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잘하는 회장님 이번엔 말로 안될걸?
▲ 박용성 두산그룹 회장. | ||
두산그룹의 수사를 담당하고 있는 서울중앙지검 조사부는 이미 두산그룹 임원과 오너 일가의 비리 의혹에 대한 구체적인 정황을 상당 부분 포착한 것으로 보인다. 이미 오너일가 3명을 포함해 두산그룹 임직원 28명이 출국금지되었다.
검찰은 박 회장의 장남인 박진원 두산인프라코어 상무에 대한 소환조사를 이미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수사망이 점점 박 회장을 향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부분이다.
두산그룹의 내부 비리가 조금씩 사실로 드러나고 있음에도 박 회장의 행보는 여전하다. 지난 5일 이집트 카이로에서 열린 국제유도연맹(IJF) 정기총회에서 3선 연임에 성공했다. IJF 회장 당선 직후 박 회장은 그룹 사내 게시판을 통해 “최근 그룹 임직원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잘 감내하면 곧 터널 끝의 불빛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두산의 미래 비전에 결코 흔들림이 없는 만큼 귀국 후 함께 글로벌 두산을 앞당기기 위해 노력하자”며 직원들을 격려했다.
박 회장이 IJF 회장 당선으로 자신감을 회복하고 그룹 추스르기에 나선 반면, 두산가(家) 형제의 난을 촉발한 박용오 전 회장은 전국경제인연합(전경련) 부회장직과 산하 단체인 APEC 최고경영자회의 의장과 한·대만 경제협력위원회 위원장 등 전경련 산하의 모든 직위에서 사퇴했다. 박 전 회장은 “형제 간 분쟁으로 전경련 관련 직책을 성실히 수행하기 어렵다”며 사유를 설명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를 두고 두산그룹이 검찰 조사로 위험에 처하자 박용오 전 회장이 현직에서 물러나는 것으로 사태를 마무리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시각도 없지 않다. 그러나 박 전 회장이 “두산일가는 경영일선에서 모두 사퇴해야 한다”고 하는가 하면 박용성 회장이 박 전 회장의 의전차량과 골프장 회원권을 회수하는 등 형제 간의 감정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검찰수사가 본격화하자 박 전 회장이 미련없이 전경련 활동을 접고 향후 사태 진전에 대비한 정중동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에 비해 박용성 회장은 여전히 직설적이고, 거침이 없다.
‘가식을 싫어한다’고 주장하는 그는 재계 인사 중 가장 많은 언론 인터뷰를 한 인물이다. 7월21일 박용오 전 회장이 두산그룹 오너 일가의 비리를 폭로하자 다음날 바로 이에 대한 반박 기자회견을 가질 정도로 다변이고 직설적이다.
당시 박 회장은 “천억대 비자금 누명을 썼는데, 가만 있으면 그걸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것이 돼버려서 해명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주변에서 ‘침묵이 금이다’, ‘기자회견 안하는 게 낫겠다’라고 말렸지만, 가만히 있으면 의혹만 커지고 기자 여러분들이 우리 집 앞에서 진을 치고 고생할까봐 이렇게 밝힌다”며 이유를 밝혔다. 평소 거침없는 발언을 하던 그가 비리 의혹에 대해 입을 다물 경우 그게 더 이상하게 비칠 것이라는 논리다.
박 회장은 자신의 거침없는 화법에 대해 “숨기는 것이 없고 모든 것을 솔직히 밝히기 때문”이라며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박용오 전 회장이 제기하고 있는 두산그룹의 비리에 대해서 아직까지 구체적 언급을 회피하고 있다. 지난 7월의 기자회견에서도 박 회장은 진정 내용의 사실 유무에 대해 “투서 내용에 대해서는 여기서 일문일답할 것도 아니고 수사받는 것도 아니니까 추후에 검찰에 가서 깨끗이 털어놓고 수사를 받을 예정이다”, “내가 여기서 대답하면 여러분들이 박용오 회장에게서 다시 확인하고 나에게 다시 확인하고, 그럴 필요가 없다. 소문 차원이라면 해명하면 되지만 대질심문은 검찰에 가서 조사를 받으면 되지 여기서 하는 것은 시간낭비다. 서로 감정싸움 같은 것만 촉발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그건 한마디로 웃긴 얘기다. 말도 안되는 거짓말이다”고 답변했다. 정작 박 전 회장이 제기한 구체적 비리에 대해서는 언급을 회피하고 그의 화려한 언변만 확인시켜 준 셈이다.
▲ 갈등관계인 형 박용오 전 회장. | ||
또 두산그룹 일가 28명이 두산산업개발의 두 차례에 걸친 유상증자에 참여하기 위해 2백92억원의 은행 대출을 받았고, 두산산업개발이 그 대출금 이자 1백38억원을 대납한 것이 검찰 조사에 의해 밝혀졌다. 두산산업개발은 하도급업체로부터 가격을 부풀린 뒤 이를 되받아 비자금을 조성한 뒤 이자 대납에 이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두산산업개발의 유상증자 때 박용성 회장은 12억9천만원을 대출받은 뒤 조카인 박재원씨(20·당시 14세)에게 증여한 후 두 차례에 걸친 증자대금으로 사용했는데, 이에 대한 증여세를 아직 내지 않아 세금탈루 혐의도 받고 있다.
8월30일에는 참여연대가 두산그룹 오너 비리를 추가로 고발하기도 했다. 두산그룹 오너들이 1999∼2002년 사원들이 출자한 두산신협 출자금으로 계열사 주식을 매입해 경영권 유지에 사용함으로써 회사에 6백25억원의 피해를 입혔다는 것이다.
박 회장 입장에선 갈수록 태산인 셈이다. 이것이 검찰 수사가 어디까지 밝혀낼지 주목받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박 전 회장이 주장하는 ‘두산 일가 비리’가 사실로 밝혀질 경우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고 주장해온 박 회장의 도덕성은 큰 타격을 입을 뿐더러 두산그룹의 박씨 일가 지배가 흔들리는 지경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때문에 두산그룹은 이 과정들이 박용성 회장 및 박용만 부회장에게 보고되지 않은 채 이루어졌다고 주장하며 ‘방화선’을 치고 있다.
박 회장은 평소 대한상공회의소 일에 70∼80%, 스포츠 대외활동에 10∼20%, 두산그룹에 10∼20%의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룹에는 1년에 두 번, 예산을 심의하고 사업경과를 보고받는 것 이외에는 실무자에게 다 맡기고 자신은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박 회장은 재계의 마당발로 통한다. 유도에 문외한이었던 그가 국제유도연맹 회장을 3선까지 하게 된 데에는 그의 친화력과 폭넓은 대외인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얘기도 있다. 정치권을 향해 거침없는 ‘쓴소리’를 해도 이렇다할 설화도 없었다. 그의 얘기에 정색하고 반박할 수 없었던 것인지, 익히 잘 알고 지내던 그가 하는 소리에 대놓고 반박하기 어려웠던 것인지는 명확히 구분이 안된다는 평이다. 그만큼 그가 정·관계에 발이 넓은 것은 사실인 듯하다.
사실 두산이 DJ정권 시절부터 한국중공업, 고려산업개발, 대우종합기계 등 굵직한 기업들을 인수할 수 있었던 것은 두산이 겉으로 드러나는 재무제표 이상의 ‘실력’이 있었다는 점을 지적하는 시각도 있다. 공기업이나 공적자금이 들어간 부실기업 인수는 돈만 갖고 되는 게 아니라는 게 재계의 불문율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두산의 잇다른 기업인수합병 과정이 정·관계 비리 커넥션의 핵으로 등장할 것이라는 섣부른 관측도 나오고 있다.
물론 여기에는 ‘마당발’ 박용성 회장의 활약을 빼놓을 수 없다는 것. 그는 자신의 ‘마당발’에 대해서도 자부심을 갖고 있다. 자신을 특정한 재능을 가진 전문가라기보다는 ‘전문가를 관리하고 감별하는 전문가’라고 표현한 것.
박 회장은 두산그룹이 한국중공업을 인수할 당시 주변에서 맥주나 만들던 기업이 중공업을 아느냐고 비아냥거리자 “나는 발전기는 모르지만 경영이라는 것은 해당 분야를 가장 잘 아는 전문가를 적재적소에 배치해 이익을 가장 많이 내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만약 이번 두산 비리가 두산측의 주장대로 실무자들이 비리를 저질렀고 박 회장만 그것을 몰랐다면 박 회장은 부적절한 경영을 한 셈이고 전문경영인을 감별하는 감식안도 문제가 있었음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른바 ‘쓴소리’와 ‘바른말’을 전매특허로 삼은 박용성 회장이 그런 말을 할 처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형제의 난’이 일어나기 전까지 두산그룹은 드물게 형제간 경영권이 승계되고 인화와 우애가 좋은 기업이었다. 박 회장은 평소 세습경영이나 가족 경영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밝힌 바 있다. 능력 없는 재벌가의 자식들보다는 전문경영인 체제가 기업을 이끌어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패밀리 비즈니스가 아니라 비즈니스 패밀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
박 회장이 썼던 글 중 ‘네 형제’라는 칼럼은 두산 형제들의 비극을 예견키라도 한 듯하다. 그 글에서 그는 ‘맏형이 사업을 일으키고 동생들은 형의 업체에 재료를 납품하면서 점차 품질이 낮아지고 가격이 높아지면서 경쟁력을 잃게 되고 끝내는 맏형의 업체도 도산하게 된다’는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일가의 비극이 우리 기업 내에서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같은 그룹 내 기업 간에 너무 의존하려 하지 말고 스스로의 노력으로 시장을 개척해 나가는 것만이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말로 마무리하고 있다.
박 회장과 박용오 전 회장의 갈등은 재봉합될 수 있을까. 지금까지의 양측의 반응을 보면 이미 화해할 수 있는 선을 넘어선 것처럼 보인다. 박 회장은 형제 간의 우애에 대해 “형제 간의 우애는 다 같은 가치관을 나눌 때 그게 우애다. 우리 여섯 형제 중 하나가 나머지 다섯에 반하는 행동을 했을 때 그것을 끌고 나가야 하는가. 나는 성자가 아니라서 그렇게 못하겠다”고 기자회견에서 밝혔다.
당시 박중원 두산산업개발 상무(박용오 전 회장의 차남)에 대해서도 “걔가 그동안 다니면서 한 짓을 보면 도저히 조직의 일원으로서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오늘 해임했다”고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고 그 발언 내용도 고스란히 공개했다. 검찰의 수사가 어디까지 진실을 밝혀낼 수 있을지 주목받고 있다.