올랐다. 당초 국민은행장으로 거론되던 현기환 전 청와대 정무수석이 갑자기 차기 기업은행장으로 낙점됐다는 소문이 도는 중이다.
이영복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