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경영’의 충실한 ‘전도사’
▲ 지난달 28일 열린 삼성전자 주주총회에서 윤종용 부회장이 사회를 보고 있다. 윤 부회장은 그룹 내에서도 이건희 회장을 가장 잘 이해하는 경영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한국 증시 시가총액 1위 기업, 도요타와 함께 아시아 기업으로 순익 1백억달러 클럽에 가입한 기업의 최고경영자.
이 모든 게 삼성전자 윤종용 부회장을 수식하는 말들이다.
지난 96년 말 삼성전자의 매출은 1조9천억원, 순익은 1천6백억원. 하지만 97년 그가 삼성전자 총괄 대표이사 사장에 오른 뒤 삼성전자의 성적은 고공행진을 계속하면서 지난해 57조6천3백억원의 매출과 10조7천8백억원의 당기순이익을 기록했다.
이런 삼성전자의 기록적인 매출과 순이익 때문에 최근 윤 부회장이 언론 매체에 자주 등장하고 있지만 이전에 윤 부회장은 삼성전자의 주총 사회자로 일반인들과 낯을 익혔다.
지난 2000년 1월 삼성전자 부회장이 된 그는 시민단체인 참여연대가 삼성전자의 주총장에서 소액주주권을 행사해 소유지배구조 개선을 요구하면서 최근 몇 년간 주총 때마다 단골로 텔레비전 뉴스 시간에 출연했다.
경북 영천 출신인 그는 소박한 표정과 사투리기가 느껴지는 어눌한 말투로 답변했지만 가끔 직설적인 말들을 쏟아내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이의를 제기하는 소액주주에게 “몇 주를 갖고 있느냐”는 말을 던지거나 국내 교육의 위기를 강조하는 자리에서 국내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이들을 ‘똥차’에 비유해 관련 종사자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하지만 삼성전자 주총장에서 공개된 이런 그의 모습이나 몇몇 장소에서 공개된 말로 그의 전부를 재단할 수는 없다.
그는 기본적으로 공대 출신의 전문경영인이다. 서울대 전자 공학과를 나오고 MIT 유학을 다녀왔으니 수재로 분류될 만하다.
▲ 지난해 아테네올림픽 삼성홍보관을 방문한 이건희 회장과 윤종용 부회장. | ||
삼성에서 윤 부회장 위에는 오직 이건희 회장만이 있다. 그는 이건희 회장의 선문답식 지시를 가장 잘 알아듣는 경영인으로 알려져 있을 정도다.
사실 그는 현대그룹 전문경영인이 될 뻔했다. 지난 80년대 중반 삼성전자 VCR 사업부장을 지내다가 사표를 내고 현대전자로 옮겨갔던 것. 삼성은 이병철 선대회장 당시에는 한번 회사를 나간 사람은 다시 불러 쓰지 않는 불문율이 있었다.
하지만 이건희 회장이 87년 그룹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이 회장이 ‘VCR 사업부의 경영개선은 윤 부회장만이 풀 수 있다’며 윤 부회장의 재영입을 지시했다. 윤 부회장은 친정인 삼성으로 다시 복귀하고 나서는 탈모증에 걸릴 정도로 일에 정성을 쏟아 VCR 문제를 해결해 이 회장의 신임에 보답했다. 그는 이후 97년 외환위기를 계기로 또 한 번 삼성전자를 도약시켜 삼성전자의 간판 경영인으로 불리게 됐다. 이 회장의 사람 보는 눈이나 윤 부회장의 능력이 부합해 좋은 결실을 가져온 셈이다.
지난 겨울 이건희 회장이 삼성 계열사 사장단을 불러 스키장에서 ‘스키 경영’을 펼쳤을 때, 그는 육순이 넘는 나이의 초보 스키어임에도 땀을 뻘뻘흘리며 총수의 권장 사항을 몸으로 익히는 데 여념이 없었다.
삼성에서 그와 동급 직급을 가진 이는 이학수 구조조정본부 부회장 정도다. 하지만 이 부회장과 그는 역할이 다르기에 누가 그룹 내 2인자인지 가늠하기란 쉽지 않다.
다만 둘 다 삼성전자 소속이고, 돈 잘 벌고 경영 잘 하는 삼성전자에 대해 삼성그룹의 전체 계열사를 관할하는 삼성의 구조조정본부에서도 다른 계열사를 대하는 것처럼 하지는 못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윤 부회장이 삼성에서 많은 전문경영인들 중 하나였다가 그룹의 대표 경영인으로 떠오른 계기는 지난 97년 말 찾아온 외환위기 때다.
이때 윤 부회장은 ‘자율, 단순함, 스피드’를 내세우며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직원의 3분의 1을 감원하고 손실 사업부서를 매각하는 등 사업구조를 개편해 그 이듬해부터 기록적인 성장세를 끌어냈다.
이때부터 한국 경제에 ‘삼성전자 착시효과’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삼성전자는 국내의 기업 성적을 압도하는 기록을 내기 시작했다. 그때 내놓은 패러다임이 ‘위기경영론’이다.
물론 이 위기경영론은 이건희 회장이 주창한 ‘마누라 빼고 다 바꿔라’는 삼성 신경영론의 연장선상에 있다.
‘10년 뒤를 생각하면 등에서 식은 땀이 난다’는 이건희 회장의 위기론은 윤 부회장에게서 좀 더 구체적으로 반복된다.
그는 1백억달러 클럽 가입이라는 사상 최고의 실적을 거둔 최근에도 “가장 잘나가는 시기가 가장 위험한 시기다. 우리는 여전히 위기 상황에 처해 있으며 초일류 기업으로의 도약을 지속적으로 준비해 나갈 것이다”라고 ‘위기경영론’을 계속 강조하고 있다. ‘잘나간다고 방심하지 말라’는 내부 경고를 끊임없이 발하고 있는 것.
물론 윤 부회장의 경영 패러다임이 이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건희 회장이 강조하는 디자인 경영이나 속도 경영, 기술중시 경영, 인재 중시 경영은 윤 부회장이 다시 실물 경영에 그대로 대입시키고 반복하고 있다.
공학도 출신 전문경영인으로 윤 부회장이 큰 성공을 거두자 그는 자연스럽게 국내 공학계의 간판으로 떠올랐다. 이공계 석학들의 모임이라 할 수 있는 한국공학한림원에서 지난해 11월 그를 회장으로 뽑은 것이 바로 그런 예다. 법대, 의대만 선호하는 국내 풍토에서 그는 이공계로 출세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사례다.
하지만 그에게 찬사만 쏟아지는 것은 아니다. 합리적이고 냉철한 판단력을 지닌 삼성그룹 경영인의 공통적인 ‘약점’으로 지적되는 ‘총수 문제에 관해서는 이성을 잃는다’는 지적에서 그도 예외가 아닌 것.
▲ 지난해 10월11일자 <뉴스위크>에 소개된 삼성전자와 윤종용 부회장. | ||
하지만 여전히 직접적인 화법을 잊지 않고 있다. 그는 참여연대 대리인을 향해 “기업에만 지배구조가 있는 게 아니라 사회에도 지배구조가 있으며 여러분이 속한 조직(참여연대)에도 사회적 지배구조에서 엄청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고 ‘충고’하기도 했다.
어쨌든 그가 주총장에서 참여연대쪽 대리인들의 발언권을 받아들이고 발언 수위를 적당한 수준에서 끊어내는 기술이 해가 갈수록 향상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그가 위기경영론만큼 자주 얘기하는 게 ‘인재의 중요성’이다. 그는 “고교평준화를 폐지해야 한다” “영재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틈나는 대로 펴고 있다. 이는 이건희 회장의 천재 한 명이 수만 명을 먹여살린다는 ‘천재론’과 맞닿아 있다.
인재영입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지난 99년 하버드대 경영학석사 출신 인재를 영입했을 때 그가 직원들에게 호통친 얘기는 유명하다. 그는 삼성 특유의 ‘내부 정치’ 문화가 외부 영입 인사의 삼성 정착에 방해가 되는 것을 우려해 임원들에게 “(해외 영입 인재를) 나무 꼭대기에 올려놓고 흔들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경고를 할 정도였다.
그는 최근에도 외부에서 영입한 우수인재를 관리하기 위해 한 달에 한 번씩 이들과 식사를 같이하는 스케줄을 절대 빼먹지 않고 있다.
그는 자기공부도 게을리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술사와 문명사에 대해 강연을 할 정도의 지식을 내면화시키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이런 내공은 새벽 2시까지 책을 읽으며 쌓인 것이다. 공학도라 인문학적 소양과는 담을 쌓고 있을 것이라고 예상한다면 오산인 셈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건축양식부터 최근 일본 소니사의 전자제품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배경이 되는 문예사조와 시대, 그 결과물에 대한 상관관계를 설명해 낼 정도라고.
오늘의 삼성전자의 성공신화를 모두 그의 덕으로 돌릴 수는 없다. 다만 조종석에 앉은 그가 ‘조정’을 잘한 것만은 분명하다. 조종석에서 자주 하달되는 지침은 ‘위기경영론’이었다. 그 스스로도 잦은 위험 신호를 발사하는 그 자신을 가리켜 ‘혼란 제조기’라고 칭하기도 했다.
그는 지난해 11월 창립 기념식장에서도 “지금은 초일류로 가느냐 그렇지 않으면 추락하느냐의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고 강조했다. 물론 그가 위기 경영론만으로 임직원들을 독려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이런 경영 명제를 제시하며 삼성전자 식구들의 분발을 끌어냈다. 그 결과는 지난해 순이익 1백억달러라는 국내 기업으론 전무후무한 기록으로 이어졌고 삼성전자 직원들도 대박을 터트렸다.
그의 올해 경영 패러다임은 ‘기술 경영’이다. “미래에 먹고살 길은 기술밖에 없다. 그 중심에는 특허가 있으며 3년 안에 세계 3위권(미국 출원 기준 특허등록)으로 도약해야 한다”며 달리는 삼성전자호에 채찍질을 더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